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문부식, 삼인)를 다시 들췄다. 얼핏 그 속의 저 문장들이 나의 것인 양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착각이다. 그 착각은 5월의 원죄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문부식)는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주범이다. 그가 죽음을 각오하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그 5월의 광주가 어김없이 또 돌아왔다. 망월동에 아름다운 묘지가 들어섰고, 피해자 보상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광주는 역사에 제 이름을 남겨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고, 조국은 여전히 또 다른 누군가를 학살하려 한다. 25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우리는 광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내 나이 스물여덟. 96학번에 불과한 내가, 5월의 광주를 원죄처럼 느낀다는 건 어딘가 이상하다. 아마도, 그건 내가 뿌리부터 전라도 사람이란 증거이리라. 전라도 사람은, 결코 5월을 잊지 못한다. 죽어도 잊지 못한다. 내가 거기 없었다 해도, 내가 경험하지 못했다 해도, 그건 중요하지 않다. 한이 서린 상처는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스민다. 시간을 거슬러 스미고, 스며서 곪아 썩는다. 언제나 그렇다. 내 피에도 얼마간 그 한이 서려 있다. 나를 키운 건, 오 할은 그 피다. 피의 바람이다.  

 

80년, 저 홀로 섬처럼 고립된 광주에서, 사람들은 대동 세상을 이뤘다. 수많은 무기가 넘실거렸지만, 아무런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장의 아주머니들은 밥을 해 날랐고, 여공들은 도청에서 밥을 해 먹였다. 거리와 도청에 모인 사람들에게. 청년들은 무기를 들었다. 오로지 제 형제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우리 어머님 말씀에 따르면, 내 어릴 적에도(90년 즈음) 데모가 있는 날이면 광주 대인 시장 사람들은 김밥을 해 날랐다고 한다. 그 때도 그들은 대동 세상의 기억을, 그 꿈 같은 기억을 잊지 않고 간직했던 것일까. 촛불 집회는 대동 세상의 또 다른 꿈을 보여 주었다. 칼빈 소총 대신 우리 손에 들려진 촛불은, 광주라는 역사의 척후병을 향해 흔들렸다. 그 척후병의 숭고한 희생으로, 역사는 여기까지 진군할 수 있었다. 조국이 그저 침묵하고 있을 때, 그들은 그 대동 세상에서 뜨겁게 조국을 기다렸다. 하지만, 조국은 끝내 침묵했다. 침묵은 그 어떤 무기보다 차갑게 끔찍했다. 광주에 고립된 그들은, 제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아이처럼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지니게 되었다. 그 상처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다.  

 

한은 보복을 원하지 않는다. 보복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건 없다. 한은 달래줘야 한다. 그건 돈의 문제도, 보상의 문제도 아니다. 그건 진실의 문제다. 거대한 악이 행해질 때, 그 악에 오로지 침묵하기만 했던 광주 밖의 사람들이 달래줘야 한다. 광주에 대한 사과를 얘기하고 있는 게 아니다. 광주에 더 이상 무슨 사과를 한단 말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그대로인, 당신의 침묵을 깨는 것, 오직 그것이 광주를 기억하고 광주를 기념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홀로 버려진 그 모든 것들 앞에서 숙연해하고 분노하는 것만이, 광주를 살리는 길이다. 오직 그것만이 아픈 광주를 치료하는 길이다. 이라크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홀로 버려진 것들이 모욕당하고 있다. 

 

 

  “‘우,리, 승,리,할, 수, 있,을,까?’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때 가슴이 먹먹해지고 까닭 모를 슬픔이 밀려와 앞에 선 동지를 와락 끌어 안았다. 이제, 그때 하,지, 못,했,던, 대,답,을, 1,4,년,이, 지,난, 뒤, 세번째 감옥에서, 한,다. ‘이,기,든, 지,든, 괜,찮,아!’라,고. 바,위,를, 만,나,면, 돌,고, 둔,덕,을, 만,나,면, 넘,으,면,서, 끝,끝,내, 거,대,한, 바,다,에, 이,르,는, 물,의, 운,동,을, 깨,달,은, 뒤,의, 대,답,이,었,다.”(285)

 

 

예전에, 저 글을 옮겨다 적어놓은 적이 있다. ‘이기든 지든 괜찮아’. 저 한 마디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내 가슴을 때린다. 우린 항상 이기는 것에만, 오로지 그것에만 관심을 둔다. 나 역시, 매일, ‘당신’들을 이기려고 안간힘쓴다. 당신보다 더 유식하기 위해서, 당신보다 더 능력 있기 위해서, 당신보다 더 좋은 차를 갖기 위해서, 당신보다 더 넓은 평수의 집에서 살기 위해서 아득바득 싸우고 또 싸운다. 당신들을 이기고 돌아온 날이면, 난 어김없이 앓고 만다. 겉으론 득의만만한 내 표정엔 어딘가 그늘이 져 있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나날이 그렇게 나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진다. 나의 영혼은 살을 내린다. 영혼의 뿌리가 휘청거릴 정도로 살을 내린다. 나날의 싸움에서 당신을, 세상을 이긴 만큼, 난 조금씩 변해간다. 변해가며 썩어간다. 지식을 쌓으며, 관계를 쌓으며, 돈을 쌓으며 썩어간다. 쌓아두기만 하면 그저 썩을 뿐인데도, 오로지 쌓는다. 쌓는 것은 썩는 것이다. 그러다, 무언가가 툭 떨어져 버린 느낌이다. 그게 무얼까. '당신'도 그런 적이 있는가? '당신'도 그렇게 살고 있는가? '당신'도 나처럼 그렇게 가끔 아픈가? 그게 무얼까.

 

매일 매일의 싸움에서 지는 걸 생각해 본다. 그 싸움에서 정말 질 수 있을까. 가끔은, 너무 지쳐 날 놓아버리고 싶은 날에는 언뜻 지기를 바라기도 하지만, 난 기어코 이기려고 애쓴다. 질 수 있기를, 가끔씩은 지기도 하고, 또 가끔씩은 선뜻 지기 위해 넘어지기도 하기를. 그 싸움의 복판에서, 한없이 지고 말없이 작아질 수 있기를. 바란다. ‘전투에서는 지고, 싸움에서는 이기는’ 역설의 진리와 함께 뒹굴고 싶다. 작아지면서 안으로, 제 안으로 커지고 깊어지고 싶다. 그렇게 웅숭깊어질 수만 있다면.

 

광주를 기억하는 것, 전라도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 상처받은 존재로 남는다는 것은 분명 지는 싸움을 끊임없이 감행하는 것이다. 비록 지고 또 지지만, 바다를 그리는, 바다로 향하는, 바다에 이르는, 바다를 이루는 그 과정을 제 삶으로 오롯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광주를 기억하는 이들이여, 나날의 싸움에서 우리 지기로 하자. 아, 광주여, 삶이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진실은... 당신은, 현실에 대해서, 현실의 진실성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오늘은 그 얘기를 할까 한다.

