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등뼈 (2001)

감독 : 기예르모 델 토로

 

한편의 성장소설 같은, 그러나 무섭고 참혹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그린 주옥같은 호러영화!


'잘 만들어진 공포영화'를 본 것이 도대체 얼마만이던가. 아주 어릴 적 엄마 손을 잡고 극장가를 돌며 거대한 간판에 붙여진 무시무시한 그림들이 뿜어내던 광기의 아우라에 매혹되곤 했던 그 시절의 황홀한 공포감은 언제부턴가 필자의 마음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실제로 그 때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13일의 금요일''블랙 후라이데이''나이트메어''공포의 여대생 기숙사''버닝''헬나이트''서스페리아''캐리''이블데드''후라이트 나이트''아쿠아리스''더플라이'등의 작품들은 초등학생이라는 신분의 격차를 극복할 수 없어 가슴에 한이 사무쳤던 그리움의 대상이었다.(삼류극장에 걸렸을때 미친듯이 달려가 만나보았던 그 때의 흥분이란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다) 시간히 흘러 중학생이 되어 설레는 마음으로 당당하게 극장에서 본 '나이트 메어5'라던가 '바탈리언' 같은 영화들은 더 이상 그 옛날의 짜릿한 흥분 같을 제공하지 않았다. 마치 '이제는 너무 늦어버렸어. 호러영화가 좋았던 시절은 벌써 지났어' 라고 말하는 것처럼. 재미는 있으되 무섭지 않은 영화들, 이런 영화들에선 '잘 만들어진 공포영화' 특유의 황홀한 공포감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사탄의 인형' '영혼의 목걸이' 같은 영화에서 필자는 그런 것을 느꼈고 재미있고 없고를 떠나서 묵직한 공포를 안겨다줄 수 있는 제대로 된 '공포'영화를 진정 보고싶었다. '스크림''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있다'를 그래서 필자는 엄청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들 영화 역시 '재미'는 있으되 '공포'는 없는 영화들이었다. 어째서 공포영화가 안무서워 진 거지, 하는 공허함에 시달려 공포영화에 대한 사무쳤던 감정마저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얘기가 길어졌는데 아무튼 요 근래 '식스센스''링''주온''디아더스' 같은 영화가 필자로 하여금 그 잊혀진 황홀한 감각을 되살려주었다. '왓 라이즈 비니스'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좋다고 할 수 있었다. 근래 개봉한 영화 중에서는 '엑스텐션' 정도면 대 만족이다. '캠퍼스 레전드''컷''발렌타인' 같은 영화들만 안나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던 중 제대로 된 물건을 발견한 것이다. '악마의 등뼈'는 이런저런 소식지를 통해 잘 된 영화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국내 미개봉이고 비디오로도 없으니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었던 영화였는데 얼마전 드디어 그 '제대로 된 물건'과 조우할 수 있었다.


대략의 줄거리를 말해보라면, 열 두살의 카롤로스가 마을에서 엄청 떨어져있는(차를 타고 가도 왕복에만 한나절이 걸리는) 외딴 고아원에 들어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고아원은 원장인 카르멘을 위시로 좌파를 돕는 일종의 비밀 기지로 우파에 발각되는 날에는 처형당할 위기를 안고있다. 그곳에서 카를로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지하실의 유령 '한숨짓는 아이'와 조우하게 되고 '한숨짓는 아이'의 비밀을 알고 있는 듯한 라이벌 제이미와도 격돌하게 된다. 하지만 아이들간의 마찰은 곧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덮어지고 그들은 '한숨짓는 아이'의 정체를 밝혀내고자 그들만의 모험을 강행한다. 그러던 중 좌파의 붕괴가 눈앞에 다가오고, '한숨짓는 아이'는 카롤로스에게 무시무시한 경고를 하고, 부랑자 카신토는 끔찍한 살육을 계획하며, 고아원에는 걷잡을 수 없는 참담함 공포가 엄습하게 된다.


