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마왕 신해철 - 신해철 유고집
신해철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해철을 추모하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학생은 답안지를 보건대 상당히 주어진 공부를 열심히 하고 나름대로 자신의 앎을 위해서 애를 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앎이란 우선 그렇게 편지를 따로 써서 주장할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쓰는 이유는 물론 학생의 앎이 대단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앎이란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학생의 경우처럼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못하게끔 이끄는 것도 앎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그래서 자신의 '눈'을 흐리는 기능도 가지고 있지요."

 

4학년 2학기, 영화사 수업에서 만난 강사가 내게 던진 말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그 과목 성적이 낮게 나와서 분한 마음에 메일을 보냈더니 내게 돌아온 답이 저랬다. 그리고, 족히 A5 다섯 장은 되었을 긴 편지가 시작되었다. 그 장문의 편지에서, 내 답안의 문제와 글쓰기의 한계를 그는 백일하에 알몸 그대로 드러냈다. 부끄러웠다. 부끄러워서 아무에게도 그 편지를 보여줄 수 없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그런 나무람을 들어본 적이 없었던 나는 망연자실했다. 처음에는 다소 분하고 억울한 감정도 없지 않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본 그 글은 정연했고 날카로웠다. 무엇보다 내 속살을 정확하게 헤집고 있었다. 어린애처럼 울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장성한 나는 쓰게 웃었을 뿐이다. 그날 대학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훈계다운 훈계를 들었던 것이다. 선생다운 선생이 내리는 매는 매웠고, 매운 만큼 절절했다. 20대 중반에서야 비로소 나는, 내 오류와 허영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어쩌면, 저 글에서부터 서서히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나란 사람이 공부를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던 게 말이다. 그것 말고도, 앎 자체가 그리 대단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과 때로 어떤 앎은 '알지 못하는 것'(무지)보다 무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다른 누군가의 허물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 오류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오로지 그의 글만으로 내가 학문의 길을 벗어던진 건 물론 아니었다. 공부를 하기에는 사정도 여의치 않았고, 능력도 턱없이 모자랐다. 어찌되었든, 공부에 대한 꿈을 접는 데 그의 글은 한 1퍼센트쯤은 기여했다. 그는 편지 말에서, 좋은 학자적 자질을 훼손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편지를 띄운다는 말을 덧붙였다. 내 글(시험 답안지, 중간 리포트, 항의성 메일) 어디에 학자적 자질이 묻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내자 지닌 얼마 안 되는 학자적 자질을 버린 대신 다른 것을 얻었다. 그것이 어쩌면 공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저 말을 내 가슴에 새겨두며 살고 있는지는 의문이나, 적어도 나는 아직까지 내 자신을 성찰하는 데 게으름 부리지 않으려 한다. 오랜만에 들취본 그의 편지는 저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었다.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을 쓰는 지혜와 덕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뜰에 감이 붉게 익는 집 참새 떼가 지저귀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 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크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뜰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 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에 하얀 눈송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목화송이 같은 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 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히,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 . . 고등국어(상)에서 김용택, <그 여자네 집>




내 나이 스무 살이었던가. 그해 겨울에 나도 저 사람처럼 그녀의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하염없이. 길에 쌓인 눈을 밟고 또 밟으며,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돌을 차고 또 차며. 그 집 문 앞에 서서 그녀가 나오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끝내 나오지 않던 그녀를 뒤로하고 나는 그 집 대문 문고리에 내 목도리를 둘러주고 왔다. 내가 왔었노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날 난 하얗게 밤을 새우며 그녀를 기다리진 못했다. “목화송이 같은 눈이 되어” 그녀의 어깨 위에 “밤을 새워, 몇 밤을 새워” 내려앉을 정도로 나의 사랑은 깊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내 안에는 정말 많은 ‘내’가 들어앉아 있어서 온전히 나를 내놓지 못하곤 했다. 또한, 상대가 내게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 나 역시도 금세 내 마음을 거두기 일쑤였다. 그랬다. 내가 사랑하는 방식은 대개 그랬다. 조금 서툴고 미련스럽지만, 끝까지 기다리고 온전히 내어주지 않는 나의 사랑. 상대가 내게 줄 것을 미리 따져보고 내가 얼마나 줄 것일지를 가늠하기 바빴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달빛같이 숨가쁘고 그윽하게 사랑하지 않았던 나의 영혼은 내 젊은 날의 후회다. 청춘의 시간을 지나가면서 내게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그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아이들 세계에서 놀림을 받는 것처럼 심각한 ‘사회 문제’도 없을 것이다. 아이들은 문제가 있는 아이를 놀린다. 그리고 그 문제는 종종 남과, 나머지 대부분의 아이들과 같지 않다는 데에서 발생한다. 뿌루퉁해진 얼굴로 “애들이 놀려”하면서 아이가 털어놓는 이야기를 들으면, 아이들처럼 심한 인습주의자, 순응주의자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 남과 같지 않다는 것은 흉거리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가르치면 좋을까? 한 편의 동화가 나의 이런 고민을 속시원히 풀어주었다. <엉뚱이 소피의 못 말리는 패션>(비룡소).