나와 당신이, 우리가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저 끔찍한 살육에 대해 침묵했다면, 적어도 그 점에 관해서는, 나와 당신이, 우리가 비인간적이었음을 결코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비인간성이 나와 당신의, 오로지 우리의, 우리만의 탓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나와 당신의, 우리의 무감각과 무신경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런 비난을 나는, 거침없이 얻어들어야 한다. 당신도 마찬가지. 하지만, 더불어 나와 당신에게, 우리에게 주어진 조각난 진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조각난 진실은 우리를 무지의 벼랑으로 이끌었고, 무능의 늪에 빠뜨렸다. 우리에게 주어진 진실은, 온전한 진실이 아니었다. 진실의 일부였으며, 누군가의, 오로지 누군가의 진실에 불과했다. 뒤틀린 진실의 한 조각이 나와 당신의, 우리의 눈을 사정없이 찔렀고, 우리를 눈멀게 했다. 하여, 나와 당신은, 우리는 진실의 전체를 보지 못했고, 볼 수 없었다. 나와 당신의, 우리의 눈엔 여전히 사금파리가 박혀있다.


우리는 미디어라는 창을 통해 세상을 경험한다. 미디어가 던져 주는 정보, 생각, 감정, 경험, 욕망은 도처에 널려 있다. 그 미디어 너머의 세상에 대해 나와 당신은,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전혀 모른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모르고 있다. 또한,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런 나와 당신에게, 우리에게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오로지 TV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TV 속에 존재하는 것만이 온전한 세상이라고 여기고 있지 않는지? 그러니, 미디어가 보여주지 않는 다른 세상이 있음을, 그것들 뒤에서 엄연히 다른 세상이 꿈틀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다른 세상을 보기 위해, 그 세상을 알기 위해, 그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미디어 안으로, 미디어 사이로, 미디어 너머로 기어들어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미디가 전해주는 반쪽짜리 세상밖에는 모르고, 반쪽짜리 삶밖에는 못 살 것이다.


도대체 나와 당신이, 우리가 이 세계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의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나와 당신은, 우리는 진실의 한 자락이라도 움켜쥐고 있는가? 우리는 단지 조각난 현실을, 가공된 현실을 경험할 뿐, 아닌가?


이 전쟁에 대한 당신의 생각 역시도 그러할 것이다. 이 전쟁이 시작되던 1년 전쯤으로 돌아가 보자. 신문과 방송은 연일 대량살상무기와 테러 지원 가능성을 얘기했다. 또한, 사담 후세인 정권의 폭압성과, 이라크 민중의 인권에 대해서도. 미국의 언론과 미국인들은, 저들은 오로지 그것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전쟁을 벌이는 양 미친 듯이 떠들었다. 당연히, 이집트에서 벌어질 끔찍한 살육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침묵했다. 그리고 전쟁 개시 1년이 지난 지금에도, 많은 이들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대량살상무기는 어디에도 없고, 그것을 찾겠다는 명분을 내건 이 전쟁에서, 오히려 개 같은, 정말 개 같은 대량 살상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라크 민중의 인권은, 후세인 시절만큼 퇴보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얼마 전 공개된 이라크 포로들의 학대 장면을 담은 사진들은 끔찍했다. 문득, 백민석의 <목화밭 엽기전>이 떠올랐다. 엽기적인 학대와 동물적인 광기가 그 사진 속에서 넘실거렸다. 저기가 바로,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목화밭이었던 것이다. 


대체, 나와 당신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단 말인가. 왜, 아직도, 여전히, 철저하게, 침묵하고 있는가? 나와 당신은, 우리는 왜? 여전히? 


이것은 전쟁인가? 아니, 나는 전쟁이라고 보지 않는다. 이것은 명백한 침략이고, 침공이다. 명백한 학살이고, 살육이다. 헌데, 미국의 언론과 미국인들은, 저들은 ‘이라크와의 전쟁’(혹은 ‘이라크 전쟁’)이라고 떠들었고 떠들어댄다. 그 규정 속에서, 그 명명 속에서, 이라크는 세계 최강의 미국과 전쟁을 벌이는 어떤 국가가 된다. 정말, 이라크‘와의’ 전쟁이란 말인가? 정말, 와의? 그렇게 말하면, 이 전쟁은, 한순간에, 지극히 쌍방적인 것으로 되어버린다. 하지만, 이 전쟁은, 나와 당신이, 우리가 아는 것처럼, 처음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일방적이었다. 그것은, 이라크‘와의’ 전쟁이 아니라, 이라크(혹은 이라크의 민중)‘에 대한’ 미국의 일방적인 공격이었고 학살이었다. 그게 미디어가 정해준, 이 전쟁의 알량한 이름, ‘이라크와의 전쟁’이라는 그 이름보다는, 훨씬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혹은, 미국인의 진실이 아니라, 이라크와 이라크  민중들의, 그들의 진실을 조금이나마 담고 있을 것이다. 명명은 이렇듯 중요하다. 우리가 ‘이라크와의 전쟁’이라고 쉽게 말하는 그 순간, 이라크에서는 엄청난 학살이 자행되고 있다. 이건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카타르의 위성 방송인 알자지라만이, 그나마 그 전쟁에서 이라크 민중이 고통 받는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거의 유일한 것 같다. 미국 정부는 당연히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잇다. 미국무부 대변인이라는 녀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알자지라는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부정확하고 거짓되고 잘못된 보도"를 하고 있고, "우리(미군)가 대형폭탄을 사용하지 않은 장소에서 사용했다고 보도하는가 하면, 공격하지도 않은 모스크(이슬람사원)를 공격했다고 하고, 사람을 죽이지 않은 장소에서 죽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들은 진실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카타르 정부에 알자지라 방송에 대한 통제를 공식적으로 요구했다고 한다.(프레시안 4월 28일자)


우리는 오로지 미국 언론과 미국인들의, 저들의 시각에서 이라크를, 중동을,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가? 우리의 시각이 아닌, 저들의 시각에서. 또한, 그들의 시각이 아닌 저들의, 오로지 저들만의 시각에서. 저들의 세상이 아니라, 그들의 세상을, 더불어 우리들의 세상을 이야기해야 한다. 또한, 저들의 세상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세상을 우리의 세상에 잇대어, 그 세상에서 우리와 그들이 함께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세상이 아닌, 저들의 세상에서, 우리는 햄버거를 먹고, 유가와 세계 경제를 논하고, 헐리우드 영화를 보면서, 이라크와 같은 현실은 잊은 채 환상만을 꾸역꾸역 삼키며, 살고 있진 않는지? 우리가 발 디딘 이곳은, 저들의 세상인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이 글의 다소 복잡한 인칭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우리들 : 한국. 그들 : 미국. 저들 : 이라크. -> 우리들 : 패권국의 눈치만 살피는 중진국 나부랭이들. 그들 : 제1세계에 속하며, 자신들만이 오로지 정의를 점유하고 있다는 맹신에 빠져, 세계를 쥐락펴락 하는 것들. 저들 : ‘그들’의 발밑에서 이리 차이고 저리 밟히는, 자국의 생사여탈권을 언제라도 강탈당할 수 있는 약소국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우리는...

