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블루
콘 사토시 감독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세상사에 시달려가듯 자꾸 흐려지는 내눈이 싫어!

 

"내가 이제부터 이야기하는 사건은 교묘하게 꾸며진 살인사건입니다. 나는 그 사건의 탐정입니다. 그리고 증인입니다. 또한 피해자입니다. 게다가 범인입니다. 나는 네 사람 모두 입니다. 그럼, 대체 나는 누구일까요?"

프랑스의 천재 추리 소설 작가 세바스티앙 자프리조의 미스터리 소설 '신데렐라의 함정'의 홍보문구이다. '신데렐라의 함정'은 <퍼펙트 블루>와 비교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작품이며 위 홍보문구야 말로 <퍼펙트 블루>의 혼란스러운 이미지를 대변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표현이다. 후지TV에서 시나리오 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 무라이 사다유키가 '신데렐라의 함정'을 보았는지는 의문이나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미스터리의 성향이 세바스티앙 자프리조가 '신데렐라의 함정'에서 추구하고자 했던 그것과 닮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두 작품의 직접적인 스토리 라인은 다르다. 자아 혼돈을 다루고 있지만 <퍼펙트 블루>는 보다 더 사이코드라마적이다. 또한 오늘날 현대인들의 의식세계의 일부를 지배하고 있는 거대 시스템, 연예산업의 병리를 날카롭게 해부하고 있다는 것이 이 영화만의 매력일 테다.

여성 3인조 댄스 그룹 '참'은 귀엽고 청순한 이미지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아이돌 스타이다. 그러나 맴버들 중에서 특히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미마가 '참'에서 빠지게 된다. 다른 맴버들에 비해 나이가 제일 많았던 그녀는 아이돌로서의 생명이 다했기 때문이다. 이에 소속사는 그녀를 본격 성인 배우로 탈바꿈시켜 또다른 상업적 가치를 꿈꾼다. 미마로선 아이돌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 힘들었지만 스스로가 선택해야 할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고 신인 배우로서의 길을 열심히 걷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배우로 지명도를 높이기 위해 그녀는 강노높은 노출씬이나 강간씬 마저 감수해야 했다. 이에 언론과 각종 연예계에서는 그녀의 파격적 변신에 침을 흘리며 반기지만(상품화 가치로서), 예전의 그녀를 사랑했던 미마 마니아들은 섹스 코드에 어필하려는 그녀의 성인 신고식에 야유와 질타를 보낸다. 그러한 이중적 반응에 미마는 이미 연기자의 길로 들어섰기에 인내하고 감수해야 할 과정이라고 스스로를 위안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나약한 자기 암시였을 뿐 그녀는 순간순간 푸르게 빛났던 아이돌로 되돌아가고픈 격렬한 감정에 휩싸인다. 그럴 때마다 ! 그녀는 스스로의 감정과 의식마저 제어할 수 없는 무중력의 상태가 되어 또 다른 자아와 마주치게 된다. 그 즈음 인터넷에 '미마의 방'이라는 홈페이지가 개설되고 그곳은 아이돌이었던 미마의 일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공간이다. 성인 배우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현실의 미마는 예전의 순수했던 모습 그대로 남아 여전히 미마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초현실 속의 미마를 바라보며 악몽과도 같은 실상과 허상의 대립에 괴로워한다. 때를 같이 해서 그녀가 출연중인 범죄 드라마 '더블 바운드'의 제작진들이 한 명씩 잔인하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미마는 현실의 자아, 초현실의 자아, 배우로서의 자아, 드라마 속 캐릭터로서의 자아, 미마 마니아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자아, 등 수없이 나뉘어지는 자아분열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녀는 혼돈에 빠진다. '나는 과연 누구인가, 무엇이 진짜 나인가,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을 저주하는가, 그래서 살인을 저지르는가'

이러한 자아 혼란은 비교적 최근에 개봉되어 걸작의 반열에 오른 <아이덴티티>를 연상시킨다. 카메라가 다중 인격 소유자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버려 제 3자의 이야기인양 이야기를 전개시켜나가며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그 모호함 속에서 불안한 공포를 효과적으로 자아냈다는 점이 두 작품의 공통된 정서이다.

