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렛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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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녀 이야기

"이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눈썹도 있구나, 생각했지."

장난스럽게 내뱉은 한 마디. 이 한 마디에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린 그녀의 심장. 그 남자의 지나가는 말로 인해 파멸에까지 이른, 철저하게 고독하고 외로웠던 한 여자...

그녀는 그렇게나 힘들었나 보다.

어린시절 오토바이를 타고 떠난 아버지. 그녀와 그녀의 어미를 구박했던 할머니와 조기를 구워주고 들락거리기를 반복했던 어머니. 그리고 갑작스레 그녀를 떠나버린 단짝 동무 단애까지.

제멋대로 그녀를 버렸던 사람들 때문에 그녀는 그토록 그 남자와 발 맞추길 원했나 보다.

그 남자의 한 마디에서 그녀는 무엇을 찾고자 했을까? 자신과 함께하고 싶어하는 사람의 숨소리. 다가오길 원하는 그의 욕망. 마음을 함께하고 싶다는 간절한 심정. 거절만 당했던 자신에게도 누군가 손을 내미는 줄 알고 그만 있지도 않은 손을 덥석 잡았다.

결국 그녀는 허공에서 밑바닥으로 사정없이 곤두박질 쳐버리고..

그렇게 쉽게 마음을 줄 만큼 그렇게 약했나. 사람의 마음은 함부로 장난하거나 쉽게 내주고 접어서는 안 되는 것...

2. 어머니의 편지

다 크지도 않은 너를 혼자 두고 가서 이렇게 병만 들어 돌아왔다. 그 사람이 살아 있고 내가 건강할 때는 그들의 가족이더니 병이 드니 이렇게 남이구나. 누구를 탓하겠느냐. 첫째로는 어떻게 해서든지 홀로 서보려고 노력하지 못했던 내 탓이고 둘째도 호적 정리를 제대로 안 해놓은 내 탓이다. 병들어 빈손으로 내쫓겨 올 줄이야 어찌 생각했겠느냐. 무엇이라 따져보고도 싶지만 이젠 몸이 말을 듣질 않아.... 이 어미를 안락사시켜다오... 너에게밖에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없는 이 어미를 용서해다오...

3. 나의 중얼거림

방은 좁지만 아늑하다. 방은 아늑하나 마음은 썰렁하고 스산하다. 어느 쪽을 향해 울음을 터뜨려야 될지 몰라 나는 모든 곳에서 비굴한 표정이다. 함부로 울 수도 웃을 수도, 쉽게 분노하거나 화를 낼 수도 없는 나는, 그래서 삶이 힘겹다. 비빌 언덕을 찾아 방황하지만 결국 내 편은 어느 곳에도 없음을 직감한다. 늘 불안한 들개처럼 온 마을을 쏘다니니, 육신은 항상 피곤한 채다. 어느 곳을 가도 환영받지 못하는 들개는, 털도 까슬하고 눈빛도 예사롭지 않은 들개는 어느덧 귀여운 강아지의 모습을 버리고 늑대와 같은 야성만 남았다. 힘겨운 나날들 속에 개의 품위와 자존심을 모두 버린 들개는 오직 살아남아야만 한다는 악몽에 사로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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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하 진 지음, 김연수 옮김 / 시공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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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의 기다림. 이것은 쿵린과 만나가 결혼하기 위해 인내했던 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위가 남편 쿵린을 기다렸던 시간이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요즘 들어 부쩍 드는 생각이다. 예전에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문제. 그러나 하면 할수록 더욱 어려운 난제... 과연 사랑은 실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은 1~2년 여우비 같은 일시적인 감정을 사랑이라 착각하는 것일까.


사랑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 명쾌하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영원하지는 않다는 것. 만나와 둥마이의 사랑이 그랬고 17년 간 서로를 애타게 기다렸던 만나와 쿵린의 사랑도 그랬다. 하루라도 빨리 결혼하자며 징징거렸던 둥마이는 결국 만나를 배신했고 오직 만나를 통해서만 피가 끓었던 쿵린도 서서히 자신의 감정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내가 진정 그녀를 사랑하는 것일까...’ 17년, 17년을 기다렸던 쿵린과 만나의 결혼. 그러나 쿵린은 소소한 집안일을 비롯해 만나와 쌍둥이 아기들의 뒤치다꺼리가 힘겹기만 하다. 그의 결혼 생활에 행복은 없었다.