나와 당신은, 우리는 TV 앞에서 무사하다. TV 속 세상은 전투기가 날고 총알이 빗발치듯 쏟아지는데, 나와 당신은, 우리는 오늘도 변함없이 무사하다. 그리고 멀쩡한 낯빛을 하고, TV 속 세상을, 이라크의 먼지 바람을, 팔루자의 화염을 멀거니 바라본다.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죽음을 맞을 때, 나와 당신은, 우리는 소파에 몸을 파묻고 TV 속 팔루자를 관람한다. 맙소사, 세상에 자신이 원해서 택한 죽음이 어디 있겠는가. 하물며 자살까지도, 죽음을 향한 욕망에서가 아니라 고통 없는 삶에 대한 절박함에서 비롯되었을진대.


나와 당신은, 우리는 오늘도 어제처럼 하릴없이 살아간다. TV 속 세상에서 전쟁이 벌어지건, 사람이 죽어나가건 상관할 바 없다는 듯이. 나와 당신은, 우리는 점심엔 뭘 먹을까를 고민하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버스 유리창에 고단한 어깨를 기댄 채 퇴근한다. 그리곤 멍하니 TV 앞에 앉는다. 오늘도 이라크는 한바탕 시끄러웠군, 하며 소란스런 세상에 약간의 냉소를 보낼 수도 있고, 오늘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유 없이 죽었나 보군, 하며 약간의 연민을, 제 양심이 조금이나마 건재하고 있음을 스스로에게 확인시켜 주기라도 하듯이, 슬쩍 던질 수도 있다. 나와 당신은, 우리는 그런 황량한 살풍경 앞에서 으레 그러려니 할 뿐이다, 언제나처럼. TV 속 세상은 끔찍해도 TV 밖 나와 당신의, 우리의 일상은 꿈쩍 않는다. TV를 끈 나와 당신이, 우리가 잠깐, 아주 잠깐, 아까 본 이라크 어린이의 눈물을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리 오래 생각하진 않는다. 생각해도 딱히 답이 나올 것 같지도 않은데다, 머나먼 이라크 땅의 비극이 나에게 닥칠 것 같지도 않고, 괜히 감상에 젖는 자신의 나약함이 징그럽기에. 그새 나와 당신은, 우리는 이라크에 대한 생각을 슬그머니 접은 채, 피곤했던 하루 일과를 잠시 돌아보고, 내일 해야 일과 만날 사람들을 대강 점검한 뒤 잠자리에 든다. 내일을 살아야 하기에.


우리에겐 우리의 내일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삶엔, 그들의 내일이 들어설 자리가 하나도 없다. 나와 당신에게, 우리에게 그들은 없다. 그들은 그저, 그들일 뿐이다. 그들은 결코 나와 당신이, 우리가, 우리의 일부가 될 수 없다. 나와 당신은, 우리는 그저 TV 밖에서, 앞에서, 위에서, 아래서 그들을 지켜볼 따름이다. 그들만이 TV 속 세상에서 울부짖고, 피 흘리며, 사지가 찢길 뿐이다. 그들은 우리의 일부가 될 수 없고, 또한 되어서도 안 된다. 그래야만, TV 밖 세상과 TV 속 세상이 뚜렷하게 나누어질 수 있고, 그럼으로써 나와 당신이, 우리가 그 밖에서, 그들과 다르게 무사히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것이라 나와 당신은, 우리는 철석같이 믿고 있다. 우리는 TV 속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그들은 TV 밖으로 나오지도 못한다.


그들은 TV 속에서 겨우 존재할 뿐이다. 과거의 한 자락으로만. TV 속 그들의 삶은 현재가 아니다. 그들의 모습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조각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들의 삶이 현재가 되길, 나와 당신은, 우리는 결코 원하지 않는다. 그것이 현재형이라면, 우리의 삶이 굉장히 불편해질 것이기에, 우리의 여유가 대단히 침해받을 것이기에, 우리의 머리가 몹시도 무거워질 것이기에, 우리의 안전이 상당히 위협받을 것이기에, 우리의 미래가 끔찍이 흔들릴 것이기에, 우리의 영혼이 뿌리째, 저 밑바박에서 흔들릴 것이기에. 만약에, 만의 하나라도, 그렇게 되는 날이 온다면, 나는, 그들을 연민해야 하고, 그들을 치료해야 하며, 그들을 도와줘야 하고, 그들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과거로만 남아 있어야 한다. 이제 다 지나가 버린 일에 불과한 것으로, 그래서 나와 당신이, 우리가 지금까지 늘 그래온 것처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신나게 구경만 해도, 안심하고 넘어갈 수 있게끔. 그들은 영원히 과거형으로만 존재한다.


과연, 이런 나와 당신, 우리란 존재는 무엇인가? 진정, 나와 당신이, 우리가 사람이라 할 수 있는가?


나와 당신이, 우리가 그들의 삶에 대해서, 그들의 현재에 대해서, 그들의 미래에 대해서, 단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던가? 만약 있다면, 적어도 전쟁 반대 집회에 한번이라도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당신은,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니, 위의 물음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진정, 나와 당신이, 우리가 사람이라 할 수 있을지, 나는 대답하기 어렵다. 당신은 어떤가? 나와 당신은, 우리는 오로지 제 삶에 바빴고, 늘 그렇듯이 제 아픔만을 과장했다. 온몸이 가시넝쿨에 찔려 철철 피를 흘리며 사지를 떨고 있어도, 그것은 오직 그들만의 고통일 뿐이었다. 나와 당신은, 우리는 오로지 제 새끼손가락에 박힌 가시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것만이 나와 당신에겐, 우리에겐 그나마, 끔찍해 하는 현실이었다. 그러니, 나와 당신은, 우리는 사람이었던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와 전공조(전국공무원노동조합)의 민노당 지지와 관련해서, 선거 기간 동안 언론은 이 사건을 연일 시끄럽게 보도했다. 오늘 뉴스를 보니, 전국공무원노조 위원장과 사무총장이 구속됐다고 한다. 사건의 핵심은 공무원의 선거법 위반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다. 시대가 변했는데, 법은 여전히 시대의 등 뒤에서 헐떡대고만 있다. 시대를 따라올 생각은 않은 채. 지난 16대 총선에서 시민단체의 낙선, 낙천 운동이 일정 부분 제한받은 것도 변화된 시대에 눈감은 법 때문이었다. 얼마 전 촛불집회도 그랬다.

엄격한 실정법의 적용과 시대 변화에 따른 관용, 우리의 시각은 이 둘 사이에서 흔들린다. 실정법을 엄격히 적용한다면, 분명 이 사건은 처벌 대상이다. 국가공무원법 제65조 2항은 “공무원은 선거에 있어서 특정정당 또는 특정인의 지지나 반대를 하기 위하여 다음의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못 박고 있다. 또한, 교원의노동조합설립및운영등에관한법률 제3조는 “교원의 노동조합은 일체의 정치활동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런 법률에 근거해, 공무원과 교원의 정치적 행위는 엄격히 규제된다.


