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의 배에서 꼬르륵꼬르륵 - 기도이야기 성경창작동화 5
오선화 지음, 김은혜 그림 / 강같은평화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성경동화의 새 모델을 세워가다 : 〈에스더의 배에서 꼬르륵꼬르륵〉, 〈모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동화가 어린이의 전유물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어른들은 소설을 읽고 청소년은 주로 위인전을 손에 들던 때입니다. 취학 전 아동과 초등학생은 동화와 만화책을 주로 읽었죠. 초등학생들은 한글을 깨치자마자 동네 만화방으로 달려가기 바빴습니다. 다들 그랬던 건 아니고 제 경험에 빗대면 그렇다는 겁니다. 당신 전 친구 집에서 유행하던 월간 소년중앙을 보고 그 애를 줄곧 찾게 되었는데, 제가 함께 놀지는 않고 만화만 보는 게 괘씸했는지 그 친구, 다음 날부터 대문 출입을 금하더군요. 만화 맛이 옴팍 든 전 안달이 났더랬습니다. 달리 방법이 뭐 있었겠습니까? 몰래 몰래 만화방을 들락거릴 밖에요.

 

하루는 유달리 어두웠던 만화방에서 신나게 만화를 보고 뒷맛을 다시며 만화방을 나오는데, 어두운 데서 나왔으니 얼마나 눈이 부셨겠습니까? 말해 뭐 하겠어요. 눈을 사정없이 비벼댔지요. 아마도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나 봅니다. 고작 수 분 내였겠지만 초등학교 2학년 쯤 됐으니 그 때로 따지만 수분이 아니라 한 수십 분은 됐던 거 같습니다. 떡 하니 어머니가 제 앞을 버티고 섰는데 눈앞이 노랗게 되고 말았죠. 황급히 시장을 보고 돌아오던 어머니가 만화방 앞에서 눈을 부비고 있는 절 보고 기겁하셨던 겁니다. 말하나 마나 전 혼쭐이 크게 났고 다시는 만화방에 얼씬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서야 어머니의 분에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한 일주일이 지났나, 아마 그랬을 겁니다.

 

위인전과 동화 전질이 집에 배달되었습니다. 보자마자 화들짝 놀란 전 웬 떡이냐는 생각에 전집을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아마도 저를 혼낸 날,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말씀드렸겠죠. 저렇게 만화방에 다니다 얘 버린다고 말이죠. 한참 뜸을 들인 아버지가 그러면 동화책을 사주자고 했을 테고요. 다음 날 일찍 일을 마친 아버지가 책방에 들르셨던 겝니다. 동화책을 주문하는 참에 위인전도 그 위에 얹자고 하셨을 테고요. 그렇게 전 때 아닌 전집의 주인이 됐습니다. 기억을 되돌아보면 전집을 다 읽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학교를 파하고 돌아온 날 전집을 보고 무한히 기뻤던 마음과 그날 저녁 아버지가 흐뭇하게 제 얼굴을 바라보시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책 읽는 습관을 형성하게 된 계기도 전집을 통해서였습니다.

 

동화는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펼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 또래 아이들이 다 그렇듯이 아이들이 꾸는 꿈이란 게 대부분 실현불가능한 것이었지만 그 꿈이 성장하는 데 날개를 달아주었던 것만은 부정하지 못할 겁니다. 전 동화를 통해 사고를 넓게 키울 수 있었습니다. 아마 그때쯤이었을 겁니다. 먼저 교회를 나가셨던 어머니의 권유로 교회란 델 처음 가게 되었죠. 선뜻 이해되지 않는 노래였지만 동요 비슷한 찬송을 부르는 게 좋았고, 예쁜 여자 선생님도 좋았습니다. 선생님이 들려주던 이야기도 동화처럼 들린 건 또 다른 소득이었습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가 아쉽더군요.

