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제사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17
로버트 C. 앨런 지음, 이강국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2018.12.30
구입한 책

명지대 법경제/경제사 전공 김두얼 교수의 글들을 보고 경제 추세의 장기분석이 흥미로워 ‘세계 경제사’를 찾아 고른 책. 분량이 많은 책은 아니지만 지하철에서 오가며 눈으로만 읽기에는 인용된 사례도 많고 장기분석 그래프들도 다수 인용되어 천천히, 그리고 풍부한 상상을 해가며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산업혁명을 촉발한, 그리고 결과적으로 동양과 서양의 오랜 격차를 만들어낸 분기점의 원인을 영국의 상대적 고임금에 따른 기술도입과 혁신적용 동인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공교롭게도 이 독서가 진행되었던 시기가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지난한 비난이 주류 언론들 간에 공유되던 시기였었다.

물론 지금의 대한민국의 제도적 소득상승을 200여년 전 영국에 대입하는 것은 견강부회가 될지 모르겠지만 주류언론의 관점을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한 건 내게도 좋은 사유의 실마리가 되었던 듯 하다. 전공자가 아닌 입장에서 소득부분에 대한 논의는 조금 더 독서내공을 키운 후 언급해야 하겠지.

아프리카 대륙들에서 자생적으로 자리잡은 것이라 믿은 부족체제가 실은 식민주의가 진행된 이후 식민행정을 위해 도입된 인위적 행정체계라는 언급도 그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여온 내 지식의 허약함을 드러내주었던 좋은 지점이었다.

독서란 이런 맛이다. 내가 구축해 왔던 세계가 깨지는 즐거운 체험.

일본의 경제성장 이유를 분석하기 위해 도쿠가와 막부 시절 축적된 자생역량을 파악하는 부분은 오랫동안 가졌던 의문을 일정부분 해소해 주었다. 단지 개항의 시점이 우리가 알고 있는 한/일의 근대사를 가져온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페리제독의 흑선이 에도에 나타나지 않고 강화도를 지나 한강을 거슬러 마포나루에 나타나는 그 시점에 조선이 개항을 했다고 조선이 열강이 되고 일본이 그 식민지가 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거다.

그간 양국의 근대사 책이나 일본의 산업부흥을 이끈 기업들의 이야기 등을 읽어왔던 것도 그런 이유였는데 이 책이 많은 도움이 된 듯 하다. 이 책을 통해 일본은 도쿠가와 시대 놀라운 수준의 기술과 행정 역량을 달성해 당시에 이미 제철에 대한 네덜란드 책을 번역한 것을 바탕으로 나가사키에 철강주조소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체제에서 식민지 국가는 본국의 법을 정착민과 도시에만 적용한다. 시골의 토착민에 대한 통제는 그들 ‘종족‘의 관습을 적용하는 ‘족장‘에게 맡겨졌다. 따옴표어들은 이것들이 식민지 이전의 현실과는 식민지 국가의 법적인 개념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아샨티같은 왕국부터 가장 조직되지 않은 무리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의 정치 조직체들은 동일한 관습을 가진 동일체로 여겨졌다. 그러나 사실 정치 조직체들은 복잡했고배인들의 관습은 제각각이었다.

이전까지 많은 정치 조직체는 유동적이었고,억압적인 체제를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의 권리가 폭압적인 지배자를 견제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더이상 떠날 수 없는 부족으로 조직되자 이러한 권리는 없어져버렸다. 관습은 식민주의의 목표에 맞게 재정립되었다. 노예제 같은 야만적인‘ 관습은(비록 현실에서는 계속되었지만) 제거되었고 부불노동을 요구하는 부족장의 권리 같은 쓸모 있는 관습은 유지되었다. 이런 식으로 강제노동이 식민지의 삶에서 일반적인 특징이 되었다.
공동체의 토지 소유가 보통 관습이 되었고 사람들은 부족의구성원이 되기만 하면 그들이 복종하는 부족장의 재량권에따라서 - 농지를 얻을 수 있었다. 가능한 곳에서는 부족장을옹위하는 전통적인 과정을 거쳤지만 결국에는 식민지 본국의 권력에 의해 부족장이 임명되었다.