이런 법률들의 기본 취지는 무엇인가? 정치권의 외압으로부터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런 취지는 상위법인 헌법을 통해서도 분명히 확인된다. 헌법 제7조 2항은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고 적시하고 있다. 즉, 공무원의 신분을 보장하고 정치적 중립성을 보호하여 공무원의 직무 행위가 외부의 부당한 압력에 간섭받지 않도록 한 것이다. 정치적 외압에 의해서, 공무원이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바꾸거나 선거에 직간접으로 동원될 수 있는 위험성을 막는 게 이 법의 근본 취지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이 법률들은 공무원의 정치적 행위를 일체 금지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외부의 압력에 의해 공무원이 직무상의 권한을 남용해서 정치 활동을 하거나 선거에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나 필요했을 법들이, 지금에 와서 공무원의 정치적 의사 표현 자체를 원천적으로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법들이 잘 적용되기나 했던가. 온갖 관권 선거에서 수많은 공무원들이 직간접으로 동원되었던 게 우리의 과거다. 정작 권위주의 시대에는 제대로 적용되지도 못한 법률이, 탈권위주의 시대에 ‘축자적으로’ 해석되어 현실을 재단하는 모습은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규정해놓은 법률들은 크게 두 가지의 기능과 측면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첫 번째 기능/측면은 공무원이 직무상의 지위와 권한을 이용해서 선거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공정한 선거를 치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두 번째 기능/측면은 정치적 외압에 맞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첫 번째 기능이 공무원의 선거 개입을 막는 ‘규제적’ 성격을 갖고 있다면, 두 번째 조항은 공무원의 정치적 입장을 권력으로부터 지켜주는 ‘보호적’ 성격을 갖고 있다. 이번 사건은 공무원들이 자발적 의지에서 정치적 의사를 피력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두 번째 기능에 의해 뒷받침될 수 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첫 번째 기능/측면이다. 공무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표명한 것이 과연 공무원이 직무를 이용해 선거에 개입한 것이냐, 하는 문제. 정치적 입장 표현은 분명코 직무상의 지위와 권한을 이용한 선거 개입이 아니다. 그 둘의 경계는 분명하다. 물론, 정치적 의사 표명이 직무상의 선거 개입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 때문에 정치적인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게 억압적이다. 그 둘의 경계가 흐려지는 경우에는 엄격히 처벌하면 된다. 공무원도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공개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정치적 신념은 신념대로 표현하고, 자신의 직무는 직무대로 수행하면 된다. 상식은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헌법에 보장된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아무런 정치적 입장을 취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공무원의 직무를 중립적으로 수행하라는 뜻일 것이다.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검찰의 엄격한 선거법 적용이 형평성에 어긋났다는 지적이 있다. 민노당은 지난 선거 기간에 한나라당 비례대표 후보인 이군현 교총회장과 김영숙 교장은 비례대표후보로 확정된 뒤에야 사표를 냈다고 주장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국가공무원법 제65조 1항 "공무원은 정당 기타 정치단체의 결성에 관여하거나 이에 가입할 수 없다."라는 조항에 따라 처벌되어야 한다. 공무원 신분을 그대로 유지한 채 정당에 가입한 것은 엄연한 실정법 위반이다. 이들은 지금 당선자 신분이 되었다. 검찰이 엄격하고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고자 한다면, 한나라당에도 엄격한 법의 잣대를 갖다대야 한다.

 

물론, 이게 핵심은 아니다. 한나라당을 꼭 걸고 넘어가야겠단 물귀신 심정도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엄격한 법 적용이 아니라, 자유로운 정치 행위의 보장이다. 사람을 위해 법이 있는 것이지, 법을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법률들이 만들어질 당시의 취지를 염두에 둔다면, 그리고 변화된 시대 상황을 감안한다면, 전교조와 전공조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얼토당토 않다. 지금 그들은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오로지 법대로’가 아니라 자유로운 정치적 활동의 적극적 보장이다. 정치적 활동을 자유롭게 보장하고, 공무원이 편파적으로 선거 업무에 개입하는 경우는 그 경우대로 처벌하자. 그러면 된다. 공무원이 자신의 직위와 권한을 이용해서 불법적으로 선거에 개입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원치 않는다. 시대가 변하고 있다. ‘공무원이니까, 정치적 행위는 절대 해선 안 된다’는 닫힌 생각에서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면서 동시에 공무원의 직위상의 중립성을 지키면 된다’는 열린 생각으로 시대의 눈길이 옮겨가고 있다. 공무원이 노동자이고 교사도 노동자이듯이,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하지만, 일부 신문들은 그들이 노동자가 아니라고 부득부득 우겼을 때처럼, 그들이 정치적 의사를 표현해선 안 된다고 부득부득 우기고 있다. 참 딱할 노릇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대화가 진행될수록 오해의 벽이 높아질 때가 있다. 사람들은 대개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이야기할 때는, 자신들이 이미 갖고 있는 관념의 구도, 선입관의 구도에 따라 상대를 이리저리 재단하고 여기저기 끼워 맞춘다.


친구 녀석이 조선일보와 한겨레의 차이를 묻길래 몇 마디 해줬더니, “건전하건 건전하지 않건 조선일보는 그 나름의 보수신문이다. 한계레는 진보적인 신문이고. 이러한 구도를 유지하는 게 아주 바람직한 듯하다고 생각”한다나. 그리고 한 마디 더, “그런데 너무 한쪽을 몰아붙이는 듯한 요즘 젊은 사람들의 태도가 좀 맘에 안”든다나. 아마 나를 두고 한 얘기일 것이다.


지극히 간단한 문제가, 간단히 설득될 수 없는 사회. 그게 바로 한국 사회다. 그 간단한 문제가 대단히 복잡하게 논의될 수밖에 없고, 그런 복잡한 논의를 통해서도 이토록 쉽사리 납득될 수 없게끔 뿌리 깊은 편견과 선입관이 만연돼 있는 것이다.


다음 글은 그 친구를 설득하기 위해 쓴 글이다. 문장만 약간 바꿔 옮겨놓는다. 다시 읽어보니, 요령부득의 말들이다. 차분하게 쓴 글이 아니라 그럴 것이다. 생각나는 대로 마구 지껄였다. 어떻게 해서든, 설득하고 말리라는 생각 하나로. 지금 보니, 좀더 차분하게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아직도 갈 길이 많이 먼 듯하다. 




내가 보수신문 '자체'를 부정하려는 걸까? 극단적 좌파(극좌)를 제외하면, 그 어떤 정치집단도 보수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도대체 상식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개혁/진보만이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보수와 개혁, 우익(翼)과 좌익(翼)은 새의 좌우 날개처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건강하게 돌아갈 수 있다. 이런 원론적인 문제 자체를 건드린다면, 논쟁 자체가 성립할 수 없겠지. 난 이 문제를 건드린 게 아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난 보수의 존재를 인정하고, 건강한 보수가 더 많아지길 바란다. 그리고 보수신문도 마찬가지. 문제는 보수의 질과 수준이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우리 사회에 진정한 보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는 별도의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이 얘기는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하기로 하고, 간단히 정리하자면(꼭 이렇게 간단히 정리하면, 오해가 발생하곤 하는데.. 어쩔 수 없이 간단히 정리하자.), 요는 조선일보가 건강한 보수, 건전한 우파/우익이 아니란 사실이다. 그럼 뭔가? 극우(‘극단적’ 우익)다. 왜 그런가?


