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빌 2
Kill Bill: Volume 2

 

 

복수의 끝은 비애!

 

 

타란티노는 분명 90년대가 탄생시킨 최고의 감독이다. <저수지의 개들><펄프픽션>은 천재 감독의 탄생을 알렸고 타란티노 이전 영화, 이후 영화라는 큰 획을 긋게 했다.(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이전은 고루함, 이후는 답습) 서부극, 홍콩 쿵푸영화, 일본 애니메이션과 사무라이 영화, 오우삼의 느와르, 드 팔머의 스릴러등 다양한 문화적, 장르적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 세계를 만들어낸 타란티노는 기존의 장르 관습을 해체, 재구성 하면서 잔혹하고 감각적인 테크닉으로 포장하며 헤모글로빈을 분출케 했다.

그런 그가 <킬빌>이라는 신작을 내놓았을 때 필자는 타란티노로 하여금 두 가지 사실을 짐작하게 했다. 우선 그가 전작인 <재키 브라운>으로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서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쉬었을 것이라는 것. 또 한 가지는 그렇기 때문에 <킬빌>을 만들어 보여 복수를 하고 싶었다는 것. <재키 브라운>은 타란티노가 밝혔듯이 <저수지의 개들><펄프픽션>보다 재미 없는 영화일 수도 있겠지만 자신이 가장 만들고 싶어 했던 영화였다. <재키 브라운>은 <저수지의 개들><펄프픽션>이 보여준 시간의 재구성과 거미줄같은 캐릭터의 구성이 한층 치밀하고 복잡해진 영화였다. 전작들에서 보여진 현란한 잔혹 영상미가 줄어든 대신 서로 얽히고 설키는 뒷골목 인생들의 시니컬한 스토리가 꼼꼼하게 스케치된다. 타란티노의 많은 재능 중 필자가 가장 최고로 꼽고 싶은 것은 놀라운 입담이다. 그에 의해서 창조되는 무수한 캐릭터들은 그들이 내뱉는 불꽃튀는 대사들의 향연으로 생명력이 결정되어질 정도다.(헐리웃 내에서 그의 대사 처리 능력은 '특A급'으로 정평이 나있다. <크림슨타이드>의 경우 토니 스콧 감독이 완성된 각본을 일부러 타란티노에게 손보게금 했을 정도. 물론 그의 손을 거쳐 탄생한 <크림슨 타이드>는 보석같이 빛나는 대사들의 향연으로 품격이 올라갔던 것이 사실이다) 그는 뒷골목 3류 인생들의 저급한 농담에서부터 시니컬한 비애까지 훤히 꿰차고 앉아 자유자재로 캐릭터를 뽑아낸다. 그렇게 탄생한 캐릭터들은 스스로 살아숨쉬고 스토리를 만들어나갈 정도다. 그러한 살아 숨쉬는 캐릭터와 꽉찬 스토리의 힘은 <재키 브라운>에서 가장 미끈하게 뽑혀나왔던 게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키 브라운>은 타란티노가 가장 애착이 갈만한 작품이고 그래서 가장 타란티노 다운 작품인 것이다. 타란티노는 <재키 브라운>의 아쉬움을 6년 후 마침내 <킬빌>로 풀어낸 것이다. 정말로 그가 하고 싶어서 온 몸이 근질근질했던 이야기, <재키 브라운>으로 관객과의 소통에 실패한 그가 몸살 날만큼 보여 주고 싶었던 이야기, 그 이야기의 애너지를 <킬빌>로 분출시킨 것이다.

그는 <킬빌>에서 <재키 브라운>과의 차이를 두고 있다. 그리고 그 차이가 바로 승부수가 되었다. 전작이 관객과의 소통에서 실패를 한 원인을 그는 재빠르게 캐취해낸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만의 전매특허 헤모글로빈의 시가 부족했던 탓이리라. 분명 <킬빌>은 <재키 브라운>과 일면 닮은 부분이 있다. 느와르에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것, 그 여자 주인공이 거대한 세력에 휘둘리면서도 재치있고 당당하게 맞선다는 것.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 느와르, 이것이야말로 타란티노가 오래도록 가슴 속에 품어왔던 이야기일런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완성된 <킬빌>을 두 조각으로 나눈다. 1부에서는 관객들이 자신에게서 그토록 목말라하던 헤모글로빈의 시를 현란한 테크닉으로 마음껏 분출시킨다. 피가 낭자하는 청엽옥의 결투씬, 오렌 이시이의 머리가 날아가는 충격영상으로 관객들의 얼을 빼놓은 후 그는 살며시 2부를 내보인다. 빌은 왜 그녀를 죽여야만 했는가, 그녀는 왜 빌을 죽여야만 하는가, 빌은 누구이고, 그녀는 누구인가? 퍼즐처럼 흩어져 있던 비밀의 조각들이 하나 둘씩 끼워지고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다. 타! 란티노는 <킬빌 1>을 통해 관객들을 강렬하게 끌어당긴 후 비로소 <킬빌 2>를 통해 자신이 하고 싶었던 진짜 이야기를 완성시켜 나간다. 자극적인 영상미에 이끌려 흘려보낸 무수한 수수께끼들의 답은 오직 <킬빌 2>에 있는 것이고 관객들은 '상'권을 읽은 지금, 반드시 '하'권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지막 챕터를 확인하지 않고는 못 배길 테니.

