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국립현대미술관에 갔다. 역시,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다소 늦게 갔던 터라 전시 작품의 1/5도 채 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말이다.

TV 속에서만 보던, 백남준의 ‘다다익선’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현대판 다보탑이 보여주는 산만함이란, 좋게 얘기하자면 ‘한국적 역동성’이라 할 것이다. 수십 개의 브라운관에는 온갖 ‘한국적 이미지들’이 요동치고 있었다. 물론, 미술관 역시 한국의 여느 관광지와 다르지 않게 수많은 가족 나들이객들로 어수선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곳은 분명 인공 낙원이었다. 온갖 색과 형태와 구조들이 나름의 질서를 머금은 채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는 인공 낙원.

 

그 인공 낙원 옆에는 실낙원이 자리한다. 인공화된 자연의 실낙원이. 그곳의 이름은, ‘동물원’이다. 지난주에 친구 녀석과 함께 그 실낙원에 갔었다. 오랜만에 찾아간 그곳에는, 여전히 뼈에 사무치는 무력감만이 짙게 깔려 있었다. 예전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자연의 활력은 찾아볼 길 없고, 온갖 형태의 광기와 유폐와 너저분함이 우릴 맞이하고 있는 실낙원.


도대체 무엇 때문에 동물원이라는 공간이 존재해야 하는 걸까? 그 안에 갇힌 동물들은 일종의 ‘협박용’일까? 너희도 저들처럼 유폐되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가만히, 겸손히, 만족하며 살라는. 그곳은 유폐된 자들의 광기만이 아니라, 유폐시킨 자들의 광기로 가득 차 있었다. 또한 그곳은 우리까지도 그 광기의 공범자로 만든다. 이구아나 우리에는 조그마한 흰생쥐가 식사용인지, 관람용인지 위태롭게 던져져 있었다. 생쥐는 위태롭게 이구아들을 비끼며 출구를 찾고 있었다. 물론 어디에도 출구는 없다. 원숭이들은 낡은 정신 병동을 꼭 빼닮은 우리 속에서 우리를 향해 멀거니 눈빛을 던지거나 무언가를 강박적으로 반복하고 있었다. 


인공 낙원과 자연의 실낙원은, ‘미술관 옆 동물원’이란 영화 제목처럼 이웃하고 있다. 미술관과 동물원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물리적 거리도 그렇거니와(미술관에서 몇 분만 걸어가면 동물원이니!), 우리의 삶의 모습도 그러할 것이다(낙원인 듯하지만, 그 이면에 또는 옆면에 실낙원‘들’을 감추고 있으니!). 실낙원이 없어지지 않는 이상, 실낙원을 없애려고 하지 않는 이상, 실낙원을 낱낱이 들춰내지 않는 이상, 인공 낙원은 그저 ‘인공’적인 낙원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미술관은 풍요롭지만, 허전했다. 그리고 우리 삶도 여전히 그렇다. 평온한 일상은 끔찍한 지옥의 가면에 불과하다.

 

 

문득, 소설 한 구절이 떠오른다. 아마 다음과 같았던 듯한데.

"왜 멀리 가도 달라지는 게 없을까, 세상이란."   

                                                                    -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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