그들은 사회의 전통 가치와 기존 신념을 양심과 소신에 기초해서 지켜내려는 보수 세력이 아니다. 그들은 전쟁을 부추기고, 북한을 고립시키려 하고, 재벌과 대기업을 편파적으로 옹호하며(: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재벌과 대기업을 옹호할 수 있다. 이게 보수의 한 가치라면, 그런 보수를 부정하진 않겠다. 문제는 그것이 상식에 기초하는 옹호여야 하는데, 그들의 태도는 대개 상식과 동떨어져 있다. 뿐만 아니라, 언론의 윤리와도. 그들은 대체로 ‘일방’적으로 편파적이다. 아마도 그들 수입의 많은 부분이 광고에 의존하고 있고, 그 광고를 재벌과 대기업이 채워주고 있기에 그럴 것이다. 이게 왜 중요한가? 그들이 일개 사설 단체나 단순 이익 집단이 아니라, 언론사이기 때문이다.), 지역감정과 지역주의를 선동해왔다.


조선일보와 한겨레, 니 말대로 양쪽이 다 극단에 위치해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한겨레는 극좌가 아니지만. 완전히 왼쪽으로 치우친 신문은 아니란 말이다. 그럼 조선일보는? 두 말하면 잔소리. 극우! 어쨌든, 문제는 극단이라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극단을 얼마나 양심과 소신에 입각해 지속해내느냐가 아닐까? 한겨레가 아무리 진보적 진영의 목소리를 강조하고 싶어한다 해도, 조선일보처럼 유치한 짓거리는 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 유치한 짓거리들의 실상은 이따가 하나하나 짚어보자.


신문 기사를 놓고 구체적으로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1년 6개월 전부터 지금까지 난 조선일보를 구독하고 있다. 여러 사정이 있어서 조선일보를 구독하고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이 신문을 좀더 꼼꼼하게 연구하기 위해서다. 이 신문이 우리 한국정치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지. 그것은 물론 대단히 부정적인 위치다. 상식과 양심이 짓밟히고, 기본이 무시되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자. 지난 3월 16일자 조선일보에는 촛불집회와 관련된 짤막한 기사 하나가 있었다. 그 기사의 제목은 대강 이랬던 것 같다. “촛불시위 참가자 1/10로 줄어.” 이 기사가 가리키는 내용은 3월 15일 월요일 집회 참가자가 대폭 감소했다는 점이다. 물론 사실일 것이다. 문제는 그 기사가 1/10로만 줄었다는 그 ‘사실’만 얘기함으로써, 촛불시위에 대한 국민적 열의와 참여도가 갑자기 사그라든 것처럼 은근히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월요일 집회는, 반전 평화 촛불집회나 미선.효순 촛불시위 때도 그런 양상을 보였다고 한다. 즉, 주말에는 많은 직장인들, 일반인들이 참여하므로 집회가 굉장히 큰 규모로 진행되지만, 월요일과 같은 평일 집회에는 집회 참가자의 인원이 급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후 사정을 설명하지 않고, 단지 ‘1/10’로 줄었다는 사실만을 보도하는 것, 조선일보의 전형적인 보도 태도다. 자신들이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싶거나 가치를 폄하하고 싶은 사안에 대해서는, ‘오로지 사실’만 얘기할 것. 자신들이 의도적으로 확대하거나 가치를 부여하고 싶은 사안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온갖 전문가와 여러 단체를 적극 인용해’ 보도할 것. 어쨌든, 이런 기사를 본 일반 시민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아, 촛불 시위가 이젠 좀 잠잠해지려나 보군. 탄핵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가 많이 사그라들었군.’ 이게 조선일보가 원하는 바다. 내가 한겨레 신문을 그다지 잘 읽지 않기에, 단정 지어서 얘기할 순 없겠지만, 한겨레는 이런 짓은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 세계 어느 신문-물론 타블로이드판이나 황색신문을 제외하고. 그래도 양식이 있고 정도를 지키는-도 이런 식의 편파적, 정치적, 의도적 왜곡/수정/가감/첨삭을 저지르진 않을 것이다. 물론, 미국의 언론들이 이라크 전쟁에서 보여주었던 선동적 보도 행태는 제외하자. 그들은 그때 다들 미쳐 있었으니. 


조선일보의 이런 보도 태도를 얘기하면, 정말 밤새 할 수 있을 정도다. 왜? 그들은 매일 이런 일을 저지른다. 헌데 사람들은 왜 문제의식을 갖지 않을까? 아까, 그 기사를 다시 보자. 어디에도 ‘눈에 띄는’ ‘의도적 왜곡’은 보이지 않는다. 말 그대로, ‘사실대로’ 보도했다. ‘1/10’이라는 엄연한 사실. 솔직히 이 1/10도 확인해보고 싶은 심정이지만, 이런 쪼잔한 행위가 노무현 1/10 발언과 관련해서 그들이 이리저리 헤집어 비아냥대던 그들의 태도와 닮은 듯해, 애써 참는다. 하지만, 그런 사실 보도 자체가 일정한 가치(왜 사람들이 그렇게 줄었는지에 대한 정보 없이, 사람들이 이젠 촛불집회에 무관심해졌다는 판단을 유도하는)를 포함하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이게 바로 기술이다. 조선일보는 바보가 아니다. 거기에 있는 기자들 역시 그렇다. 저런 잔머리에 매일매일 속고 있는 게 조선일보의 독자들이다. 250만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250만이 매일 주위 사람들에게, 노무현 어쩌고, 미국 어쩌고, 촛불시위 어쩌고, 정치 어쩌고, 북한 어쩌고, 김대중 어쩌고, 전라도 어쩌고, 하면서 조선일보가 던져준 말들을 뇌까린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앞서 그 기사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했는가?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지난 20일 집회에는 광화문에 20만, 전국적으로 수십만의 사람들이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가장 큰 규모였다. 집회의 규모는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계속 커져만 가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 신문들의 힘. 조선, 중앙, 동아가 각각 200만부 이상씩 발행한다는 걸 감안하면, 세 신문사 모두를 합하면 800만부 정도는 될 것이다. 대단한 힘이다. 헌데, 사람들은 이 부수 자체만 놓고, 이 신문들이 그래도 우리 사회에서 아직 대단한 공신력을 갖고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곤 한다.


