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은 언제나 조금씩 아팠다.

이 놈이 아프다가 괜찮아질 즈음에는,

이미 다른 녀석이 아파하곤 했다.

그렇게 우리의 병고는 나날이 깊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병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대개 멀쩡한 낯으로 만나곤 했지만, 그건 가면에 불과했다.

그 가면을 살짝만 들춰보면 괴물의 얼굴이 드러났다.

물론 괴물은 제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가끔, 아주 가끔 제 모습의 일부만을 슬며시 흘릴 뿐.

괴물의 모습은 때로 공포스러웠지만, 대개는 애처로웠다.


상처. 딱지. 잠복. 전염.


도대체 이곳에서의 삶은 왜 이다지도 팍팍한 걸까.

우리는 가끔 만나 그 팍팍함을 위무했다.

한 잔 술과 휘청대는 어깨동무 속에서.

술잔에서 찰랑찰랑 넘치는 술처럼, 우리는 위태위태했다.

스물 여덟이라는 나이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잠깐.

그 나이는 스물과 서른의 차이를 눈치 채는 나이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나이인 것이다.

물론, 아직도 희뿌옇긴 마찬가지지만.

맥주병 밑바닥의 유리처럼, 우리의 젊음은 희뿌옇게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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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 얼굴, 당신 얼굴이 어떤지 당신은 보지 못하니까, 그게 얼마나 추하게 일그러져 있는지 보지 못하니까. 그 눈···· 그 입술, 그 이빨에서 뚝뚝 흘러넘치는 증오가 얼마나 당신을 남처럼 만드는지, 당신은 모르니까.

                                                                                          - 한강, <내 여자의 열매> 중에서

 

저 문장이 참 섬뜩하게 느껴진다.

그 섬뜩함은 나를 객관화시켜 바라보는 데서 오는 것이다.

그랬다. 내 얼굴 역시도 저 문장 속 ‘당신’처럼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리고 증오의 냄새를 물씬 풍기며 증오의 시선을 한없이 던지고 있었다.

알 수 있었다.

거울을 보지 않고도, 그 사람의 표정 속에서 그걸 읽을 수 있었다.

그 사람의 눈동자에 한 마리 짐승이 어려 있었다.

괴물의 모습을 한 짐승이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침을 질질 흘리며 으르렁대고 있었다.

그녀에게 그런 모습을 한 나는 얼마나 낯설었을까?

그 낯선 짐승 앞에서 그녀의 가슴 한구석이 덜컥 무너져 내렸으리라.



사람은 평생 제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거울 속으로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은 착각과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입체로서의 온전한 자기 모습이 아니다. 평면에 불과한 것이다.

거울을 여러 개 갖다놓고 이리저리 들여다봐도, 옆면 혹은 뒷면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 전체를 우린 볼 수 없다.

자신의 맨얼굴은 우리의 눈길로부터 멀찍이 벗어나 있다.



때때로 착각과 허상의 조각들을 이리저리 끼어 맞춰, 간신히 자신에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아주 간신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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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국회에서 민주주의는 멱살 잡혔다.
우리당의 임종석 의원은 오열을 토했다.
그의 울부짖음을 바라보던 나 역시 피가 끓었다.
이 상황이 가슴 저미게 싫었고, 끔찍했다.
그의 울음은 계산적인 울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힘 앞에서 약하게 쓰러져가는 것들의 울음이었다.
그의 울음은 낡고 늙은 것들 앞에서 힘없이 무너져가는 것들의 울음이었다.
그의 울음은 폭력 앞에서 주저앉는 울음이었으며, 그 폭력을 넘어서기 위해 몸부림치는 울음이었다. 
울음이 눈물로 비어져나왔다. 이 땅의 민주주의가 흘리는 눈물이었다.

우리당 의원들은 국민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그 무릎을 바라보며, 그들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일으켜 세워 주고 싶었다.
할 만큼 했다고, 이젠 좀 쉬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비록 그들을 전적으로 지지하진 않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그들이 그 싸움터에서 나 대신 싸우고 있지 않은가.

슬프고 씁쓸하고 허탈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회, 대화와 논쟁을 허락하지 않는 사회에서
힘은 말을 통제하고 대화를 찍어 누르고 논쟁을 일거에 퇴한다.
말 잘하던 유시민은 목 언저리에 파스를 붙인 듯했다.
지난 새벽의 충돌이 남긴 흔적이었을까.
잠깐 비친 그의 모습에서 피곤과 분노와 허탈을 읽었다.
그의 어깨를 도닥여주고 싶었다.
그 싸움을 지켜보던 나도 한없이 피곤해졌다.
그리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이 싸움은, 노무현을 지지하는 이들과 그를 지지하지 않는 이들의 싸움이 아니다. 분명코 그렇다.
이 싸움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이들과 그것을 짓밟으려는 이들 사이의 싸움이다.
그 싸움에서, 우리 잠깐 기우뚱했다.
의사당 단상 위의 태극기처럼 우리 잠시 옆으로 기울어졌다.
옆으로 기울며 짓밟혔고, 짓밟히며 눈물 흘렸다.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이들의 울음 앞에서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낡고 거대한 벽 앞에서 그가 울고 그들이 울고 나도 울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에서 한없는 막막함과 끝모를 초라함이 나를 옥죄었다.
그 막막함과 초라함을 딛고 의연하게 일어서기 위해
광화문으로 향하려 한다.

촛불 하나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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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접경,

그 접경의 맞물림과 엉킴은,

나를 끌어당기고 매혹시킨다.

