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스 센스 - The Sixth Sens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식스센스>는 한 마디로 1999년 최고의 충격이 아니었을까?

미국에서 처음으로 이 영화가 개봉 되었을 시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제작자 측에서 철저히 비밀 유지를 했다고 함) 무방비로 영화를 감상하게 된 사람들은 태어나서 최고로 황당한 경험을 해야만 했다. 말 그대로 두 눈 뻔히 뜨고 완전히 속은 느낌이었다. 영화는 분명 모든 사건이 마무리 되고 이제 끝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영화는 차분히 정리되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관객들의 기대를 처참하게 무너뜨리며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놓는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고 플래쉬 백과 함께 터지는 충격적인 반전은 관객 전원을 바보로 만들었다. 관객들은 그 믿을 수 없는 결말에 '과연 저것이 가능할 수 있단 말인가?'라는 의문을 제기 하게 되었고 신들린 듯 또다시 표를 구입해 극장으로, 극장으로를 외쳤다. 관객들로 하여금 꼭 두 번 이상 보게금 만드는 마력이 있는 영화. 덕분에 영화는 개봉 5주 연속 박스 오피스 1위라는 대 신기록을 세우며 북미지역에서만 2억 7천만불이라는 경이적인 흥행기록을 수립한다. <식스센스> 그 마지막 5분의 충격은 마치 95년 개봉되어 전 세계 영화인들을 K.O시켰던 가공할 스릴러 <유주얼 서스펙트>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유주얼 서스펙트>때도 분명 그랬다. 관객들은 모든 것을 결론 짓고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고 그 순간 마지막 5분의 충격은 안심하고 있던 관객들의 뒷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케빈 스페이시의 발걸음이 선사했던 그 기막힌 반전의 황홀경. 더 이상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위대한 반전이 <식스센스>에서 다시한번 부활했던 것이다.

그 대단한 반전때문인지 흔히들 <식스센스>를 반전 빼면 시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제이슨 친구는 <식스센스>에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뒤집어 버리는 엄청난 반전의 충격 뒤에 가려져서 쉽사리 인식하지 못했던 영화의 진짜 매력을 이제부터 얘기해 보고자 한다. 이제부터 영화의 반전에 관해서 직접적인 언급은 없겠지만 간접적인 언급은 있을 수 있으니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사람(과연 있을까?)이라면 이쯤에서 리뷰 읽기를 그만두시길...

이 영화는 사실 유령이야기가 아니라 사람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영화를 전체적으로 이끌고 나가는 이는 브루스 윌리스가 맡은 말콤 박사이지만 영화의 중심에 있는 이는 꼬마 아이 콜 이다. 이제 잠깐 콜의 이야기를 해 보자. 콜의 눈에는 유령이들이 수시로 보인다. 그것은 육감이 아주 발달된 특별한 능력이다. 그 능력 덕분에 콜은 반 아이들로 부터 따돌림을 당한다. 더구나 콜에겐 아버지가 없다. 또 어머니도 바쁜 일과때문에 아이에게 세심한 신경을 쓸 수 없다. 아이는 자연스레 자신만의 비밀을 홀로 간직하게 되고 쉽사리 어머니께 말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이는 곧 부모의 이혼으로 인한 미국의 파괴되어가는 가정사를 대변하는 전형이다. 그리고 감독은 그러한 환경속에서 오직 자신만의 세계에 갖혀버린 소년의 이야기를 그려나간다. 소년은 스스로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비밀을 풀기 위해 홀로 고민하게 되고 공포와 고립이 반복된다. 그러다가 콜은 자신의 명성이 과장되어진 빈껍데기였음을 깨닫고 번뇌하는 심리치료사 말콤 박사와 조우하게 된다. 이들의 만남으로 인해 내러티브는 사실상 안정된 궤도에 들어서게 된다. 상처받은 두 사람이 만나 서로를 배려하는 과정에서 상처를 치유해 간다는 보편적인 플롯으로 접어든 것이다.

말콤 박사는 화려했던 자신의 인생경력이 한 사건을 계기로 모두 헛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고 심리치료사라는 존재의 가치에 대한 심각한 회의에 빠져든다. 나는 누구인가, 심리치료사이다. 심리치료사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해 주는 일을 한다. 상까지 받은 나는 이제 껏 상처받은 이들을 제대로 치료해 주었던 것인가, 하지만 나에게 치료를 받았던 이가 미치광이 연쇄살인범이 되어 돌아왔다. 그렇다면 이제 껏 나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치료했던 거란 말인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가정도 뒤로하고 깊은 고뇌에 시달리고 있던 말콤 박사는 콜을 통해 자신의 지난 과오를 회복하고자 한다.