하지만, 많은 부수를 가진 신문이라고 해서, 그것의 공신력과 언론의 공평성을 담보하고 있다고 보긴 힘들다. 내가 알기론 세계적으로 유수한 어떤 신문도 이처럼 많은 발행부수를 기록하고 있진 못하다. 르몽드만 해도 40만부 정도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워싱턴 포스트나 뉴욕타임스 역시 100만부 안팎의 발행 부수를 갖고 있다. 그 나라들과 우리나라의 인구 비율로만 따져도, 우리의 발행부수는 해도 너무한 것 같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 자체를 놓고 국민의 선택, 그 언론들의 공신력 운운하기에 앞서, 이런 잘못된 시장질서, 경쟁체제의 문제를 깊이 있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다른 얘기 하나 해보자.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만큼 자국의 영화 점유율이 높은 나라는 없다. 그 이유가 뭘까? 다른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스크린 쿼터제’다. 다들 동의할 것이다. 만약 이게 없었다면, 우리 영화가 이만큼의 폭발적 인기를 누리긴 힘들었을 것이다. 즉, 시장에서 최소한의 유통망을 확보하는 것, 이게 관건이다. 소비자에게 선택될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 보장은, 자본주의에서 매우 중요한 판매/선택 조건이다. 우리가 독립영화나 작가주의 영화를 쉽사리 볼 수 없는 것은, 우리 자신의 문제라기보다는 그것을 볼 수 있는 상영관이나 환경 자체가 조성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 있다. 다시, 신문의 문제로 돌아가서. 신문의 구독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게 뭘까? 국민의 시각? 국민의 선택? 국민의 이념적 성향? 신문의 질? 할 말을 하는 신문을 알아채는 국민의 안목? NO! NO! NO!


그럼 무엇일까? 바로 신문 유통망이다. 신문을 배급하는 배급소의 전국적 분포, 이게 관건이다. 그런데, 한겨레를 비롯한 소수 신문들은 이런 전국적 유통망을 확보, 유지할 수 없다. 절대로 불가능하다. 동네 구멍가게 E마트와 같은 유통 체인을 전국에 확보한다? 참, 웃기는 얘기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언론에 대한 국민의 다양한 접근과 소수 언론의 균형 있는 육성을 위해, 공동 유통망과 관련된 정책, 즉 ‘공동보급제’를 시행하려 하지만, 누군가가 정부의 발목을 꽉 잡고 있다. 누가? 뻔하지, 조중동이다. 어떤 이유를 내세웠을까? 시장주의다. 시장에 내버려 두란다. 물론, 원론적으로 시장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대원칙이다. 헌데, 시장주의가 중요하다 해도,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야 하는가? 그건 아니지 않는가. 공공재(전파, 전기, 수도, 도로 등등)의 경우는 일정 부분, 혹은 전부분 정부가 개입할 수밖에 없는 영역이다. 사회의 여론과 가치를 주도하고 이끄는 언론의 경우도 당연히 시장에만 맡겨둘 수는 없을 것이다. 왜? 자칫하면, 언론의 이름으로 자사의 이익과 입장(만)을 대변할 수 있으니까. 누구처럼? 조중동처럼. 근데, 이게 한겨레처럼 마이너라면 별 문제가 없을 텐데, 메이저, 그것도 전세계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메이저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참고로, 문화일보의 기사(2003년 4월 18일) 하나. “신문 공동 배달시스템은 낯선 시도가 아니라 선진국인 일본과 독일, 프랑스, 스웨덴, 노르웨이 등지에서 이미 정착된 제도다. 특히 프랑스의 공동배달제는 이미 10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1898년에 설립된 메사주리 아세트(Messageries Hachett)는 1차대 전 당시 이미 프랑스와 식민지 알제리에 8만여개의 판매소를 갖고 거의 모든 신문을 독점, 공급했다” 조중동이 계속 부수를 늘려갈 수 있는 건, 그 신문의 월등히 우월한 질 때문이 아니라, 단지 막대한 자본력과그로 인한 엄청난 공급력, 그리고 그 공급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보급망 때문이다.