 

당시 책방이 어딨는지, 그곳에서 책을 어떻게 사는지 몰랐기도 했지만 성경이야기가 동화로 묶여 나오지 않은 데 적잖이 실망했던 거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라고 성경동화가 없지 않았을 텐데, 어린 전 그냥 없다고 믿었던 거지요. 그렇게 전 일주일에 한 번 찾아오는 선생님의 동화시간을 무척 기다리게 됐습니다. 하지만 20분이 채 되지 않은 동화시간이 성이 차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기대감이 출중했던 터라 견딜 만했습니다. 그런데 한두 번 듣다보니 선생님의 레퍼토리가 몇 가지 주제에 한정되는 걸 알아차리게 되더란 말입니다. 식상해진 전 급기야 단물 다 빼먹은 벌처럼 그곳을 빠져나오게 됐습니다. 그 후로 중학교 1학년이 될 때까지 교회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기대감을 충족해줄 동화가 있었더라면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중학생이 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줄곧 교회에 붙어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호기심을 지속적으로 충족시켜줄 그 ‘무엇’입니다. 어린 아이들이니 그 무엇은 동화가 차지하는 게 좋겠지요. 부모 마음 또한 제 아이들이 먹는 거나 놀러 다니는 게 아닌 책이 훨씬 나을 법도 하고요. 동화가 주는 유익이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데 필요한 사회성을 높이는 것도 좋고, 꿈을 키워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 모두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들보다 더 중요한 게 사람의 본질인 영을 살찌우는 데 동화의 역할이 적지 않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성경동화는 아이가 자라는 동안 신앙에 뼈대를 세우고 신앙의 길로 성큼성큼 걸어갈 몸을 형성하는 데 더없이 필요한 수단입니다. 우리가 간과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말의 힘입니다. 글은 활자화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활자를 읽는 동안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빠르고 쉽게 글 속의 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갑니다. 곧 믿게 된다는 거지요.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고 한 성경 말씀을 보면 눈과 입으로 보고 들은 동화가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을 겁니다. 말씀에서 떠나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을 기대한다면 아이들 눈높이에 맞춘 성경동화를 읽게 해주는 게 좋습니다. 더욱이 신앙 안에서 자라길 소망하는 부모라면 아이가 일찍부터 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눈뜨는 것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그런 때 성경동화가 아이들에게 친절한 길라잡이 되어 줄 거라고 믿습니다.

 

먼저 소개해 드릴 〈에스더의 배에서 꼬르륵꼬르륵〉은 제목만큼이나 참 흥미롭습니다. 〈에스더의 배에서 꼬르륵꼬르륵〉은 이스라엘의 존망이 걸린 문제를 슬기롭게 헤쳐나간 에스더의 신앙과 삶을 엮고 있습니다. 에스더 시기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있었습니다. 당시 바빌론 2인자였던 하만은 이스라엘 백성을 쓸어버릴 계략을 세우고 착착 그 일정을 진행해나갑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에스더의 오빠 모르드개가 동생이자 왕비인 에스더를 찾아오고 에스더는 왕에게 직접 이스라엘을 구해 달라고 간청하기로 합니다. 에스더는 꾀를 내 파티를 벌이고 그 자리에서 왕에게 하만의 계략을 폭로해버립니다.

 

전체 스토리는 위와 같이 간단히 요약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갈 대목이 적지 않습니다. 우선 에스더는 왕비라는 지위를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왕비는 왕의 지근거리에서 왕에게 간청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입니다. 지위를 이용하면 얼마든지 하만을 내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에스더는 그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하만의 계략이 권력을 다투는 투쟁이 아니라 영적 싸움임을 알았던 에스더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 후 응답을 받고서야 비로소 왕에게 나아가 청이 있음을 아룁니다.

 

지위가 높을수록 권한은 더 많이 생깁니다. 굳이 다른 힘을 빌릴 것 없이 소유한 지위만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지위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면 제 몸을 상하게 하는 일 또한 심심치 않게 일어납니다. 성경엔 그 지위를 현명하게 사용해 크게 칭찬받은 인물이 있습니다.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고 예수 그리스도께 청한 백부장이 그 주인공입니다. 권한이 미치는 힘을 잘 알았던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한이 자기 권한에 비할 바 아님을 꿰뚫었습니다. “직접 병석에 오시지 않아도 이 자리에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 에스더 또한 왕비라는 지위가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높은 경륜과 능력을 간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구한(믿은) 대로 얻습니다.