부족장은 식민주의 이전의지배자보다 더 많은 권위를 부여받았다. 새로운 형태의 부족장들은 제국의 현장감독이 되어, 세금을 징수하고 노동을 강제하며 개인의 부를 쌓기 위해 권력을 사용했다. 식민주의는농촌 지방을 다스리며 지대추구를 하는 작은 군주들의 체제를 만들어냈다.

이는 어떤 부족원도 비어 있는 토지를 점유할 수 있었던 공동 재산 시스템과 갈등을빚었다.

고임금과 값싼 에너지에 기초한 영국경제에서는 산업혁명을 일으킨 혁신적인 기술을 기업들이 발명하고 사용하는 것이 이익이 되었다.

대중문화를 직접적으로 변화시킨 것은 뉴턴의 『프린키피 아』보다 사회의 변화였다. 가장 강력한 변화는 도시화와 상업의 발전이었다. 이로써 읽고 쓰는 능력과 계산력이 더욱 중요해져 대중의 지식이 발전했다. 18세기에는 장인, 기능공, 상점주인, 농부의 아들 대부분과 노동자의 아들 일부가 몇 년 동안의 기초교육을 받았다. 그 결과 전례가 없을 만큼 대중들이신문을 읽고 정치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톰 페인(TomPaine) 같은 급진주의자가 『인간의 권리 The Rights of Man』라는책을 수십만 권 팔아서 유명해질 수 있었을 만큼 새로운 세계였다.

첫째, 도시화와 농촌 제조업의 성장은 노동에 대한 수요를증가시켜 노동시장을 타이트하게 만들고 임금을 끌어올렸다.
런던과 암스테르담의 생활수준 역시 향상되었다. (그림3)둘째, 도시와 고임금 경제의 발전은 식품 생산을 위한 농업과 노동의 수요를 크게 증가시켰다. 그 결과로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모두에서 농업혁명이 나타났다. 두 나라 모두에서 농업 노동자 일인당 산출이 50퍼센트 가까이 증가하여 유럽에서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셋째, 도시의 수요 증가로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모두에서에너지 혁명이 발생했다.

넷째, 고임금 경제는 전반적으로 식자율(literacy), 계산력,
숙련의 형성을 촉진했다. 표4는 1500년과 1800년의 (자신의 이름을 서명할 수 있는 능력으로 측정된) 식자율의 추정치를 보여준다. 식자율은 유럽 전역에서 상승했지만, 북서유럽에서 가장 뚜렷했다. 프랑스 북동부, 벨기에, 라인 강 계곡 모두 가톨릭 지역이다의 식자율이 네덜란드나 잉글랜드와 비슷하 게 높았기 때문에 흔히 이야기되는 것과 달리 종교개혁이 이 상승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식자율 상승은 고임금, 상업 경제의 등장 때문이었다. 상업과 제조업의 확대는 교육을 경제적 으로 가치 있게 만들어서 교육에 대한 수요를 끌어올렸다. 동- 시에 고임금 경제는 부모에게 자식들의 교육비를 지급할 수 있는 돈을 제공했다.

높은 임금은 노동자들의 건강,
을 유지하고 교육을 확대하여 경제 성장에 기여했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역설적으로, 최저생계 수준은 한 국가가 경제적으로 발전하기 위한 경제적 동기를 제거한다. 하루의 노동으로부터 더 많은 산출을 얻어내야 하겠지만, 이 경우 노동이 너무 값싸서 기업들이 굳이 생산성을 높일 기계를 개발하거나 도입할 인센티브가 없기 때문이다. 최저생계 수준은 빈곤의 덫이다. 산업혁명은 바로 높은 임금의 결과였다. 산업의명은 높은 임금의 원인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자동차는 엔진, 시동장치, 브레이크, 트랜스미션, 서스펜션, 전기 등 다양한 혁신들을 필요로 했다. 현대적인 자동차는모든 선도적 선진국 사람들이 이룬 발명의 결과물이다. 19001년경이 되자 모든 선진국이 자동차를 제조하는 기업들을 보유했다. 혁신은 그들 사이의 집단적 행동이었다.