<퍼펙트 블루>는 추상적 공포와 현실적 공포 모두를 효과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다. 미마가 그녀의 초자아와 대립하며 겪게되는 끔찍한 악몽들은 이 영화의 백미로 영화 <야콥의 사다리>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기도 한다. 쉴 새 없이 뒤바뀌는 현실과 환상의 교차는 보는 이로 하여금 거부할 수 없는 진실마저 의심해 보게 만드는 놀라운 최면 효과를 발휘한다. 그것은 <매트릭스>의 현실 공간이 사실은 모두 허구이며 '장자의 호접몽'에서 사실 나비가 인간의 꿈을 꾸고 있다는 사상과도 일치한다. <공각기동대><오픈 유어 아이즈>등 최근 동서양을 막론하고 초미의 화두로 떠오른 '정체성 혼란'의 문제를 <퍼펙트 블루>역시 현란한 시각적 장치로 담아내며 보는 이를 전율케 한다. 또한 <퍼펙트 블루>에서 다루어지는 끔찍한 살인 장면, 강간 묘사, 누드 촬영 씬 등은 실사 영화를 능가하는 사실적인 충격을 안겨다 준다. 송곳으로 눈을 찌르고 눈알을 파내고 망치로 머리를 내리치는 등의 고어적인 묘사는 이 영화가 잘 만들어진 호러 영화로서도 손색이 없음을 증명해 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러한 살해 장면 조? 宕?영화 속에서 내내 진행되는 드라마 속의 이야기와 교묘하게 맞물리며 그것이 진짜 살인인지 드라마 속의 가짜 살인인지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든다. <아쿠아리스>의 초반 무대 살해씬이 살짝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추상적 미학으로 승화 시켜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무엇보다 강렬한 사운드와 파격적인 영상미가 감각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영화를 시종일관 흡입력있게 이끌어 간다는 것이 이 영화의 힘이다. (그러한 조화로움이 가장 장엄하게 빛을 발하는 부분이 라스트의 추격씬이다. 실사, 애니를 막론하고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 시퀀스 씬으로 손색이 없을 듯!)

영화는 라스트에 이르러서 의외의 반전을 내세우지만 아주 예측할 수 없었던 반전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이 애거스 크리스티식의 정교한 퍼즐 플레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미마가 겪게 되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가공할 악몽과 혼돈이야 말로 이 영화의 진정한 미덕인 것이다. 때문에 이 추상적 퍼즐 맞추기의 진면목은 결국 누가 범인인가 하는 단순 추리기법인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객들마저 미마의 자아 속으로 녹여버리는 경이로운 충격, 그 자체에 있다.

한가지 필자가 흥미로웠던 것은 7년 전에 만들어진 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주제와 스토리 라인이 지금의 국내 연예계 현주소와 너무 닮아 있는 듯했다는 것이다. 청순한 이미지의 아이돌로 출발해서 청순미가 바래질 때쯤 파격적 성인 코드를 내세우며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고 더 나이가 차서 가수로서의 상업적 가치를 잃게 되면 누드 집, 에로 배우, 혹은 다른 연예분야로 끊임없이 옮겨 다니며 새로운 상품가치를 얻어내려는 몸부림들이 영화속 미마와 너무나도 닮아 있는 듯하다! 상품화를 위한 착취에 희생되는 스타들의 뒷모습에 이토록 정면으로 메스를 들이 댔다는 것에서 <퍼펙트 블루>의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문득 '하늘색 꿈'의 가사들이 미마의 외침으로 다가온다! 청초한 하늘빛 고운 눈망울! 잃고 싶지 않았던 완전무결한 청색자아! 세상사에 시달려가듯 자꾸 흐려지는 내눈이 싫어! 너무 쉽게 낡아가는 세상에 또 시간 속에 난 지금 어디에 서 있지, 어디에서 날 찾을 수 있을지! 어린 나를 자라게 하던 푸른 꿈 속으로 그 푸른 시간 속으로 가고 싶어! 지금의 나는 진짜 내가 아냐! 날 죽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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