 

제한된 머리에서 나오는 지혜와 능력에 한계가 있는 몸에서 나오는 힘을 의지하는 일은 어리석습니다. 그런 지혜와 힘은 상대방도 엄연히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만고만한 지혜와 힘으로는 둘 모두 공멸 또는 둘 중 하나의 신승(辛勝)을 이끌어낼 뿐입니다. 신승의 경우 화근을 남겨놓기 쉽습니다. 하지만 능력이 무한한 하나님은 완전하고도 깨끗한 승리를 보장합니다. 그런 사실을 잘 안 에스더가 줄곧 하나님을 의지한 건 너무도 당연해 보입니다.

 

부단히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은 어려서부터 다져야할 근간이 되는 덕목입니다. 하나님이 존재와 목적의 근본임을 아는 일부터 사탄을 대적하고 그를 향해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는 일의 시초가 겸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작 ‘나 하나 살자’고 태어난 인생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적어도 한두 명, 많게는 수백, 수천의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데 우리가 쓰임을 받는다면 그것보다 귀한 일이 없을 겁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한 에스더에게 배울 교훈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에스더의 배에서 꼬르륵꼬르륵〉에 실린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너무도 유명해서 달리 설명이 필요 없는 인물입니다. 총리대신이었던 다니엘은 다른 총리대신 2명과 갈등합니다. 갈등의 원인은 그 두 명과 달리 다니엘이 이스라엘 출신이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집요하게 왕을 채근해 왕 외에 다른 신에게 절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공표하게 만듭니다. 그 법은 하루 세 번 예루살렘으로 난 창문 아래서 하루 세 번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다니엘을 제거하기 위한 계략이었습니다. 올가미에 결려든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지게 됩니다.

 

어느 경우라도 절대 권력을 쥔 왕의 명령을 어기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왕이 곧 법이었던 시대에 백성들은 그 법 아래 머리를 조아리는 게 당연했습니다. 다니엘은 그 보다 높은 법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자신을 총리대신에 올린 분이 하나님이심을 이해했던 다니엘은 세상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결심했던 겁니다.

 

다니엘이나 에스더는 모두 강고한 현실 권력 앞에서 현실을 압도하는 최고의 권력을 보았습니다. 세상이 잠시 악한 영의 손에 있는 듯 보여도 그 실체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결정타를 먹은 허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 때 예수 그리스도의 발 깔개(발등상)가 될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다니엘과 에스더가 믿은 게 그런 사실입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여호수아 1:9)

 

〈에스더의 배에서 꼬르륵꼬르륵〉은 믿고 의지할 대상에 대해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앙의 대상은 현실 권력이 아닙니다. 현실 권력은 어른 입장에서는 직장 상사, 또는 이해관계자로 나타날 겁니다. 아이들에게 그것은 친구나 선생님이 되겠지요. 그와 같은 권력은 자주 상대방을 압도합니다. 특히 상대방이 권력의 외향에 사로잡힐 때 심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권력 안에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에스더가 왕비여서 이스라엘이 죽어야한다는 논리가 얼마나 근거박약하며, 다니엘이 총리대신인 것에서 그의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음을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허술합니까? 그럼에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 크리스천을 해하려는 악한 영이 존재하고 있음을 방증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배를 타고 강 건너던 중 폭풍이 일어난 것 또한 같은 맥락입니다. 악한 영은 수시로 크리스천을 넘어뜨리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와 같이 위협했다면 우리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쯤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십자가와 부활로 악한 영의 세력을 근본적으로 끊은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저자가 줄곧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을 전면 가득 그린 이유도 ‘세상에 있는 이’(사탄)보다 크신 분이 계심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이 책이 자라날 아이들을 먹이는 데 크게 쓰이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의 양식이라고 했습니다. 이 책이 그와 같이 사용돼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는 일에 헌신된 크리스천을 우후죽순처럼 일으켜 세우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연속 출간을 앞두고 있는 관련 기획물에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이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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