인간의 마음이란 이렇게 변덕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일까. 사람은 누구나 고독한 존재로 태어난다. 그래서 한평생을 함께 할 사람을 찾기 위해 아낌없이 젊은 날을 바친다. 그러나 결코 너도, 나도 영원할 수는 없다니... 지금은 마음을 한 주머니 속에 넣고 있지만 그것이 언제든지, 나도 모르는 새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불안감. 그로 인해 무방비 상태에서 상처를 받고 허우적거릴 수 있다는 공포감에 마음 한 켠이 시리다. 하지만 마음이 돌아섰다고 해서 고소를 할 수도 없고 처벌을 할 수도 없으니... 버림받은 영혼은 그저 앉아서 그 상처를 고스란히 받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다.


사랑이 변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일상생활의 권태감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쿵린은 아내 수위의 촌스러운 모습에 애정을 쏟지 못한다. 수위는 시어른 병수발 들랴, 농사일 하랴, 집안일과 아이까지 도저히 꾸밀래야 꾸밀 시간도 없다. 전족으로 오그라붙은 발도 쿵린은 끔찍하기만 하다. 그래서 그는 도시 사람에게 소개해도 빠지지 않을 만나만이 자신의 사랑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집안일을 거들고, 만나를 돌봐주는 일들 속에서 쿵린은 허우적거리게 됐으니.. 그는 과연 어떤 결혼생활을 꿈꿨던 걸일까. 사랑이라는 것은, 결혼이라는 것은 결국 지난한 일상들이 모여져 만들어 지는 것임을 그는 미처 알지 못했나 보다. 그 지루함과 권태감을 참아내내는 것도 사랑의 일부분임을... 그렇다면 실제 결혼생활에서 나는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쿵린은 결국 수위와 딸 화와 함께 보내는, 아무렇지도 않은 명절 식탁에서 비로소 평안함과 따뜻함을 느끼게 된다. 만나가 린과 결혼하기 위해 17년을 기다렸다면 수위도 이런 날을 위해 17년을 기다렸다. 만나의 기다림과 수위의 기다림. 이 두 기다림은 어떤 차이가 있었기에 한 쪽은 비극으로. 다른 한 쪽은 희극으로 끝나는 것일까. 본처라는, 결혼이라는 형식? 아니면 수동적이었던 수위의 태도? 작가 진쉐페이는 결국 쿵린을 통해 온화하고 조용하며 모든 것을 수용하는 수위를 선택했다. 여성의 심리를 세세하게 묘사해 나로 하여금 찬사를 보내게 했던 작가도 결국은 이기적인 남성에 지나지 않았던 걸일까. 수위의 용서와 포용을 통해 화해 아닌 화해를 도출해 내다니...

“저는 너무 행복해요, 여보. 이렇게 집에 오셨잖아요.”                                

라는 수위의 감격어린 한 마디. 수위의 말에 쿵린은

“아, 나는 얼마나 멍청한 인간인가... 여보, 날 기다려줄 수 있겠소? 곧 당신에게 돌아오리다. 우린 한 가족이잖소. 날 버리지마.”

라고 울며 이야기한다. 사랑을 얻기 위해서 여성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이런 희생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인지. 사랑의 대가라고 하기엔 너무 지나치다. 17년 간의 외로움 끝에 얻은 수위의 행복. 과연 이것을 행복이라 할 수 있을까. 여성인 ‘나’는 남성들의 이런 이기심을 넉넉히 포용할 수 있을지. 당신은 이런 사랑을 감당할 자신이 있습니까. 조용히 나에게 되물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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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지음, 히스테리아 옮김 / 황금가지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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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갈리아의 딸들’이라는 소설 속에서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이갈리아에서는 남성이 여성의 역할을, 여성이 남성의 역할을 맡는다. 여성은 큰 키와 넓은 어깨, 그리고 강한 근육을 가지고 있다. 반면 남성은 풍부한 지방질 몸매를 가져야 인기가 높다. 심지어 피임약도 남성이 먹으니 작가는 완벽하게 남녀가 뒤바뀐 세상을 상상하는데 성공했다.


소설 속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은 “문명의 목적은 자연의 불평등을 해소하는데 있다”라는 말이다. 이 말은 나에게 큰 혼란을 가져다 주었다. 그렇다면 남성이 지배하는 현 시대는, 여성성이 우월했던 세상의 불평등을 해소한 결과인가? 아니면 세계는 앞으로 남성의 강한 근육과 이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불합리함을 극복해 나가야 할 숙제를 안고 있는 것일까. 결국 이갈리아라는 세상은 우리의 과거였을까, 아니면 다가올 미래일까..