특히나, 그 접경이 ‘나’와 내 ‘밖’의 것들 사이의

스밈과 얽힘에 해당되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들은,


 

 도시의 경사, 도시의 고도, 도시의 굴곡은 그대로 근육이 되어 육체 속에 새겨진다.

                                                                                                   김영하, <포스트 잇> 중에서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길들은 몸 속으로 흘러 들어온다. 강물이 생사가 명멸하는 시간 속을 흐르면서 낡은 시간의 흔적을 물 위에 남기지 않듯이, 자전거를 저어갈 때 ... 지방도·우마차로·소로·임도·등산로 들은 몸 속으로 흘러 들어오고 몸 밖으로 흘러나간다. 흘러오고 흘러가는 길 위에서 몸은 한없이 열리고, 열린 몸이 다시 몸을 이끌고 나아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몸은 낡은 시간의 몸이 아니고 생사가 명멸하는 현재의 몸이다. 이끄는 몸과 이끌리는 몸이 현재의 몸 속에서 합쳐지면서 자전거는 앞으로 나아가고, 가려는 몸과 가지 못하는 몸이 화해하는 저녁 무렵의 산속 오르막길 위에서 자전거는 멈춘다. ...

                                                                                     김훈, <자전거 여행> 프롤로그 중에서

 

 시간은 현실을 기억 속에 실어 나른다. ... 시간에 의해, 내 몸 바깥 현실의 물질성은 내 뇌 안에서 관념으로 해체되어 갈무리된다. 그러나 그 기억이라는 관념은 현실을 얼마나 일그러뜨리는지 것인지...

                                                                                            고종석, <엘리아의 제야> 중에서


 풍경은 밖에 있고, 상처는 내속에서 살아간다. 상처를 통해서 풍경으로 건너갈 때, 이 세계는 내 상처 속에서 재편성되면서 새롭게 태어나는데, 그때 새로워진 풍경은 상처의 현존을 가열하게 확인시킨다. 그러므로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이다.

                                                                                           김훈, <풍경과 상처> 서문 중에서



나를 그 접경 언저리로 불러낸다.

김영하에서 김훈을 거쳐 고종석에 이르고, 다시 김훈으로 이어지는 이 문장들은,

내 밖의 것들이 나의 육체로, 나의 정신으로, 나의 심연으로

서서히 육박해 들어와, 그것들 속에 점점이 박히는 과정에 따라 배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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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국립현대미술관에 갔다. 역시,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다소 늦게 갔던 터라 전시 작품의 1/5도 채 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말이다.

TV 속에서만 보던, 백남준의 ‘다다익선’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현대판 다보탑이 보여주는 산만함이란, 좋게 얘기하자면 ‘한국적 역동성’이라 할 것이다. 수십 개의 브라운관에는 온갖 ‘한국적 이미지들’이 요동치고 있었다. 물론, 미술관 역시 한국의 여느 관광지와 다르지 않게 수많은 가족 나들이객들로 어수선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곳은 분명 인공 낙원이었다. 온갖 색과 형태와 구조들이 나름의 질서를 머금은 채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는 인공 낙원.

 

그 인공 낙원 옆에는 실낙원이 자리한다. 인공화된 자연의 실낙원이. 그곳의 이름은, ‘동물원’이다. 지난주에 친구 녀석과 함께 그 실낙원에 갔었다. 오랜만에 찾아간 그곳에는, 여전히 뼈에 사무치는 무력감만이 짙게 깔려 있었다. 예전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자연의 활력은 찾아볼 길 없고, 온갖 형태의 광기와 유폐와 너저분함이 우릴 맞이하고 있는 실낙원.


도대체 무엇 때문에 동물원이라는 공간이 존재해야 하는 걸까? 그 안에 갇힌 동물들은 일종의 ‘협박용’일까? 너희도 저들처럼 유폐되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가만히, 겸손히, 만족하며 살라는. 그곳은 유폐된 자들의 광기만이 아니라, 유폐시킨 자들의 광기로 가득 차 있었다. 또한 그곳은 우리까지도 그 광기의 공범자로 만든다. 이구아나 우리에는 조그마한 흰생쥐가 식사용인지, 관람용인지 위태롭게 던져져 있었다. 생쥐는 위태롭게 이구아들을 비끼며 출구를 찾고 있었다. 물론 어디에도 출구는 없다. 원숭이들은 낡은 정신 병동을 꼭 빼닮은 우리 속에서 우리를 향해 멀거니 눈빛을 던지거나 무언가를 강박적으로 반복하고 있었다. 


인공 낙원과 자연의 실낙원은, ‘미술관 옆 동물원’이란 영화 제목처럼 이웃하고 있다. 미술관과 동물원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물리적 거리도 그렇거니와(미술관에서 몇 분만 걸어가면 동물원이니!), 우리의 삶의 모습도 그러할 것이다(낙원인 듯하지만, 그 이면에 또는 옆면에 실낙원‘들’을 감추고 있으니!). 실낙원이 없어지지 않는 이상, 실낙원을 없애려고 하지 않는 이상, 실낙원을 낱낱이 들춰내지 않는 이상, 인공 낙원은 그저 ‘인공’적인 낙원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미술관은 풍요롭지만, 허전했다. 그리고 우리 삶도 여전히 그렇다. 평온한 일상은 끔찍한 지옥의 가면에 불과하다.

 

 

문득, 소설 한 구절이 떠오른다. 아마 다음과 같았던 듯한데.

"왜 멀리 가도 달라지는 게 없을까, 세상이란."   

                                                                    -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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