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의 삶
칼 번스타인 지음, 조일준 옮김 / 현문미디어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최근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군의 유력 후보들 중 특히 배럭 오바마 상원의원의 약진이 두드러진다는 보도가 나왔다. 선두를 유지하던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과 오차 범위 내의 접전 양상을 벌이고 있다는 논평이 있고 보니 압도적인 지지세를 이어나가고 있다던 힐러리 진영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물론 오바마 상원의원의 흑인 프리미엄과 그의 유연한 사고 및 정책 비전에 대해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그것이 다분히 개인적인 매력에 기반하고 있다고 보았으므로 일종의 반등 장세를 보인 후 차츰 거품이 걷힐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초의 기대를 크게 앞서는 이상 동향에 의외라는 반응이 앞섰던 것이 사실이다. 전통적으로 검증된 정치인을 선택하는 미국 내 유권자들의 오랜 기준에서 보면 오바마는 힐러리를 따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양상은 오바마에게 유리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이유는 엉뚱한 곳에서 불거져 나왔다. 힐러리가 특정 사안에 대해 말을 바꿔왔다는 것. 특히 당시로선 대세에 밀려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후 민주당의 발목을 잡을 것이 자명했던 이라크와의 전쟁에 찬성표를 던진 것은 잊고 이제 와서 이라크 전쟁은 실패한 전쟁으로 규정하고 행정부를 압박하는 것은 정치도의적으로 옳지 못하다는 비난에 힐러리 또한 직면해 있었던 것이다.

 

최근 힐러리의 사무실에서 발생한 인질사건이 화제를 몰고 왔다. 그 중심에 힐러리가 있었다. 힐러리가 그 사건에 침착하게 대응함으로써 대통령의 자질을 보여주었다고 하는 평가에서부터 위기를 기회로 바꿀 줄 아는 정치인이라는 평가에 이르기까지 그 반향이 작지 않았다. 힐러리에게 있어 호재임에 틀림없다.

 

힐러리는 주목받는 정치인이다. 그가 미국의 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그런 정치인을 이제야 조명하는 것은 늦은 감이 없잖아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이 크게 시의 부적절하지 않은 것은 요즘 우리 정치 현실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당장 대선을 통해 대통령을 선출해야 하는 우리 입장에서 과연 후보들 중 누구를 선택해야 하느냐는 문제는 고민스럽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이 책이 보여주고 있는 놀라운 기자정신으로 후보자의 장단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변변한 책 한 권 시중에 나온 적 없는 우리의 현실은 후보자에 관한 정보 엑세스라는 측면에서 미 국민들에게 한참 뒤쳐진 현실을 웅변적으로 반영하고 있으니 답답할 뿐이다.


 

책 속 힐러리는 준비된 정치인이었다. 싹수는 어릴 적부터 알아본다고 했는가. 힐러리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특히 예일대 법대 시절 그가 보여준 통합과 조정의 능력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1970년 당시 닉슨 행정부는 캄보디아 침공 소식을 발표했다. 대학과 사회는 노동절 궐기 대회를 기점으로 빠르게 반체제 운동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사회 혼란이 극에 달했다고 판단한 주 방위군은 시위대에 강경 대응함으로써 사상자가 속출했다. 여차하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는 위기 상황에서 힐러리는 평화적이고 실질적이며, 장기적 목표를 추구하는 일단의 사람들과 행동을 같이 했다. 시위 전술에 대한 논쟁이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자 그녀가 나서서 감정적인 대응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해결책을 모색했다. 학생과 학장은 그런 힐러리에게서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힐러리가 대학 1학년 때의 일이다.

 

대학 시절 힐러리가 보여 준 리더십은 상황 적응적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지도자 일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전통적 리더십관을 버리고 상황과 그 상황 가운데 움직이는 구성원의 요구와 필요를 정확하게 읽어내고 그것을 합리적으로 조직화해 내는 리더십을 힐러리가 극명하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학내의 견고한 지지기반을 바탕으로 대중적 이미지를 구축해나가고 있던 힐러리를 빌이 제대로 알아보았던 것 같다. 두꺼운 안경테를 쓰고 평범한 옷차림을 한 힐러리와 히피족처럼 투박한 옷과 덥수룩한 수염을 지닌 빌의 만남은 불타는 야망과의 결합이었다고 당시 친구들은 회상한다.

 

「"빌이 특유의 남부 시골사람 같은 소리를 할 때면 힐러리의 놀림감이 되곤 했다. "요점만 말하시죠, 빌 아저씨!" - 그녀는 이후에도 줄곧 이렇게 말하며 놀리곤 했다. - 한편 빌은 중서부 사람 특유의 단도직입적인 성격에 적응하는 데에 꽤 시간이 걸렸다.」(P40)

 

둘의 성격은 출신 배경만큼이나 상이했다. 일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그 둘의 성격차이는 극명했다. 르윈스키 사건을 예로 들면 빌은 미적거리며 사건을 키우는 스타일이었던 반면 힐러리는 잘못을 인정하고 대응책을 찾는 상반된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더 이상 손쓸 틈도 없이 사건이 확대되고 나자 비로소 힐러리에게 사건의 전말을 고백한 빌은 그녀의 손에 이끌려 보도진 앞에 서는 나약한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아마도 그런 성격의 일단이 그들의 연애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나지 않았을까.

