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소설은 한바탕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 농담이란, 단지 진지함의 거부가 아니라 진지하게 살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야유이며, 진지함을 가장한 논리의 폭력에 대한 빈정거림이다. 이 서늘한 농담의 공간에서 삶의 어떤 실재도 신비도 발가벗겨진다. 농담의 형식은 혼돈의 세계에서 모순된 진실을 물어야 하는 현대(근대)의 문법이다. 소설의 탈주는 소설이 자신의 존재 근거와 주류 문법에 대해 보내는 또 하나의 지독한 농담이다. 그러나 그 탈주의 꿈은 농담의 형식이 그러한 것처럼 치유될 수 없는 자기 모멸을 견뎌야 한다. 소설의 저 냄새나는 세속성은 이런 가시 돋친 역설 안에서 용서받을 수 있다. 이 책의 글들은 농담에 관한 농담, 혹은 탈주에 관한 탈주의 중얼거림이다.

                                                                                        - 이광호, <소설은 탈주를 꿈꾼다>

 

 

오랜만에 비평집을 꺼내 본다. 예전에 한번 읽은 글인데, 다시 읽는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지만, 실상 그때는 많은 작품을 읽지 못했다. 나의 관심은 문학에 가닿지 않았다. 항상 다른 곳에 관심을 두느라 바빴고, 다른 일로 분주했다. 처음에는 신문방송학을 공부한다고 난리를 쳤다. 사실 내가 가고자 했던 곳은 국문과가 아니라 신방과였다. 내가 다닌 대학은 복수 전공이 비교적 자유로워서, 신방을 복수 전공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난 안했다. 그쪽 수업은 생각보다 재미없었고, 알량한 복수 전공의 혜택이 은근히 내 자존심을 건드렸던 듯하다. 늦게나마 정신 차린 뒤에 인문학에 빠져들었다. 그때는 멋도 모르고 철학을 한답시고 부산을 떨었다. 철학, 종교학의 주변을 맴돌았고 미학의 언저리를 서성였다.


이제 대학을 졸업한 지 3년이 돼간다. 난 지금에서야 문학의 재미에 빠져 있다. 그때는 왜 몰랐는지. 그때는 조바심에 닥치는 대로 책만 읽었다. 부족한 지성을 채워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그렇게 오로지 이론서나 비평집에 매달렸다. 작품은 하나를 읽어도 그와 관계된 비평은 서너 편을 읽을 정도였다. 대개 그런 식이었다. 작품을 통해 구체적인 심미안을 기르지 않고, 다른 비평가들의 시각에 기대어 비평적 안목을 확보하려 했다. 물론, 그나마도 많은 작품을 읽은 것도 아니지만. 시간이 흘러, 나의 감성이 많이 메말라 있음을, 나의 심사를 생동감 있게 표현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러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에둘러왔지만. 그저 딱딱하고 거칠고 성글었다. 내 문장도, 내 생각도, 내 영혼도.


그러다 언제부턴가 소설책에 제대로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예전에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새삼 발견하는 기쁨을 느꼈다. 그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고 싶어도 국문과라는 제도 속에 갇혀 있음으로 볼 수 없었던 것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꼭 국문과라서가 아니었다. 난 그때 문학과 무관했다. 국문과에 4년을 머무르는 동안, 내게는 비평만 있었다. 문학은 쏙 빠져버린 비평만. 그것은 영혼 없는 육체마냥 무의미했고 끔찍했다. 정말 그랬다. 이제야 뒤늦게 시인하는 것이지만. 다시 집어든, 생동감 있는 글쓰기들이 내 살을 파고들었다. 내 머리를 쿵쿵, 두들겨댔다. 다시, 문학을 전공하는 느낌이다. 아니, 이젠 전공이 아니라 전유다. 진정 내 것으로서 내 안에 스며들 수 있게끔. 전보다 재미있게, 그러면서도 진지하게. 무거우면서 가볍게, 그렇게, 문학의 오솔길을 밟는다. 예전에는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이야기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표현하기 힘든 것들을 가까스로 표현해내는 그들의 솜씨를 흠모하며 살고 싶다. 내 몸을 푹 담가보고 싶다. 그렇게 할 것이다. 아직은, 글이, 문학이 내 삶을 뿌리부터 후벼팔 정도는 아니지만. 아니, '아직은'이 아니다. 영원히, 언제나 그러할 것이다. 다만, 그 '부정성'을 힘껏 껴안고 뒹굴 수만 있다면.

