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세계대전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6
마이클 하워드 지음, 최파일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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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말까지 이 강대국들은 사회적으로 동질적이었다. 여전히 지주 귀족층이 지배하고, 국교회에 의해 정통성을 확보한 유서 깊은 왕가들이 통치하는 농업 사회였다. 100년이 지나 이 모든 것은 완전히 바뀌거나 급속하고 불안정한 변화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변화의 속도는 나라마다 크게 달랐고, 우리는 이제 이를 살펴볼 것이다.

도시 환경에서 근무하는 직장인들이 잠시나마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고대했다. 서유럽의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부의 선전으로강화된 대중의 여론은 전쟁에 덜 열성적인 소수의 목소리를휩쓸어버렸다. 더 후진적이고 교육을 덜 받은 동유럽 사회들들에서는 전통적인 봉건적 충성심이 종교 집단의 승인에 더욱힘을 얻어 대중 동원에 효과적으로 작용했다.

여기에는 간단한 대답이 하나 있다. 바로 모든 교전국 국민들의 지속적인 지원이다. 그들은 막대한 군사적 손실을 감내했을 뿐 아니라 전쟁 수행에 따른 곤경과 통제를 불평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각국 정부는 전례가 없을 뿐 아니라 전에는 장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보유했다. 정부가 이악하지 않은 영역은 자발적 조직이 접수했다. 전쟁 발발과 디께 예상되었던 재정 파탄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정부 공채는 초과 모집되었으며, 지폐가극을 대체하고, 노동력 부족으로 임금이 가파르게 올랐으며, 정부와의 계약은 일부 사업 부문에서 전례 없는 번영을 낳았다. 농업생산자들은 노동력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농산물에 대한 수요가 어느 때보다 컸다. 아닌 게 아니라 전쟁

여기에 가장 잘 대처한 쪽은 서유럽의 잘 조직되고 결집력이 강한 사회들, 즉 독일, 프랑스, 영국이었다. 사실, 전쟁은 이 나라들이 더 잘 조직되고 더 단단히 결집되도록 만들었다.
20세기의 첫 10년 동안 어디서나 정치문제의 중심이었던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투쟁은 유예되었다. 노동계급 지도자들은 행정적·정치적으로 책임 있는 자리를 맡게 되었다. 노동력 부족으로 그들은 새로운 협상력을 얻었다.

입대한 사람들이 일하던 자리는 부분적으로 여성들이 메웠다. 여성들은 투표권을 요구하는 참정권 운동을 통해 전쟁이일어나기 전에 이미 자신들을 조직하고 있었고, 그 운동의 지도자들은 전쟁 수행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여성들은 간호와 복지 분야뿐 아니라 사무실과 공장, 농업 부문에서도 갑자기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면서 사회의 균형 전체를바꾸고 있었다. 1918년에 이르자 그러한 변화는 새로운 인민대표법에 반영되어 30세 이상의 여성을 포함해 유권자가 700만 명에서 2,100만 명으로 늘어났다. 거의 전쟁의 부산물로서, 영국은 완전한 민주주의에 근접한 나라가 되어갔다.

9월에 최고사령부는 제국의회가 바라는 체제개혁에 반대하고 병합주의적 강화를 지지하기 위해 ‘조국당‘ 이라는 신당 창당을 후원했다. 그들이 원하는 강화의 조건은 8월9일에 작성된 크로이츠나흐 강령에 제시되었다. 거기에 따르면, 동부에서 독일은 독일 군대가 이미 점령하고 있던 모든 영토쿠를란트, 리투아니아, 폴란드 동부 지방 를 완전히 자국에 병합하고, 서부에서는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보유하고그 국경 지대에 있는 롱위와 브리에 지방을 프랑스로부터 획득한다고 되어 있었다.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가 카이저에게 설명한 대로, 목적은 ‘독일인의 힘을 강화하고 우리의 국경을 개선함으로써 우리의 적들이 앞으로 오랫동안 다른 전쟁을 감히 일으키기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조국당은 라인란트 산업가들의 아낌없는 재정 지원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지배계급의 단순한 간판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다.

없는 것은 애초에 연합국이 전쟁 피해 배상금을 부과한 근거, 바로 이른바 독일의 전쟁 책임 조항이었다. 여전히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전쟁이 적들에 의해 강요됐고, 지난 5년 동안자신들의 희생은 대의명분을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더나아가 많은 이들은 자신들이 패배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오로지 휴전 조건을 놓고 연합국에 기만당했고, 제국1 적들(Reichsfeinde), 즉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당시의 곤경을 이용한 사회주의자와 유대인들한테 ‘등 뒤에서 찔렸기 때

문에 마땅히 자기들 차지인 승리를 빼앗겼다고 주장했다.
지어 이같은 돌히슈토스(Dolchstofs: 등 뒤에서 찌르기) 신한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이후 집권하는 독일 정부이정통성은 조약이 부과한 예속 상태를 변경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었다. 나중에 아돌프 히틀러가 그렇게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낸 것은 그 일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강화 조약의 조항들이 공표되었을 때 혜안이 있던 한 영국의 만평가가 윌슨과 로이드 조지, 클레망소가 파리 강회 회의장에서 나오는 모습을 묘사했다. 세 사람 중 누군가가 이렇게말한다. "이상하군. 어디서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기둥 뒤에서 한 꼬마 아이가 엉엉 울고있고, 아이의 머리 위로는 1940년도 동기생‘이라는 글자가박혀 있었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 우리 가운데 누가 가장 출세할 것인지 하차시절에 종종 생각해보곤 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내 예측은 모두빗나가버렸다. (…) 내 동기생들은 셋 중 한 명꼴로 전사했다.
-로버트 그레이브스, 『저 모든 것과의 이별 Good-bye to All Thaty그것은 민주주의의 시대에는 전장에서 단순히 군대를 패배시킨다고 해서 전쟁에서 승리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전쟁을 지탱하는 국민들한테서 싸울 의지를 완전히 뿌리 뽑아야 하는것이다. 1차세계대전에서 그것은 군대 자체를 소모시키고 민간인을 굶주리게 함으로써 가능해진다.
- 마이클 하워드, 『보불전쟁The Franco-Prussian Wary

주목할 점은 이 교착 상태에서 사상자만 늘어가는데도 기존의 전쟁과 달리 국민들이 계속해서 전쟁 수행을 지지했다는 사실이다. 흥미롭게도 여기서 저자는 클라우제비츠의 권위자답게 클라우제비츠가 말하는 전쟁의 세 요소를 거론한다(저자는 『전쟁론』을 영역한 바 있다). 즉 "전쟁이란 정부 정책과 군부의 행위들, 그리고 ‘민족들의 열정‘으로 이루어진 삼위일체"
이다. 이 요소들 가운데 셋째 요소인 민족들의 열정이야말로전쟁을 정책 결정자들이나 군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전 국민적 사안으로 탈바꿈시켰다. 이와 관련해 19세기는 민족주의의 시대였고 민족주의를 추진력 삼아 수립된 근대 국민국는 국민 개병제와 공교육 제도 등을 통해 국민들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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