새로운 산업들의 또다른 특징은 많은 산업이 자연과학의발전과 관련이 있었다는 것이다. 강력한 대학 프로그램을 가졌던 국가들은 자연과학에서 경제적 이득을 얻었다. 1930년대 이전에는 독일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였다. 독일의 물리학자들과 화학자들은 많은 노벨상을 수상했다. 산업의 핵심 기한 인력들이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고 대학 학자들이 산업 생산을 개선하고 새로운 제품을하고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낸 중요한 발견들을 했다.

대학 연구의 주도권이 독일에서 엄청난 규모로 고등교육 부문을 발전시킨 미국으로 넘어갔다. 미국 정부는 엄청난 자금을 지원해 대학 연구의 발전을 촉진했다. 이러한 연구는 냉전 시기 군사 부문에 집중되었지만, 많은 프로젝트가 경제 전체에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자금 지원도 의료,우주 탐험, 인문학과 사회과학 분야에까지 이루어졌다. 이러한 자금 지원이 미국이 전 세계를 주도한 기반이었다.

이는 진보를 촉진하는 연쇄 순환을 낳았다. 높은 임금이 더욱자본집약적인 생산을 촉진했고, 이는 또한 더 높은 임금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선순환이 선진국에서 소득이 증가한 기초가되었다.

선도국의 발명가들이 고임금 노동 을 절약하기 위해 노력한 기술 변화의 과정은 세계의 가난한 국가들에는 아무 이득도 주지 않고 선진국들의 경쟁우위를더욱 강화하는 기계들의 발명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보다 풍요로운 생활방식을 즐겼다.
인구의 약 15퍼센트가 도시에 거주했다. 인구 100만의 에도(현재의 도쿄)를 비롯해 오사카, 교토(각각 40만)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에 속했다. 평균수명도 늘었다. 농민들이 휴식일‘을 가지고 여행을 즐기자 여가도 늘어났다. 농업사회치고는 취학률도 매우 높았다. 1868년 소년의 43퍼센트와 소녀의 10퍼센트가 학교에 다녔고 읽기와 산수를 배웠다. 성인 남성의 절반 이상이 읽고 쓸 수 있었다. 가르침과 즐거움을 위한 독서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웬만한 사람들이 사기에는 책값이 너무 비쌌지만 대여가 가능했다. 1808년 에도에는656개의 대여 책방이 있어 (인구의 거의 절반인) 약 10만 가구에 책을 제공했다. 높은 교육 수준은 일본 경제의 상업화 때문이었을 텐데, 이는 훗날 경제 성장의 기반이 되었다.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은 놀라운 수준의 기술과 행정 역량

을 이룩했다. 이는 나가사키에 최초로 철강 주조소를 건설한데서 명백하게 알 수 있다. 군사적인 필요가 동인이 되었다.
1808년 네덜란드인들의 선적을 공격하기 위해 영국의 페이 튼호가 나가사키 항에 등장했다. 페이튼호는 식량을 제공하 지 않으면 나가사키를 포격하겠다고 위협했다. 일본인들은 스스로를 보호할 철제 화포가 없었다. 이를 주조할 용광로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가사키를 다스린 영주가 되었고 서양 과학의 열렬한 옹호자였던 나베시마 나오마사(鍋鳥直正)는 화포주조소를 만들기 위한 팀을 꾸렸다. 이 팀에는 철 기술을 가진장인과 과학자가 포함되었다. 이들은 레이던 주조소를 서술한네덜란드 책을 번역해 이 주조소를 복제해냈다. 1850년 이들은 반사식 용광로 건설에 성공했고 3년 후 철제 화포를 주조 했다. 이 조직은 1854년 최신 기술의 개머리판 장전식 암스트롱 총을 영국으로부터 수입했고, 복제품을 만들었다. 1868년 일본에는 철을 주조하는 용광로가 11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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