하지만 그것이 과거인지 미래인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점은 누가 누구를 극복하든 그것은 결국 한 성이 다른 성을 억압하게 되는 반문명(나는 이것을 반문명이라고 정의했다)의 상황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은 모두 똑같이 ‘사람’이라는 종에 속한다. 그렇지만 두 성은 성 차이로 인해 전혀 다른 종에 속하는 것처럼 분화됐다. 그리고 그 차이는 억압으로 연결된다. 며느리만 봐도 그렇다. 결혼과 동시에 여성은 며느리로, 종으로 전락하고 결혼을 꿈꾸는 모든 한국 여성은 며느리라는 희생을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 그래야 결혼이 성립하고 생활이 유지된다. 지금은 조선시대보다 훨씬 상황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한국사회에서는 여성은 여전히 남성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대우를 ‘인내’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가 세다느니, 성격이 모나다느니 온갖 인신공격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문명의 목적이 진정 불평등을 해소하는데 있다면 인간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이제 이 억압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지금처럼 여성이 억압받고 있는 상황도, 이갈리아처럼 남성이 해방되지 못한 상황도 모두 불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자신의 성에 의해 차별받고 종속되지 않을 권리가 있다. 남과 여가 아닌 그저 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람으로 태어나 한 세상을 자유롭게 살다가 죽는 것. 그것이 진정한 문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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벵가지 김 2009-03-04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잊혀진 첫사랑에게 보라고 준 책이지만 제가 읽은 것은 한참 후 10년이 넘어서야 읽었습니다. 이 책 저자의 성차별은 계급차별보다 더 가혹하고 성차별의 해소가 우선이라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으며 지금처럼 자원소비중심의 사회는 되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는데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다만 작가가 생각하는 여성중심(모계사회)의 사회에서도 폭력적인 사고나 행동들(물리적이던 정신적이던) 변하질 않을 것이라는 데는 동의합니다. 궁극적으로 타자화(차별)은 폭력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계급이든 성별이든 차별받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 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남성으로써 이책대로 세상이 이루어진다면 정말 끔찍 할 것이라 생각했고 지금 여성들이 느끼는 감정 그대로일 것이라 생각하니 불쌍하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옥이 2009-03-05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여성으로서 저는 끔찍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ㅋㅋ 피곤하고 힘들어서 때로는 그저 모르는 체 넘어가면 더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도 어느 세상이든 그것이 모계사회이든 부계사회이든 불합리한 일든은 어디든 존재하기에, 그 불합리함들이 단숨에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기에, 저는 변화의 노력을 계속 하려고 합니다. 뭐 후세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겠다는 그런 거창한 뜻이 아닙니다. 그저 지나치려하지만 자꾸 신경에 거슬리기 때문에, 저 스스로 그것들을 참고 넘어가지 못하기에 그렇습니다. 현 사회의 폭력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인간이라고 할 수 없기에, 그리고 저는 살아있는 인간이기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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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 자본의 감추어진 진실 혹은 거짓 청소년 철학창고 8
칼 마르크스 지음, 손철성 엮음 / 풀빛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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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은 노동자들이 생산한 생산물보다 더 적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래야 잉여가치가 생기고 이윤이 발생한다는 이야기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하자면 이렇다. 만약 노동자가 100원어치 일을 해 100원의 생산물을 만들었다고 가정하자. 만일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100원의 임금을 지불한다면 자본가는 100원을 주고 100원어치의 생산품을 얻을 뿐이다. 이래서는 잉여가치를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자본가는 100원의 월급을 주면서 노동자에게 110원어치의 노동을 시킨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속성상 노동을 착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과연 그런가 하는 의문이 든다. 사실 자본가가 100원의 상품을 얻고 100원 월급을 주면 이익은 없다. 하지만 자본가는 100원어치 상품을 소비자들에게 110원에 판매함으로써 수익을 얻는다. 그렇다면 굳이 노동 착취를 하지 않아도 이윤을 얻을 수 있지 않은가? 또다른 의문은 과연 노동의 가치를 어떻게 액수로 환산하느냐 하는 문제다. 혼자서 상품의 전 과정을 도맡지 않는 이상 자신의 노동이 구체적으로 몇 원의 상품을 생산했는지 알 수 있느냐 말이다. 가죽에 구멍을 뚜는 일을 하는 사람, 포장을 담당하는 사람의 하루 생산액은 얼마인가. 공장제 노동인 ‘매뉴팩처’가 등장하면서 한 사람의 노동 가치는 값을 매기기 어렵게 됐다. 바로 이 점이 노동자들을 속일 수 있는 허점인가? 한편 요즘에는 공장 근로자들보다 사무직 근로자들의 수가 더 많다. 사무직 근로자들의 생산액은 얼마이며 더욱이 지식 산업에 있어서 노동의 가치는 얼마로 환산할 수 있는가. 또한 요즘에는 시간 외 초과수당 제도가 있어 노동시간을 늘리면 임금도 늘어나게 된다. 마르크스의 관점으로 이 부분은 또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이런 의구심들을 해결하지 못하면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더 이상 우리 시대에 적용할 수 없다.


