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바다, 내 고향 바다는 듣기 위함이 아닌 침묵하기 위한 귀를 내게 보여주었다. 접신(接神)한 귀, 침묵으로 아름다워진 말들이 대양을 건너는 새떼들을 기르고 있었다. 바다의 귀 때문에 내내 부끄러웠다. 

   시끄럽다. 내 뼈가 살을 향해 내 살이 뼈를 향해 이토록 부대끼는 시끄러운 싸움은 언제쯤 끝나려는지. 어쩌겠는가 때로 나는 이 싸움이 즐겁기도 한가보다. 잘 발라져 가붓하게 스스로 떠오를 때까지, 어쩌면 최후까지 들끓어야 하리라. 누대에 걸쳐 이미 죽은 것들이 뒤척이는 날 것의 몸을 끌고 나는 아직도 아름다운 세속을 꿈꾸는 것이다.

   서른이다. 공중에서 얼어붙곤 하던 꽃들이 부빙을 이루며 흘러갔다. 나의 혁명이 몽환임을 깨닫게 되기까지, 나의 몽환을 사랑하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생각건대 내가 진실로 사랑한 것은 모든 생명이 품고 있는 독기였으니. 부디 이 시들이 세상의 소란에 독이 되기를. 

 

   부족한 첫시집에 기쁨이 있다면 고향 바다와 어머니 아버지께 바쳐야 하리라.

2000년 1월

김선우

  

   '침묵하기 위한 귀'는 커녕 '듣기 위한 귀'마저 갖질 못했다. 남의 말을 귀담아 듣기 보단 내 말만을 내세우기 바빴다. 나와 내 편과 남과 내 편 아닌 것들로 나누는 데 앞섰다. 옹졸했으며 독선적이었고 이기적이었으며, 때로는 자기기만적이기도 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함인지 흠결하나 없는 도덕적으로 드높은 사람인 체 했다.  

   이런 나를 온 마음 다해서 껴안을 수 없을 때. 더이상 가식적인 나를 견딜 수 없을 때. 마음놓고 실컷 소리내어 울 수도 없었을 때.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정해놓은 나에게서, 그 선에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음을. 자기 검열이 폭력과도 같음을. 실은 엄청난 가혹함이었음을. 

   더구나 내 약점을 가리기위해 둘러쓴 휘장이 실은 세상을 향해 내 눈을 막는 꼴이 되어 버렸음을.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기보다는 선험적인 내 인식을 믿어버렸기에 그랬다. 세상을 헛보는 일이 많기만 했다. 오로지 내 기준, 내 잣대, 내 판단들로.

   이들로 내 속이 이미 곪을 대로 곪아있었다. 남이 상처를 주기보다는 나 스스로 쉴새없이 할퀴고 후벼파서 만든 상처. 곧 꾸미고 허세부린 겉과 내색하지 못한 속과의 괴리. 그 틈에서 상처가 솟구쳤던 셈. 여기서 진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던 거다. 

   이즈음 눈에 띄게 말이 줄었다.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내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이런 내가 흐뭇하다. 낯설기도 하다. 혹은 편안하다. 아마도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그럴 거다. 단숨에 내가 꿈구는 다른 사람으로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서서히, 차차 나아질 테지.

   이렇게 마음을 바꾸어본다. 내가 애쓴 만큼, 딱 그만큼 얻어 가길. 더이상 허황된 욕심을 부리지 않길. 그렇다고 희망을 놓아버리진 않길. 나에 대한 주문사항이 어려울 수록 힘이 난다.    

   (아마, 나는 김선우와 그녀의 시에 대한 인상을 말하고 싶었을 테다. 그의 말, 몇 구절을  따오면서 애먼 얘기만 해댔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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