직선 위에서 떨다 창비시선 226
이영광 지음 / 창비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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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광의 『직선 위에서 떨다』를 들고 있었다. 막 읽으려던 차에, 옆에 있던 선배가 무슨 책인지 달라고 한다. 그리고 미처 두 장을 다 못 읽고 내게 넘겨준다. 왜냐고 물어볼 겨를도 없이 대뜸 「나팔꽃」에서 '사랑이란 가시나무 한그루를 알몸으로 품는 일 아니겠느냐 입을 활짝 벌린 침묵 아니겠느냐'란 부분이 마음에 안 든단다. 마치 인생을 다 통달한 듯이 단정적으로 말하는 시인은 신뢰가 안 간단다. 시인이 제 인생을 그렇게 살았는지는 모를 일이며, 혹 그렇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성급한 결론은 독자로 하여금 동의를 이끌어 내지 못하는 거 아니겠냐고 말한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말한다. 몇 자 읽지도 않고 평가하는 거, 그것부터가 성급한 결론이 아니겠느냐고. 그리고 선배에게 받아든 책을 읽기 시작한다.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다. 내가 이 책을 고른 것은. 벼랑에 오직 '수정할 수 없는 직선'이 놓여 있다. 삶의 숙명에 대한 비애가 느껴진다. 왜 하필 누군가는 벼랑 앞에 섰어야하며, 어찌하여 이 쪽 벼랑과 저 쪽 벼랑 아닌 곳을 이어주는 게 달랑 외나무다리 하나란 말인가. 대범한 체 하는 인간이라도 벌벌 떨면서 건널 수밖에 없는 길이 벼랑에 놓여있는 외나무다리이다. 그런데 시인은 말한다. 두려움 없는 삶도 스스로 떨지 않는 직선도 없지 않겠느냐고. 더 먼 곳으로 사람을 건네다주는 그 단호한 직선마저도 실은 떨고 있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숙명을 가진 존재는, 어찌할 수 없이 그 살풍경을 배경으로 외나무다리를 건너야만 하는 사람들도 물론이거니와 그 사람들을 엎드려 받아주는 외나무다리 둘 다를 말한다.

시인이 감정의 극단을 경험하는 일은 예삿일이면서도 특별한 일이다. 쓸쓸이 혼자 남겨진 채로 '더이상 들어갈 수 없는 것에 닿아서야' 정말 그제야 '그곳에 단정히 여민 문'을 인식한다. 변변치 않고 허술해 보이는 세상살이에 느끼는 서글픔은 남들이 위로조차 해줄 수 없을 정도다. 동시에 적의와 자신에게 향하는 무기로 보이던 고드름이 뾰족한 끝에서부터 녹는 것을 보고서 이제 누군가를 용서하고 이제야 누군가를 용서받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이런 일들에 전혀 익숙해지거나 편해지지 못하고 매번 다른 같은 무게의 통증을 느낀다. 세상 자체가 극단을 오락가락하게 만들기 때문일 터. 단순화된 세상은 '견딜 수 있는 것과 견딜 수 없는 것'이 있을 뿐이다. 그는 오히려 '엄살하고 발광하고 총질하고 땐스하는 이 엽기' 세상을 들여다보는 일에 염증을 느낀다. '스스로를 팔기위해 악착같이 이 거리에 매달린' 셈이며 이런 삶은 쓰레기를 닮아갈 뿐이다. 그래서 그는 지나간 일들을 말한다. 순전히 아름다워서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기에 지나간 일들을 말한다. 또한 인간 우위에 가치를 두고 있는 듯한 사물에 대해 노래를 하기도 하는---.

시집의 맨 끝장을 덮고서 답답해져서 창문으로 다가갔다. 시인이 시를 '아무리 먹어도 배 안 불러지는 순 다원성 순 다양성의 진수성찬'이라고 말한 것을 생각한다. 푸푸 입김을 내뿜어 뿌옇게 만든다. '시를 모르겠다.'고 쓴다. 정말 시는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는 게 있기나 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 모르겠으니 다시 한 번 더 읽어봐야겠다. 뭘 알기를 바라는 게 아니다. 단지 그냥 덮어두고 말 수가 없어서다. 그동안도 마찬가지였고 또 한참이나 시 주변에서 계속 기웃대고 있을 나다. 아마 다른 것도 마찬가지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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