이러한 전략은 탁월했다. 타란티노는 다시한번 장르적 특성을 활용해 자유자재로 관객들을 쥐고 흔든다. 전편에 암시되어졌던 브라이드의 살아있는 딸이 등장하고, 어째서 빌이 브라이드를 암살하려 했는지에 대한 배경이야기가 나오고, 브라이드가 페이 메이로부터 무술을 전수받는 과정이 나오고, 브라이드가 빌을 떠나게 된 이야기, 그리고 빌과의 최후의 대결이 그려진다. 재미있는 것은 숨겨진 사연들에 대한 타란티노만의 놀라운 입담이다. 술집에서 해결사 노릇이나 하며 보스로부터 온갖 구박을 당하는 3류 건달로 전락한 버드의 사연이나, 한쪽 눈을 잃게 된 엘 드라이버의 사연, 브라이드가 조직을 떠나게 된 사연 등. 그들이 뿜어내는 대화의 힘은 전편의 청엽옥 결투씬 만큼이나 압권으로 와닿는다.(그만큼 살아있는 대사의 힘은 너무나 훌륭했다) 특히 빌의 사연이 절정을 이룬다. 잔인무도하고 얼음같이 차갑게만 비쳐졌던 전편의 이미지를 반전시키는 애수짙은 빌의 모습은 가히 놀랍다. 브라이드의 결혼식장에 악기를 연주하며 나타난 빌, 자신을 찾아온 옛여인 앞에서 딸과 함께 노는 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브라이드를 향해 모든 진심을 얘기하는 빌, 그러한 빌의 진면목들은 전편의 관객들을 정서적으로 공략한다. 이처럼 계산된 감독의 연출에 관객들은 보기좋게 빠져들며 빌과 브라이드 두 캐릭터 누구의 손도 들어줄 수 없게 되버린다. 결국 피할수 없는 최후의 대결은 운명처럼 다가오고 복수의 끝이 남긴 가슴저린 비애만이 관객들의 정서를 지배한다. 그리고 대서사시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강렬했던 두 권짜리 펄프 픽션은 막을 내린다.

우리가 <킬빌 2>에서 기대할 것은 청엽옥 결투나 오렌 이시이와의 진검승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을 기대한다면 1편을 한번더 보며 만족해야 할 것이다. 이 복수의 서사시는 vol 1과 vol 2 즉, 상, 하권으로 나누어진 하나의 이야기다. 총 10개의 챕터를 가진 한 편의 소설이다.(장르는 느와르 혹은 하드보일드쯤) 싸구려 소설 제목 같은 '피의 복수를 다짐한 여자'가 있고 그녀의 잔혹한 복수극이 있고 후반부로 갈수록 숨겨져 있던 비밀들이 하나 둘씩 밝혀지며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무수히 읽어 보았음직한 이런 류의 소설들, 그 틀을 우리는 알고 있다. 타란티노 역시 알고 있고 그는 그러한 소설들을 헤밍웨이나 포크너보다 숭배시한다. 이점을 잊지 말자. 우리모두 헤밍웨이나 포크너를 원했던 것이 아니다.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을 원했던 것이다. 그는 그 장르에 충실했다. 혀를 내두르는 잔혹함으로 책장에 몰입하도록 만들었고 유려한 스토리텔링 능력을 과시하며 다음 챕터가 끊임없이 궁금하도록 만들었다. 챕터가 거듭될수록 비밀은 밝혀지고 최후의 대결만이 남게 되었다. 그 모든 것을 그는 적재적소에 배치한 음악과 현란한 영! 상미 감각적인 테크닉으로 포장했다. 이제 <킬빌 2>에서 복수는 마침표를 찍었고 우리들은 vol 3이 나오기를 혹은 그의 신간이 출간되기만을 기다려야 할 테다.

장르를 충실하게 활용하면서 그것에 변칙을 가하는 것, 그러면서 그것을 멋지게 포장하는 것, 이 단순해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공식을 타란티노만이 능숙하게 풀어낸다. 그래서 그의 펄프 픽션은 언제나 유쾌하고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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