소피는 확실히 처음부터 좀 다른 아이였다. “아기들이 우는 것은 배가 고프거나, 기저귀에 오줌을 쌌거나, 아니면 좀 안아줬으면 해서 그러는 것이다. 그러난 소피는 아니었다.” 소피가 우는 것은 어른들이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옷을 입혀 놓았기 때문이다. 말을 배울 때에도 소피는 “똑똑한 원숭이”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처럼 그저 눈, 코, 입” 하고 따라하지 않고 대신, “소매, 깃, 단추, 주름...” 하고 말했다. 이런 소피에게 문제가 생긴 것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소피는 발은 분명히 두 개인데 왜 사람들은 똑같은 구두 두 짝을, 같은 색깔의 양말 두 짝을 신는지를 몰랐다....” 이런 소피가 손가락 열 개에 다 다른 매니큐어를 칠하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엄지, 검지, 중지, 약지, 새끼 이렇게 다 “이름이 다르니까.” 이렇게 옷차림에 관해서 좀 독특한 생각을 가진 소피는 당연히 학교에서 아이들의 놀림감이다.

양말이나 신발을 짝짝이로 신는 것은 보통이고 필요하다면 아빠의 와이셔츠나 질질 끌리는 엄마의 치마도 서슴지 않고 입는다. 한꺼번에 두 개 이상의 치마나 벨트를 착용하거나, 세 개 이상의 목걸이나 금속 벨트 혹은 스카프를 두루는 등 담임 선생님이 “사육제 차림”이라고 부르는 옷차림을 해야 소피는 “옷을 입은 거 같은 기분”이다. 괴상한 옷차림 때문에 소피는 담인 선생님으로부터 경고 편지를 받아오고, 소피의 부모는 아이에게 묻는다. 왜 그렇게 여러 겹으로 옷을 입느냐고. 혹은 내일은 무슨 옷을 입고 갈 거냐고. 소피의 대답이 걸작이다. “아침만 되면 뭘 입어야 될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이것저것 다 입고 가는 거예요.” 혹은 “아빠는! 내가 언제 미리미리 준비하는 거 보셨어요? 내일 아침에 가봐야지요. 바람이 불지, 해가 날지 모르잖아요. 오늘밤 구름도 좀 봐야 하고, 내 목소리랑 눈빛도 좀 고려해봐야 되구요.” 그러나 자신의 생각을 좀 열심히 나타내고 싶을 때에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나는 시를 쓰는 것처럼 옷을 입는 거예요. 내 몸은 종이구요, 두 손은 만년필, 두 눈은 영감의 창이에요, 모자는 느낌표구요, 스카프는 쉼표, 레이스는 말줄임표예요.” 뿐만 아니다. 어떤 날은 잠옷을 입고 학교에 가기도 한다. 물론 소피에게는 나름대로 상당한 이유가 있다. “‘밤’의 한자락을, 자기 침대의 한켠을 ‘낮’ 속으로 가지고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런 소피는 자신의 옷차림이 ‘누구에게’ ‘왜’ 문제가 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오히려 반문한다. “아빠, 그게 나쁜 거예요?”

학교에서 경고장까지 받아오는 별난 아이의 너무나도 간단하고 본질적인 이런 질문에 좋은 대답을 할 수 있는 부모는 많지 않을 것이다. 소피의 부모는 그 많지 않은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담임 선생님께 이런 답장을 썼다. “우리 소피의 옷차림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리라는 건 저희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겉장만 보고 책을 판단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소피는 학업 성적도 우수하고 주의력도 깊은 편이면 예의바르고, 사회성에도 문제가 없다는 점을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피는 전혀 남을 방해하는 아이가 아닙니다. 옷차림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지 않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교육’이란 ‘창의성’을 맘껏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점에 선생님도 동의하시리라 생각하며....”