두 번째 궁금증은 소비력에 관한 점이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본가는 경쟁력 있는 상품을 만들기 위해 더 싼 제품을 생산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더욱더 임금을 낮추고 노동 시간을 늘린다. 그렇다면 소비자들의 구매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아무리 제품을 많이 생산하더라도 구매할 소비자가 없다면 자본가는 이익을 얻을 수가 없다. 마르크스는 책에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다음의 노동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공급만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임금이란 노동력을 이어나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공급이다. 이들은 자기 계발을 한다거나 여가를 즐기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죽지 않을 정도로 먹고 자는 이들은 자본가의 상품을 구매할 수 없다. 그렇다면 자본가의 이익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마지막은 자본주의 모순에 대한 대안책이다. 마르크스도 나의 두 번째 의문에 어느 정도 공감한 듯하다. 그는 생산성 향상, 구매력 약화로 인해 결국은 과잉 생산이 이루어져 공황 상태가 발생한다고 예측했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모순이라고 마르크스는 지적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책이 나오지 않아 답답하다. 마르크스는 이런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하고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내세웠다. 그가 말한 사회주의란 무엇인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자본주의의 폐해를 수정할 수 있는 그의 대책은 과연 무엇일까. 그의 견해와는 별개로 나는 어떤 대안을 내놓을 수 있으며, 과연 자본주의란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지 아리송하다.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적’이라는 말은 매우 부정적인 의미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이나 권리 따위는 깡그리 무시하는 자본의, 자본가의 냉혹한 속성을 의미한다. 과연 자본주의는 마르크스가 말한 대로 자본만을 좇는 어리석음에 불과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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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정영하 옮김 / 산수야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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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는 현실적인 사람이다. 그는 ‘善’이라는 가면을 쓴 채 서로를 기만하는 우리들의 위선을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특히 군주론에서 그는 군주가 실질적으로 권력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사실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군주는 자비나 관용과 같은 덕목과 함께 잔인함을 겸비해야 한다. 필요한 경우에는 상대방을 잔인하게 짓밟아야 하며 배신도 서슴지 않아야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나는 그런 군주를 모셔야 하는 국민으로서, 한 줄 한 줄에 모두 저항감이 인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말은 선거 때마다 국민의 일꾼이 되겠다며 유권자들을 기만하는 현 정치인들의 말보다 훨씬 설득력 있다.


그는 ‘인간이 어떻게 사는가’라는 사실과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당위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또한 당위만을 고집하는 군주는 결국 파멸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군주를 야수에 비유했다. 특히 군주는 야수 중에서도 여우의 영리함과 사자의 힘을 모두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우의 머리가 없이는 함정을 알지 못하며 사자의 힘이 없이는 늑대를 잡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정치 세계의 지저분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런 마키아벨리도 군주에게 가장 필요한 것으로 ‘민심’을 꼽았다. 그도 백성의 만족은 군주에게 있어서 절대적이라고 주장한다. 국민은 억압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며 지배자가 자신들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언제든지 지배자를 갈아치우려고 한다.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고 군대를 구성할 백성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은 세습 군주제, 절대 군주제에서도 두려운 것이었다. 따라서 군주는 시민들이 상업, 농업 그리고 기타 업무에서 각각 안심하고 맡은 바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보살펴야 한다. 또한 과중한 세금이 무서워 상행위를 꺼리는 일이 없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심지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배신과 살육과 거짓을 일삼는다 하더라도, 백성에게는 성실하고 신의가 두텁고 언행이 일치하고 인정이 많고 신실한 사람인 것처럼 보여야 한다고 충고한다.


군주에게 민심이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전쟁을 일으키고 동맹국 군주를 죽이는 그 순간에도 백성들에게는 인자한 웃음을 보여야 하는 것이 군주다. 그리고 이 명제는 마키아벨리 시대에만 적용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정확하게 적용된다. 지금은 시대가 변해 국민들이 혼란스러웠던 마키아벨리 시대의 이상적인 군주, 즉 강력한 군주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군주든 민심을 얻어야 하는 것은 영원불변의 진리다.


그렇다면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민심은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우리는 과연 어떤 군주를 원하고 있는가. 경제 성장, 원칙 정립, 선진국 진입 등 유력 후보들은 갖가지 공약과 구호로 민심을 구하고 있다. 그러나 끊임없이 쏟아지는 의혹과 정치공방들, 그리고 자신들의 잇속을 위한 이합집산 때문에 어느 한 후보도 민심을 얻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후보들만의 문제일까.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 어떤 군주를 원하는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의 후보들을 비판하기만 했지 그렇다면 어떤 후보가 출마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한 바가 없다. 국민들이 스스로 어떤 군주를 원하는지 이상을 제시해야 후보들이 이에 맞춰 민심 잡기에 열을 올릴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민심의 실체가 없다. 우리는 과연 어떤 군주를 원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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