비록 삶의 대부분의 시간이 돈을 버는 데 쓰일지라도.

 

그나마 학원에 있어서, 내 시간이 많은 편이다. 그 시간에 나는 돈을 벌면서 동시에 책을 읽는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딱히 내 일이라 생각되는 것은 아니지만, 책을 볼 수 있어 좋고 그래서 당분간은 계속 이 일을 할 것 같다. 어쩌면, 난 너무 쉽게 돈을 벌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지겹고 짜증스런 업무에 매달리지도 않아도 되고, 잔소리하는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휴일에 불려가 잔무에 주말을 고스란히 저당 잡히지 않아도 되고 말이다. 난 오늘도 학원에 앉아 책을 펼쳐든다.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를 다시 읽었다. 세 개의 문장을 고른다. 하나는 그 소설에서 아주 재미있게 읽은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그 소설의 주제 의식을 도드라지게 보여주는 부분이다. 마지막은 오정희 소설, 아니 정확히 얘기해서 그 소설집(<유년의 뜰>)의 중요한 특징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달은 줄곧 머리 위에서 둥글었고 네 살짜리 동생은 어눌한 말씨로 씨팔눔아아, 왜 자꾸 따라오는 거여어, 소리치며 달을 향해 주먹질을 해대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수채에 쭈그리고 앉아 으윽으윽 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임신의 징후였다. 이제 제발 동생을 그만 낳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처음으로 여자의 동물적인 삶에 대해 동정했다. 어머니의 구역질은 비통하고 처절했다. 또 아이를 낳게 된다면 어머니는 죽게 될 것이다.”


“내용은 잊혀진 채 분위기만 남은 꿈과도 같은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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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눈으로 다가온다. 그 사람의 육체는 내 눈을 파고들고, 이런저런 편집의 과정을 거쳐 관념의 형태로 저장된다. 지나간 사랑을 추억하면, 사랑이 얼마나 시각적인지 금세 알 수 있다. 추억은 대개 풍경으로 남는다. 그리고 남아 있다. 


 

사랑이 어느 정도 무르익으면, 사랑은 냄새를 원한다.

연인들은 대개 그 사람만의 냄새를 알아채고, 냄새로 그 사람을 확인한다. 아주 감각적인 냄새들, 가령 애프터 쉐이브나 향수는 강하지만 속이 텅 비어 있다. 그런 것들 말고, 무취한 가운데 비어져 나오는 살비늘 냄새는 약하지만 속을 울렁이게 만든다. 그 울렁임은 비릿한 바다 내음 앞에서 느끼는 울렁임과 다르지 않다.


 

사랑은 눈에서 시작되기도 하고, 입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그 사람에게 던지는 나의 시선에는 사랑이 담겨 있다. 하지만, 시선만으론 사랑을 매듭지을 수 없다. 사랑은 언어를 요구한다, 반드시. 또한, 끊임없이. 사랑의 언어는, 때때로 언어들의 사랑만을 남긴다. 말들만 요란하고 알맹이는 없는 사랑들 말이다. 그걸 알면서도, 사랑의 말을 끊임없이 주절대고 끊임없이 요구한다. 사랑에 대한 집착과 언어에 대한 집착은 가깝고, 닮았다.


 

혀나 입술이 귀에 닿으면, 몸엔 닭살이 돋는다.

귀는 얼굴에 달린 성기다. 그것은 몸의 안테나이고 성애의 피뢰침이다. 귀가 성기일 수 있는 이유는, 그 예민함 때문이다. 예민한 것은 상처받기 쉽다. 그래서, 나의 거친 말은 예민한 귀를 통해 흘러들어가 연인의 가슴을 후벼 파고 도려낸다. 나의 이빨이 연인의 귀를 사정없이 물어뜯는 것처럼.


 

사랑을 하면, 혀가 얼마나 대단한 기관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누군가를 애무할 나이가 되면, 혀의 움직임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생전 처음 자유자재로 혀를 놀리는 자신이 그저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다. 귀가 예민하고 조심스런 성기라면, 혀는 부드럽고 거침없는 성기다. 혀뿌리가 얼얼하게 키스를 하고 나면, 피로가 몰려온다. 혀뿌리를 뽑아버릴 듯 달려드는 연인에게서, 얼핏 욕망의 뿌리를 보기도 한다. 그럴 때 삶은 더 노곤해진다.  


사랑은 관념의 체조가 아니다.

그것은 몸과 몸이 만나 섞이는 흐름이다.

그 흐름은 몸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몸과 더불어, 관념과 정서가 흘러들고 흘러간다.

