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문예지 '창작과 비평'에 박민규의 장편소설이 연재된다. 이번 여름호부터 그 1회 연재가 시작되었는데 늘 그러하듯, 대단히 감각적이고, 대단히 센세이션하고, 대단히 유쾌하고, 대단히 발칙하다. 제목이 '핑퐁'이다. 이 소설은 작가가 서두에 밝혀놓듯, 탁구와 두 중학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중학생의 이야기이지만 선생도 부모도 나오지 않는다. 재미있는 것은 작가가 연재에 앞서 쓴 짧은 글이다. 말하자면 '창비'와 작가 '자신의 글'과의 관계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글이었다. 다른 어디도 아닌 '창비'에서 연락이 왔고, 뭔가 잘못한 것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전화를 받았으며, 장편 연재를 청탁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작가는 어쨌거나, '창비'든 뭐든 나는 내가 정말로 쓰고 싶어했던 두 중학생에 관한 이야기를 쓸 것이며, 그것은 '창비'가 아니라 '여성잡지'였다고 해도 마찬가지였거라고 피력한다. 이 작가는 정말 대단한 '괴짜'임에 틀림없다! 아무튼 1회분(약 40페이지)의 이야기만으로도 이 작가에게 걸었던 기대의 200%를 건져올릴 수 있었다. 언제나 그러하듯, 박민규는 밑바닥 인생의 저변에 깔린 진득한 애환들을 유희적으로 끌어올려, 특유의 감각적인 문체와 예측불허의 상상력으로 버무려, 마침내는 우주를 관통하는 철학적 메시지를 던진다. 정말로 이 글을 읽는 동안 나의 이성은 명왕성까지 멀리 날아간 기분이었고, 나의 감성은 핼리혜성과 충돌한 기분이었다. 눈물이 돌듯한 슬픔의 여운을 유쾌한 말솜씨로 터뜨려버리는 휴먼 SF 개그 로망 성장 소설 '핑퐁'은 그의 전작 '지구영웅전설''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잇는 장편 걸작이 될 듯하다!

 

다음은 '핑퐁'의 한 에피소드를 발췌한 것이다! 이 단편적인 에피소드만 봐도 그의 작품이 지닌 사소한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본주의와 사회 이데올로기에 대한 날카롭고 유쾌한 풍자적 철학을 읽을 수 있다. 어쩌면 이런 생각을,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는 정말로 한 알의 모래 알갱이의 문을 열고 들어가 그 속에 펼쳐진 우주와 눈물과 철학을 두루 여행할 수 있을 사람이다. 펠리칸이나 개복치를 타고. 혹은 기린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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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요, 에어컨 좀 켭시다. 버스 안에서 남자 하나가 소리쳤다. 덥긴 했지만, 덥다고도 덥지 않다고도 할 수 있는 그런 온도였다. 기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거 좀 켭시다. 이번엔 어떤 여자가 소리쳤다. 운전석 창을 열고 기사는 딴전을 피우더니, 웅성웅성 다시 항의가 줄을 잇자 말없이 에어컨을 작동시켰다. 과반수였다. 다수의, 다수에 의한, 다수를 위한 냉풍이 머리 위 송풍구에서 쏟아져내렸다. 마리의 방까지는 아직도 세 정거장이 남아 있었다.

 

세계는 다수결이다. 에어컨을 만든 것도, 말하자면 자동차를 만든 것도, 석유를 캐는 것도, 산업혁명과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도, 인류가 달에 간 것도, 걸어가는 로봇을 만든 것도, 우주왕복선이 도킹에 성공한 것도, 휘 휘 지나가는, 저 규격 저 위치에 저 품종의 가로수를 일렬로 심은 것도, 모두 다수가 원하고 정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인기의 정상에 서는 것도, 누군가가 투신자살을 하는 것도, 누군가가 선출되고 기여를 하는 것도, 실은 다수결이다. 알고 보면 그렇다.

 

따를 당하는 것도 다수결이다. 어느 순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엔 치수가 원인의 전부라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둘러싼 마흔한명이,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다수의, 다수에 의한, 다수를 위한 냉풍이 다시 폭포처럼, 송풍구에서 쏟아져내렸다. 손을 뻗어, 송풍구의 밸브를 잠그려 애써보았다. 퓌 퓌, 고장난 밸브의 덮개 한쪽이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다시 밸브를 열었다. 확실히 춥긴 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 에어컨 좀 끕시다, 라고 소리치는 것은, 그래서 날 좀 따돌리지 말라니까,라고 소리치는 것과 같다. 모쪼록 그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반팔 아래의 삼두박근을 손바닥으로 감싼 채- 나는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다수의 결정이다. 참고, 따라야 한다. 에취! 뒤에서 누군가 심한 재채기를 했지만 이내 버스 속은 잠잠해졌다. 인간은 누구나 다수인 척하면서 평생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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