조중동과 관련해서는, 할 얘기가 너무도 많다. 지역감정, 반김대중 정서, 친일의 업적, 독재자의 찬양(이승만, 전두환, 박정희 등등), 안보상업주의(그들은 우리의 안보를 자기들 신문을 팔아먹는 데 써먹는다. 이 대목에서는 정말 욕이 안 나올 수 없다. 에이, 우라질 놈들!!), 미국에 대한 일방적 편향, 족벌 경영(소유와 편집의 분리, 편집의 엄격한 독립과 간섭 차단), 광고의 엄청난 지면 점유율(그 신문들을 보라. 온통 광고다. 뉴욕타임즈나 르몽드를 직접 보지 못했지만, 내 예상으론 세계 어떤 정론지도 이렇게 광고를 많이 싣지는 않을 것이다. 이건 아무리 뜯어봐도 신문이 아니다. 광고지다, 정말, 진짜.), 광고와 기사의 기묘한 상호 보완 관계(이 문제는 정말 보기 민망할 정도다. 조선일보 1주일치만 있으면, 이 내용과 관련해서는 누구라도 그 자리에서 설득시킬 수 있다. 조선일보는 참 웃기는 짓들을 하곤 하는데, 이게 그 대표적인 경우다. 이 문제는 내가 이 신문을 애독하면서, 보기 민망하긴 하지만 기어코 찾아내서 확인하는 부분인데.. 내용인즉슨, 특정 제품이나 특정 회사의 광고-특히, 전면 광고나 비중이 큰 광고의 경우-가 실리면, 그 광고 옆에 혹은 앞에, 또는 뒤에 그 제품, 회사와 관련된 기사를 어김없이 올려준다는 것이다. 이 낯 뜨거운 짓거리를 그들은 대놓고 한다. 물론 꼼꼼하게 확인하지 않으면 놓치기 일쑤다. 이런 일이 조선일보에서만 벌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뭐냐? 이렇게 할 수도 있다. 신문업도 장사 아닌가. 할 수 있는데, 이렇게 하는 신문이라면 대놓고 ‘정론지’ 운운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할 말을 하는' '정론지'가 아니라 '이해 관계에 따라 말하는' '상업지'다. 그게 핵심이다.), 한나라당과의 밀월 관계(특정 언론이 특정 정당/정파를 지지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언론이 그러면 쓰겄냐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인정한다. 근데 중요한 건 뭘까? 특정 정당을 지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개적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언론의 상식을 지키는가 하는 문제다. 만약 특정 정당/정파를 지지한다면 그런 사실을 밝히고, 정당하게 지지하면 된다. 그리고 지지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철저하게 중립적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면 된다. 그러면 되는 것이다. 근데 얘들(조중동)은 어떤가? 진보적 매체에서 그런 얘기-까놓고 누구 지지하는지 밝히자-를 꺼내면, 그건 언론사가 해선 안 될 천하의 파렴치한 행위라고 매도한다. 그리곤 그들이 그런 일을 서슴없이 저지른다. 겉으론 그렇게-언론사가 공개적으로 어떤 정치인, 정당을 지지해선 안 될 일이지- 말하고, 실질은 그들이 편파적으로 누군가를 지지하는 것이다. 지난 대선 때 그랬고, 총선 때 그랬다. 이회창에 대한 그 낯뜨거운 구애와 한나라당에 대한 그 낯뜨거운 지원 사격들. 조선일보와 한나라당의 밀월 관계를 증명하는 사례 한 가지 더. 일례로, 지금 한나라당의 대표인 최병렬. 아까처럼, 네이버에서 이 양반을 쳐보자. 다음과 같이 나온다. “1959년 한국일보사 기자로 있다가 1963년 조선일보로 옮겨, 1974년 정치부장이 되었으며, 1979년 사회부장·편집부국장을 거쳐 1980년 편집국장이 되었다. 1983년 조선일보 이사로” 있었다. 지금 한나라당의 대변인으로 있는 전여옥 역시 조선일보의 기자는 아니었지만, 최근까지 “한 시민의 입장에서”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조선일보에서 칼럼니스트로서 명성(?)을 날렸다.), 따옴표 보도(인용 부호인 따옴표를 사용해, 출처가 불분명한 제보자의 언급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배치함으로써, 언론의 공정성에 심각한 결점을 드러낸다. 물론 제보자의 신상은 공개되지 않다. 제보자 보호 차원이라나. 그런 기사라면, 기자 아니라 동네 꼬마라도 자기가 얘기하고 싶은 대로, 가령 그 문제와 관련된 모씨가 이렇게 얘기했다더라는 식으로, 마음대로 사실을 왜곡할 수 있을 것이다.), 언론의 권력화(언론사 세무 조사가 한창 진행될 즈음, 그들은 IPI(국제언론인협회)라는 단체가 우리 정부에 보낸 문서를 제시하면서 정부의 언론 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한국의 언론 상황이 “언론인들이 폭력의 위협에 처해지지는 않지만 논란이 있는 주제가 있을 경우 언론인과 언론기관에 특정한 견해와 시각을 채택하라는 압력이 상당히 가해진다”고. 또한, “한국에 언론자유가 존재한다는 한국 정부의 주장은 현실과 동떨어진 경우가 많다"며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과 '위협으로부터 자유'라는 언론인의 권리가 방해받고 있다”고. 이 단체에 대해서 좀 짚고 넘어가자. 길게 설명하지 않게 않겠다. 네이버에서 조선일보 방사훈 사장을 쳐보자. 그럼 다음과 같은 약력이 뜰 것이다. “1983년 IPI 한국위원회 이사, 1993-1999년 IPI 한국위원회 위원장, 1994년 IPI 이사, 1995년 IPI 부회장.” 실상은 이렇다. 헌데 조선일보는 한국 정부의 언론관을 비판할 때, IPI가 발표한 내용을 가감 없이 인용한다. 자기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국제적으로 공신력 있는 단체의 입장인 것처럼. 정말 웃기는 짓인데, 이런 일이 한국의 신문지상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식으로, 정치 권력에 버금가는 권력을 틀어쥐고 자신들의 편익을 위해 여론 몰이에 앞장섰다. 여기서 끝내고 싶지만, 아쉬워서 하나만 더.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쓴 글 중 일부다. “조선일보의 방일영 고문(전 조선일보 회장)을 흔히 ‘밤의 대통령’이라 부른다. 이 말은 1992년 11월 방일영 당시 조선일보 회장의 고희연에서 사원대표인 스포츠조선 신동호가 “낮의 대통령은 그동안 여러분이 계셨지만 밤의 대통령은 오로지 회장님 한분이셨다”라고 말한 것을 조선일보 사보가 보도한 것을 <기자협회보>가 다시 보도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밤의 대통령’이란 말은 조선일보의 권력을 상징하는 표현이 되었지만, 이는 신동호의 조어가 아니다. 이 말을 만들어 낸 사람은 실은 ‘낮의 대통령’ 박정희였다.” 자신들의 수장을 공개석상에서 ‘밤의 대통령’ 운운할 정도로, 그들은 지금까지 한국 정치사에서 엄청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스스로 인정하고 있지 않는가?) 등등.


이 모든 얘기를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하나 물증을 첨부해서 다 할 순 없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해야겠구나. 왜? 조선일보는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조선일보에 대한 입장 차이는 보수와 진보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네 착각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착각이다. 그 착각의 틀을 누가 부여했냐? 바로 조선일보다. 자신들을 끊임없이, (건전한) 보수로 부득부득 우기기. 왜? 그래야만, 보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가 자신들을 지켜 줄 것이기 때문에, 또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그들은 결코, 결단코, 절대로, 정말, 진짜로, 보수가 아니다. 조선일보가 보수신문이라고? 택도 없는, 정말 기가 찬 소리다. 한국일보 정도가 보수신문이라면, 인정하겠다. 조선일보는 보수가 아니라 극우다. 극우 신문이다. 그들이 자꾸 노무현의, 열린우리당의, 촛불집회의 ‘선동' 운운하지만, 그 신문의 특기가 바로 ‘선동’이다. 항상 ‘말 없는 다수’를 내세우며, (자신을 보수라 생각하는)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이다.


그들은 상식과 양심을 벗어던졌다. 조선일보와의 싸움은, 보수와 개혁의 싸움이 아니다. 결단코 그렇다. 그 싸움의 전위에 서 있었던, 서 있는 강준만은 진보가 아니(었)다. 그 자신 열심히 이야기했지만, 그 정도 되는 사람은 (건강한) 보수라 규정할 수 있다. 진짜 보수들은, 조선일보와 무관하게, 그저 따로 있는 것이다. 헌데 많은 사람들이 조선일보를 보수라 보고, 그 논조에 동조하고들 있다. 왜? 조선일보가 자꾸 보수라 우기니까. 지가 보수라는데, 어떤 놈이 뜯어말리겠는가. 하지만, 이젠 우리가 뜯어말려야 한다. 그래야지만, 우리 사회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

 

보수와 진보는 싸울 수 있지만, 대화/논쟁할 수도 있다. 왜? 그들은 상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양심을 가지고 있고 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수와 진보는 극우, 극좌와 대화/논쟁할 수 없다. 왜? 극좌/극우는 상식과 양심을 던져버리고, 오로지 맹목적으로 돌진하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극우다. 극단적 반공주의와 인종주의(조선일보의 인종주의? 처음 들어보는 말일 것이다. 조선일보는 얼마 전까지, '팍스 몽골리카’ 운운하며 인종주의를 부추겼다.), 그리고 반민족주의(조선일보는 지금도 ‘민족주의’를 박살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이 문제는 한국정치사의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어쨌든 그들은 자신들의 친일 행적을 감추어왔고, 친일의 역사를 덮기 위해 언제나 ‘반일민족주의’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폄하하려 했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어떻게? 은밀하고 교묘하게.)는 그 신문의 얼굴이다. 물론, 대놓고 반공을 얘기하지도, 대놓고 인종주의를 얘기하지도, 대놓고 반민족주의를 얘기하지도 않는다. 그 신문은 바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신문의 잔머리는 어지간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싸움은 보수와 개혁의 싸움도, 좌파와 우파의 싸움도 아니다. 분명코 그렇다. 상식과 비상식의 싸움이다. 거듭 강조하는데, 우리 사회에는 건전한 보수가 필요하다. 난 건전한 보수를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솔직히, 나 역시도 어느 정도는 이 안에 포함될 듯하고. 건전한 보수와 진보의 적절한 조화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절실히 요구된다. 헌데, 조선일보와 같은 우익 세력들은 자신들이 보수인 양 가장하면서, 이 싸움을 보수와 개혁의 싸움으로 몰아간다. 그들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촛불시위만 하더라도, 친노와 반노의 싸움이 아니었다. 아니다. 촛불시위 참가자들 중 대다수는 노무현 지지자들이 아니다. 물론, 이것도 방송이 편파적으로 그렇게 조작했다고 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촛불집회 참가자들을 인터뷰한 방송들을 보면, 이들이 대체로 ‘노무현에 대한 지지와 무관하게’ 집회에 참가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근데, 그들의 전형적 수법은 여기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친노와 반노로 몰아가기. 친노-반노로 도배질하기.