 

자기 역량만으로도 훌륭히 정치인으로 커나갈 수 있었던 힐러리가 빌이라는 남자와 결혼한 사실에 주변 사람들이 의아해 했다는 점만 보아도 힐러리의 개인의 역량은 두루 인정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능력은 지금 그녀가 민주당의 유력 대선 후보로 부상한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전직 퍼스트레이디 타이틀이 전혀 후광이 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것을 간단히 뛰어넘는 정치력을 그녀는 이미 대학 시절 충분히 입증해보였다.

 

빌이 청혼한지 2년이 지나서야 그 청혼을 받아들였을 만큼 힐러리는 신중했다. 예일대가 소재한 코네티컷주는 정치 1번지 뉴욕주와 면해 있었으나 빌이 정치인으로서 첫발을 딛고자 하는 아칸소주는 저 먼 남부에 위치해 있었다. 주가를 올리며 정치 신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딛기에 코네티컷만큼 적절한 곳은 없어 보였다. 더군다나 힐러리는 주목받고 있었다. 기약 없이 중앙과 멀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힐러리는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목적의식적으로 움직이던 힐러리에게 그 선택은 사랑하는 사람을 얻는 선택이자 정치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빌의 친화력과 정치력을 믿었으며, 그에 앞서 그녀 자신의 가능성을 충분히 믿었다. 이후 그녀는 빌을 추동하는 정치 파트너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간다. 아칸소주지사의 아내 위치에서 그녀는 조언자 역할 이상을 해냈다. 힐러리의 꿈은 분명해 보였다. 빌의 대통령 당선과 대통령이 될 자질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퍼스트레이디, 그리고 최종적으로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는 꿈, 그 꿈을 위해 힐러리는 쉴새없이 공부하고 현장을 누볐다.

 

퍼스트레이디가 된 힐러리는 직접 정책을 만들어내고 집행한다. 물론 그런 정책들은 해당부처의 이름으로 일반에 공개되었지만 분명 힐러리의 구상이었다. 그 중 의료보험제도 개혁안과 관련해서 평소 신중한 모습과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법안 상정의 연기를 주문한 참모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강행했던 것. 그로 인해 톡톡한 대가를 치러야했다. '국민들에게 좋은 의료보험제도를 제공하고, 자신의 약속을 지키려는 그녀의 처절한 노력이 오히려 그녀를 경솔한 인물로 만들었다.'

 

일반인처럼 정치인들도 수많은 선택에 직면할 것이다. 그럼에도 정치인의 선택에 화살이 집중되는 것은 그들의 선택이 미치는 영향이 워낙 크기 때문일 것이다. 힐러리가 이후 상원의원으로 활발히 정치활동을 벌이는 와중에 수많은 반대에 부딪히게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더군다나 위에서 본 의료보험제도 개혁안의 경우뿐 아니라 닉슨 행정부의 캄보디아 침공을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전쟁의 부조리한 확장으로 규정한 그녀가 상원의원이 되고 나서 '미국의 정치·군사적 목적이 완수되기 전까지 이라크에서의 미군철수는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부시 대통령에게 전쟁을 위한 무제한의 권한을 주는 것에 찬성표를 던진' 것은 외관상 불가해한 결정이지만 정치인 힐러리의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측면도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개인적 선택들이 특히 대선을 준비하는 미 정국에 그녀에 대한 반대파를 양산해 왔음을 볼 때 그녀가 감수해야 할 부분임에 들림없을 것이다. 난관을 헤쳐나가는 정치인으로서의 굳건한 이미지를 보여주어야 하는 것 또한 그녀의 몫일 것이다. 며칠 전 배럭 오바마에 월등히 앞선 주에서 지지율이 역전 당한 힐러리 진영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는 보도가 나왔다. 빌은 참모를 교체할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힐러리는 단호했다. 현재의 참모진을 그대로 유지하고 예비 대선을 치를 작정인 것이다. '선택과 집중', 그리고 '실패와 성공'에 의연하게 대처해나가는 그녀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특정 인물을 무한정 띄우는 고만고만한 책들이 아니다. 이 책의 가치가 번득이는 것은 주인공 주변의 수많은 인물들의 증언을 수집하되 특정시각에 매몰되지 않도록 객관적인 시각에서 취사 선택하고, 취재 과정에서 수집한 다종다양한 자료와 의정활동을 비롯하여 그녀가 추진한 다양한 정책들을 재분류하는 고된 과정을 거친 뒤에 그 각각의 장면에 인물의 정신과 혼을 넘치지도 그렇다고 모자라지도 않게 담았다는 데 있다. 사건을 끈질기게 추적하고 그 사건의 원인에 주목하고 결과를 밀도있게 구성하는 기자 정신이 놀라울 정도로 발현된 저작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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