그렇다. 창의성이다. 문제는. 이렇게 멋진 대답을 할 수 있는 부모 밑에서 자라는 소피 같은 아이가 창의적인 것은 당연해 보인다. 우리 사회에서도 바야흐로 창의성이 문제다, 라고 부르짖고 있다. 창의성을 죽이는 교육만 받고 자란 어른들이 개혁을 부르짖으며 창의성을 살리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핏대를 세운다. 학교 안팎의 교육이 여전히 창의성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꾸준하게 진행되고 있는 걸 방관하면서, 수능 시험에서 언어가 어려지고 논술 시험의 비중이 높아지자 거기에 발맞추어 유아에서부터 수험생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육 프로그램의 초점은 창의성에 맞춰지고 있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한 것 같은 ‘창의성 과목’은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교사들은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다. 아무한테서도 ‘배우지 않았던’ 이 과목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모르는 교사들이 당황해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언제쯤이면 우리가, 아이들은 어른들의 가르침을 받고 자란다는 굳은 믿음에서 풀려나 아이들이 제가 원하는 것을 저 혼자 터득하도록 자유롭게 놓아줄 수 있게 될까. 창의성도 무조건 ‘교육’해야 한다는 그 생각에서.

소피의 옷 입는 방식은 정말 엉뚱하고 지나치다. 그리고 그 지나침을 인내하는 소피 부모의 태도는 훌륭하다. 소피의 행동을 교정하려고 하기 전에 그들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소피를 충분히 관찰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소피는 괴팍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아이가 아니다. 상심한 부모가 “내일, 새로 산 치마랑, 블라우스 입고, 양쪽 똑같은 스타킹 신고, 신발도 짝짝이로 신지 말고 그렇게만 하고 학교 갈 수 있니?”하고 부탁하자 부모님을 속상하게 해드리지 않기 위해 얌전한 여학생의 옷차림을 하고 등교한다. 스물일곱 개의 리본을 단 스물일곱 가닥으로 땋은 머리, 얼굴에 갖다 붙인 금색, 은색 별만 빼고.
반 아이들이 이상한 장신구를 달고 오는 데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하자 소피가 자기 반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다고 판단한 교사가 “학교에서는 소피가 퍼뜨리고 있는, 옷을 괴상하게 입는 전염병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조처를 강구하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의 경고성 편지를 교장 선생님의 사인까지 넣어서 소피 부모님께 보낸다. 이제, 소피의 엄마 아빠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딱 세 가지뿐이다. 1) 전학을 시킨다. 2) 평일에는 하루에 세 번, 일요일에는 하루에 여섯 번 소피에게 잔소리를 한다. 3) 심리 치료사에게 보인다. 소피의 부모는 세 번째 방법을 선택했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다른 아이들과 비슷하고 싶고 아주 조그만 부분 하나에서만 남들과 다르고 싶다는 소피의 이야기를 듣고 “소피는 용감하고 총명하고 득특하고 창의력이 뛰어난 아이입니다. 그리고 아주 귀여운 아이죠.”라고 진단서를 써주는 심리 치료사 역시 소피의 편이다.

어느 일요일 산책길에서 만난 신문기자에게 소피는 숄을 두르면 “할머니 생각이 나서 기분이 좋고” 터번을 쓰면 “알리바바”가 떠오르고, “걸어다니면 찰랑찰랑거리는” 예쁜 소리를 내는 세 개의 목걸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준다. 감동한 그는, 곧 ‘소피의 패션’이란 제목하에 “열 살 날 소녀 소피는 추억과 사랑과 음악과 시로 옷을 차려입는다. 이 아이가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나갈 것인가”라는 기사를 써낸다. 담임 선생님은 이 기사를 오려 사진과 함께 학교 게시판에 붙이고, 아이들은 저마다 괴상한 차림을 하고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일이 있은 후 한 달이 지나자 청바지를 입고 오는 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드디어 선생님까지 널따란 통바지에 커다란 리본이 달린 노란색 블라우스를 입고 학교에 오신다. “그 다음날, 소피는 주름치마와 하얀색 블라우스를 입고 단화를 신고..... 아무것도 더 걸치지 않고 그렇게 학교에 갔다.”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이다.