이 영화의 라스트는 '특별'하다. 그 특별함 속에는 공포와 충격, 스릴과 서스펜스, 감동과 비애, 그리고 참혹함과 의외의 반전이 모두 담겨있다. 스페인 내전이라는 배경이 이 영화의 주제를 어떤 식으로 상징화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필자가 본 이 영화는 어떤 '유령'에 관한 보고서였다. 그 어떤 '유령'은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두려움, 탐욕, 비밀, 절망, 애수, 원한, 살의, 회한, 그리고 자아찾기까지. 때문에 유령은 곧 인간 내면의 탐구이며 문명 내면의 탐구였다. 정말로 '한숨짓는 아이'의 유령과 둘러싼 이 미스터리 모험담은 그 모든 고찰을 가능하게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그러한 주제나 사상을 전달함과 동시에 관객의 시각적 재미에도 무척 충실하다는 것이다. '공포'적인 측면에서 감독이 정교하게 만들어낸 몇 몇 장치들은 심장이 요동칠만큼 만족스러웠다. 특히 '한숨짓는 아이'는 호러영화 캐릭터를 다시 정리할만큼 인상적인 캐릭터였다. 물속을 부유하듯 흐너적거리는 그 그로테스크한 움직임은 과연 압권이었다. '공포'적인 측면 외에도 이 영화의 스토리는 너무나 꽉 짜여진 재미를 선사한다. 고아소년이 겪게 되는 여러가지 위기와 마찰은 성장소설적인 재미를 안겨다주고, 인물들간에 펼쳐지는 기이한 관계와 욕망들은 숨막히는 심리 스릴러적인 재미를 선사한다. 또한 전형적인 '유령의 집' 스토리라인을 거부하는 충격적인 시나리오의 힘은 모험 미스터리의 흥미마저 느끼게 하며 그 끝을 쉽게 예측할 수 없게 한다.  


한 마디로 '잘 만들어진 공포영화'였다. 스페인 내전이라는 무거운 배경을 깔고가면서도 이토록 아기자기한 호러 미스터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다들 별로라고 말하는 '미믹'도 필자의 경우는 꽤 흥미롭게 보았던지라 필자는 이 감독의 '호러적 재능'에 피터 잭슨, 샘 레이미 못지 않은 기대를 걸고 있다. 2001년 만들어진 이 영화는 같은 해 개봉한 '디아더스'에 가려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지는 못했지만 당시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그 해 최고의 공포영화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필자가 보기에도 '디아더스'와 비해서 한점 뒤떨어질 것이 없는 작품이었다. 어째서 국내 개봉이 되지 않았는지 그것이 의문일 따름.(물론 개봉해도 '디아더스'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끌수 있었을지 역시 의문이지만. '디아더스'만큼 감칠맛 나는 자극은 없기에)


끝으로 몇 가지 덧붙이자면, 카를로스와 제이미, '한숨짓는 아이' 역을 맡은 아역배우들의 연기가 놀라울 정도로 눈부셨다는 것이다. 연기의 자연스러움(자연스러운 척, 연기 잘하려는 척, 그런 척 하는 것이 아닌 절실하게 느껴지는 자연스러움)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애들이었다. 중견 연기자들의 연기력이야 거론해서 무엇하랴, 싶을 만큼 최고였다.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로베르토 베니니의 장모 역을 맡았던 그 여배우의 장애인 연기도 좋았고 악역을 맡았던 '오픈 유어 아이즈'의 주인공, 에두아르도 노리에가의 연기도 정말 찔러 죽이고 싶을 만큼 완벽했다. 극중 이름은 잘 기억 안나지만 '카르멘'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수호천사적인 노의사 페데리코 루피의 연기는 가장 여운이 남았다. '산티' 역을 맡은 젊은 여배우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순수한 영혼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듯한 그 미모가 다른 많은 작품에서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특히 그녀가 건네는 '체력 한알'은 정말 어떤 맛일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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