나의 육체와 정신은 그 사람의 육체와 정신에 붙박이고, 또한 그것들과 새끼 꼬듯 엮인다.

그 엮임이 사랑의 황홀이고, 사랑의 추억이다.

감각이 때때로 거짓이고, 몸이 때때로 허망하고, 욕망이 때때로 스산하며 사랑이 때때로 허무하다 해도, 몸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사랑을 한다.

그 강렬하고 중독성 있는 것을. 


 

 

박민규, <지구영웅전설>의 후기 형식을 빌려다 몇 자 적어보았다. 그 후기의 일부를 여기 인용해본다. 그의 후기와 나의 글은 형식상의 유사성을 제외하곤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박민규의 단편을 읽어보고 싶다. 어디서 좀 구해봐야겠다.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을 처음으로 한 것은 마이크 타이슨이 홀리필드의 귀를 물어뜯던 세계 헤비급 타이틀매치를 지켜보면서였다. 문득 세계의 귀라도 물어뜯고 싶은, 그런 기분이었다. 몇 년 후, 나는 정말이지 소설이란 걸 쓰고 있었다. 그리고, 치과에 다니고 있었다.


앞으론 조심하세요. 의사가 말했지만 당시의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세계에 대해, 이빨에 대해, 하물며 '귀'에 대해서라니. 충치를 뽑고 돌아온 그날 밤의 뉴스에선, 등에서 사람의 '귀'가 자란 쥐가 토픽으로 소개되었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닌걸. 맥주를 마시며 나는 중얼거렸다. 둘러보니 '귀'는 어디에나 있었다. 마치 치과처럼, 아니 더 많이.


그러던 어느 날 샤워를 마친 내 등에 하나의 '귀'가 자라나 있는 것을 아내가 발견했다. 긴장하고, 정말 열심히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다. 제법 귀지를 파줘야 할 정도로, 어느날 문득 그것을 자라 있었다. 말 그대로의 '귀'.


말만 들었을 뿐, 나는 한 번도 그 '귀'를 본 적이 없다. 거울을 이용해 몇 번 시도를 하기는 했지만, 먀치 달팽이의 눈처럼 '귀'는 숨어버리기 일쑤였다. 복잡한 기분이었다. 정말로 있긴 있는 거야? 라고 물으면, 아내는 다음과 같이 자신이 본 바를 일러주고는 했다. 차분한 아프리카 코끼리의 귀보다는 작고, 흥분한 인도 코끼리의 귀보다는 커. 아프리카와 인도, 그 사이의 인도양(印度洋)만큼이나 소설은 깊은 것이었고, 나는 과연 인도양 코끼리 정도가 될 만큼이나 굼뜨고 무거웠다. 인도양 코끼리 같은 건 어떤 사전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당선 통보를 받은 것은, 내가 그 '귀'를 실을 카누인지 뗏목인지를 겨우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두 귀를 의심하는 대신, 나는 그 '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과연 이걸 싣고 갈 수 있을까? 갑자기 눈앞에 인도양이 펼쳐진 느낌이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타이슨이 은퇴를 눈앞에 둔 선수가 되어 있었다.


그날 밤 나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의 발신자는 더, 아이언, 마이크, 타이슨이었다. 축하해, 바톤 터치야! 편지에는 짧게, 그렇게만 적혀 있었다. 좋아, 기꺼이! 라는 짧은 답장을 쓰고 난 후에야,, 그가 홀리필드의 귀를 물어뜯은 진짜 이유를 나는 겨우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전부였다. 우리는 '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의견을 나누지 않았다. 아마도 앞으로도 그럴 거란 생각이다.


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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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징검다리—돌 하나(1983년), 돌 둘(1985년)을 놓아

                                                                                                               내 갈 길을 만든다.

                                                                                                 이 길은 어디로 향해 있는가.

                                                                                                                이 길은 외로운가.

                                                                                                                            위험한가.

                                                            내 발목을 거는 세찬 물살, 이제 시가 나의 운명이라고

                                                                                                                        말해야 하나.

                                                             내가 던지는 이 고통스러운 돌이 너무 깊은 데 들어가

                                                                                                 발 디딜 곳이 없지나 않을지.


                                                                                                                    1985년 초여름

                                                                                                                               황지우

 

 

                                             황지우의 두 번째 시집,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의 서문.

 

 

 

이제, 봄이다. 

이 봄에는, 나도 돌 하나 던질 수 있을까.

오래 멀쩡했다. 다시, 시-치통을 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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