. . . 최윤정, <책 밖의 어른 책 속의 아이>(문학과지성사)에서


좋은 부모가 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좋은 부모는 무릇 좋은 인간을 전제로 한다. 좋은 인간이 되지 않고선 절대 좋은 부모가 될 수 없다. 물론, 좋은 인간이라고 다 좋은 부모가 되란 법은 없다. 좋은 부모는 우선 좋은 인간이어야 하고, 거기에 더해 또 다른 무언가를 갖춰야 한다.
나는 앞의 짧은 단락에서 ‘좋은’이란 형용사를 무려 8번이나 사용했다. 과연 ‘좋은’이 지칭하는 내용은 무엇인가? 그 말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실로 다양하게 쓰인다. 내가 저 말에 담아 쓰는 의미는, 어떤 도덕성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물론, ‘좋다’라는 것이 인품, 됨됨이를 뜻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좋음’이란 대개 사람을 대하는 어떤 태도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 그 사람의 입장에서 깊이 관찰하고 이해하는 태도. 하여, 그 사람의 깊은 상처와 그늘을 어루만지는 태도. 그게 좋은 사람이다. 다른 이의 그늘에 머무를 줄 알고, 그 그늘을 가만히 바라볼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은 당연히 ‘다름’에 대해서 신경질내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은 대개 낯선 존재들에게 날선 눈초리를 보내지만, 그런 사람은 으레 낯선 존재들과 마주하기를 꺼리지 않고, 또한 그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자 애쓴다. 차이를 인정하고 그것을 관용하기란 좀체 쉬운 일이 아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회는 범죄자는 간혹 용서하지만, 몽상가는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몽상가란 다른 사람이며, 이상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존재인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난 열린 사람이 좋고, 또 열린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은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지고,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문제다. 진정 그렇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일에는 보통 어떤 오해와 착각이 뒤따른다. 당연한 것이다. 나 아닌 누군가를, 내 밖의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은 나와 그 사람 사이의 거리 때문에 언제나 오해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어쨌든, 그것까지도 그러안고 가야 한다. 당신에게로, 또 다른 나에게로.  그리고, 나에게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아내에게 . . . . . .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곱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 알 한 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 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즐겨보는 TV 프로가 몇 개 있다. <낭독의 발견>, <신강균의 사실은>, <스승과 제자>, <100분 토론>.
드라마는 볼 시간도 없고, 잘 보지도 않는다. 그런 나에게 예외인 드라가 하나 있었다. <꽃보다 아름다워>.그 드라마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다. 또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드라마 작가, '노희경'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다. 그녀는 글을 쓸 줄 알고, 삶을 풀어낼 줄 안다. 드라마가 보여줄 수 있는 섬세함과 진정성을 고루 녹여 '벌집'을 만든다. 그 안에는 끈적끈적한 보통 사람들의 정서가 꿀처럼 흐른다. 그녀는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서민들의 삶에 질감과 무게감을 부여한다. 삶의 곡절은 전혀 과장되지 않게 펼쳐진다. 다만, 여린 눈물과 자잘한 상처로 적셔져 있다.
고두심, 배종옥의 연기는 언제나 그렇듯 돋보였다. 재수역의 김흥수나 우식할머니역의 김영옥, 아버지역의 주연도 어지간한 연기력을 보여줬다. 그들은 누군가의 삶을 (연기로) 대신 산 게 아니라, 온전히 그 삶을 살았던 게다. 적어도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그 드라마를 들여다보고 있자면, 그 어머니를 가만히 보고 있자면, 별로 슬프지 않은 장면에서도 눈물이 고이곤 했다. 그리곤, 저게 바로 우리다, 우리 삶이다, 슬며시 그런 느낌을 받았다. 거기에, 우리가 있었다. 자잘한 상처로 폐허가 된 우리가.
어제, <낭독의 발견>에 고두심이 나왔다. ‘어머니 팔베개’란 노래를 한 자락 부르고나서, <꽃보다 아름다워>의 대사를 읊었다. 그리고, 시를 한 편 읽었다. 생각보다 노래를 참 잘했다. 그녀가 읽은 그 시가 바로 <늙어가는 아내>다. 사랑에 대한 시고, 사랑의 말에 대한 시다. 사랑하며 늙어가는 세월에 대한 시다.
나도 사랑하며 늙어갈 수 있을까. 지금까지 내가 쓴 글들을 쭉 훑어보니, 사랑에 대한 얘기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왔음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사랑은 아직도 나의 오아시스인가 보다. 어찌 나만 그러하랴. 그 시는 말한다.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라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