좀 다른 얘기지만, 한 가지만 더 언급하고 이 요령부득의 글을 마무리 짓도록 하자. 지난 19일인가, 20일인가 탄핵 찬성 집회가 열렸다. TV에서 봤는데, 연단에 올라온 시민(물론, 그는 일반 시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외모는 분명 반공단체나 예비군단체 소속처럼 보였는데, 어쨌든 이건 내 추측이고..)이 한 얘기.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은 빨갱이다!! 그들은 빨갱이다!!!’ 정말 끔찍한 발언이다. 저 끈질긴 빨갱이 올가미는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 예전에는 전라도가 빨갱이였다. 헌데 지금은 광화문에 모인 그 평화로운 시민들이 빨갱이가 되었다. 누가 광화문의 사람들을 빨갱이로 보게끔 만들고 있는가? ‘반전-반미-자주-개혁-진보-촛불-상식-양심-탈권위-노조-전교조’가 한순간에 빨갱이로 둔갑하는 이 연상의 법칙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게 아니다. 바로 그 거지 같은 신문들이 온갖 편집 기술과 잔머리로 우리 머릿속에 심어놓은, 정말 거지 같은 생각이다. 우린 그 거지 같은 신문들에 둘러싸여 매일 거지 같은 생각의 부수러기들을 머리에 주워 담는다. 그리고 그들의 말들을 참 거지 같게 주워섬기고 있다. 참 거지 같은 일이다.


언제 한번 날 잡아서, 조선일보 1주일치 기사 가지고 아주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자. 내가 이런저런 얘기를 수없이 뱉어내는 것보다는 그 신문을 직접 보면서 비판하는 게 가장 설득력 있게 다가갈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길게 얘기하는 걸까? 왜냐면, 조선일보의 문제는 일개 신문사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빨갱이 운운한 사람은 좀 극단적인 경우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그 비상식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비상식이 엄존하는 이상, 우리 사회는 하나도 변하지 않을 것이기에, 이렇게 길게 주절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상식을 회복하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 촛불집회는 그 상식의 문제와 깊이 있게 관계된다. 민주주의 역시도 그 상식 위에 기반한다.


하나만 더 얘기하자. 왜 날이 갈수록 촛불 집회의 참가자가 늘어나는 걸까? 탄핵을 철회하지 않아서? 민주당과 한라당의 비이성과 몰상식이 날이 갈수록 도를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편파 방송은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 치자. 물론, 난 개인적으로 편파 방송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방송 시간 자체가 좀 길긴 했으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다고 하자. 헌데, 방송사뿐만 아니라 유수의 신문사와 리서치 기관에서 한 여론 조사를 ‘조작’ 운운하던 그들의 모습에서는, 상식을 벗어던진 야만이 어려 있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거리로 더 쏟아질 수밖에. 정치인들의 이 터무니없는 행태를 조선일보는 따옴표에 담아 여과 없이 보도했다. 그 상식밖의 얘기들을 말이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그런 꼬락서니는 정말 조선일보의 몰상식과 비이성, 비윤리를 닮은 꼬락서니였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말들을 상식을 가장해 뻔뻔하게 반복하는 것. 그들은 16대 총선에서 시민단체의 낙천, 낙선 운동을 ‘홍위병’ 운운하며 비판했고, 저명한 사회학자인 최창집(현 고려대) 교수를 김대중 정부에 대한 탄압의 일환으로 빨갱이로 몰아 마녀사냥했다. 얼마 전까지 한나랑당 공천위원이었던 소설가 이문열은 ‘홍위병’ 발언과 음모론의 전위에 있었다. 그는 얼마 전에는 촛불 집회를 노무현 숭배주의자들의 집단 광기로 비하했다. 이들은 분명코 상식 밖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난 이들의 한 줌도 안 되는 지성과 지식을 가볍게 비웃을 수 있다. 동시에, 난 이들이 두렵기도 하다. 이 상식 밖의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지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 탄핵 가결처럼. 그러므로 우리 상식에 대해서 더 많이 이야기하자. 분노를 참지 말고 표현하자. 그래야만 저들이 두려워할 것이고, 저들이 움켜쥔 세상이 조금이나마 변할 것이며, 우리 손에 함께 나눠가질 수 있을 것이다.  



니가 말한 보수와 진보의 구도는 지극히 자연스럽다. 당연히 그렇게 유지되어야 하겠지. 헌데, 건전한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는, 네 생각과는 달리, 대단히 중요하다. 그건 언론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치권에 보수 정당이 존재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하지만, 그 보수가 건전하지 않고, 비양식과 비이성에 기반하고 있다면 사회는 어떻게 되겠냐? ‘보수=비건전’의 등식은 진보 진영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보수를 가장한 극우(비이성적인 보수/수구)들이 만들어놓은 것이다. 진보 진영이 보수를 부정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들은 진보가 자꾸 보수를 싹쓸이하려 한다고 얘기하는데, 그건 그들이 지어낸 새빨간 거짓말이다. 물론, ‘진보=과격’의 등식도 그들이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말한다. 노무현이 자꾸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나누고 있다고. 그런 측면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정작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나눠 선동하는 이들은 따로 있다. 바로 조선일보다. 그러면서 그들은 말한다. 대통령의 자리는 모든 차이를 포용하는 자리라고. 터무니없는 소리! 그런 원론적 얘기는 하나마나한 소리다. A가 강도고 B가 피해자인데, 둘 모두를 포용해서 A를 무조건 용서하자. A를 터무니없이 매도할 필요는 없겠지만-가령, 그 놈은 더 이상 교화 안 될 짐승보다 못 한 놈이니 아예 사형시키자는 식으로-A는 자신이 행한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응당히 비판과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리고 나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재사회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게 순서다. 포용과 관용도 마찬가지. 그들은 친일, 독재추종, 지역감정조장, 재벌옹호 등과 관련해서 분명한 사회적 비판과 역사적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리고 나서, 포용할 수 있으면 포용하면 된다. 지금까지 숱한 불관용을 저질러온 게 누군데, 누구한테 함부로 ‘관용’과 ‘포용’을 운운하는 것인가? 정말 기가 찰 뿐이다. 덮어놓고, 다 포용하자. 그들의 논리다. 항상 뒤가 구리니까, 덮어놓고 끌어안자고 한다. 제기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