샤말란 감독은 영화를 굉장히 차분하고 안정되게 이끌어간다. 다소 지루하리만치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감독의 의도적인 연출기법이었다. 정말로 제이슨 친구는 처음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때 도중에 깜빡 졸았던 기억이 있다. 그 때문에 희미하게 놓쳐버린 몇 몇 주요 복선장면들을 재 확인 하기 위해서라도 영화를 다시 보아야만 했으니~!

이 영화의 조상이 <엑소시스트>와 히치콕의 영화들임은 영화를 잘 모르는 사람이다 하더라도 쉽게 수긍이 갈만한 사항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엑소시스트>도 히치콕의 스릴러들도 결코 지루할 틈이 없는 영화이다. <엑소시스트>의 90년대 판이라고 해석하는 이도 있을 정도로 <식스센스>는 오컬트 무비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샤말란 감독은 기존의 장르적인 연출법과는 다른 자기만의 독특한 비법으로 영화에 기묘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영화는 한 편의 심리드라마 혹은 휴먼드라마처럼 기복의 변화없이 침착하고 조용하게 진행된다. 관객들로 하여금 금방이라도 뭔가 근사한 장면이 터질 것이라는 기대를 잔뜩 하게 하지만 끊질길 정도로 차분한 호흡에는 변화가 없다. 그래서 필라델피아의 거리에는 마치 말콤 박사와 콜 외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없다. 그렇기 때문에 잠깐식 스쳐지나가는 무존재의 존재인 유령들이 더욱 강렬한 느낌으로 와 닿을 수 있었던 것일게다. 샤말란만의 이러한 독특한 호흡법은 영화의 적재 적소에서 보석같이 빛을 발하다가 최후에 이르러서는 폭발하듯 최대치의 감정을 이끌어낸다. 그것이 샤말란 식 충격효과인 것이다.

샤말란의 각본능력은 이미 정평이 나있다. 흔한 소재를 가지고도 관객들의 호흡을 자유 자제로 조절하며 결국 대중들의 감정을 기가 막히게 이끌어내는 탁월한 스토리 라인은 가히 천재적이다. 반전을 제외한다면 <식스센스>의 스토리는 그저 뻔한 심리극 혹은 가족애를 불러일으키는 디즈니용 휴먼드라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비슷한 예로 <스튜어트 리틀>역시 흔하디 흔한 가족용 드라마라는 소재이다. 하지만 두 영화 모두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샤말란만의 재기 넘치는 각본덕에 비슷한 소재를 다룬 다른 영화들과 큰 차이를 보인다. 일단 재미면에서 말이다~!

샤말란은 조용히 영화 곳 곳에 복선을 숨겨두었다. 그리고 콜의 특출한 능력이 밝혀지기 전까지 그저 소외된 소년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그 속에서 차츰 존재감이 짙은 유령들을 등장시키며 사건에 대한 모호함을 시각적인 공포감으로 흐려놓는다. 관객들로 하여금 진실에 관한 조금의 갈피도 잡을 수 없게 만들어 놓고선 마지막에 가서야 결정타를 날린다. 그리고 관객들이 유령이란 존재에 대한 놀라움, 기이함, 경외감에 빠져 있을 때 결국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의 이야기였다는 것을 말하며 감동으로 대단원을 마무리한다.

인도 출신의 젊은 감독, 샤말란. 그는 애초부터 인간의 정체성과 고립에 관해 끝없이 탐구하는 감독이었다. <식스센스> 이전의 두 편의 영화 <분노의 기도><와이드 어웨이크> 역시 이러한 사상에 기초를 두고 만든 영화이며 그의 후속작이었던 <언브레이커블>이라든가 최신작 <싸인> 역시 비슷한 주제와 갈등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미루어 짐작해 보건데 그는 <식스센스>를 통해 오컬트 영화의 화려한 부활을 알리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다른 방식에서 접근해 보고자 했던 것일게다. 성장기에 막 접어든 콜이 느껴야만 했던 유령들에 대한 두려움은 곧 그 시기 소년들이 겪게 될 미지의 세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다. 누구에게도 쉽사리 기댈 수 없는 홀로서기에 대한 불안감과 세상 속에서 과연 나는 누구일까 하는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는 일련의 인생과정이다. 소년은 결국 두려움의 존재에 맞서 과감히 부딪히게 되고 해결방안을 찾는다. 비로소 세상과 커뮤니케이션하는 방법을 터득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말콤 박사는? 그도 역시 정체성과 소외감에 고뇌하는 인간이다. 화려한 명성들이 거품에 불과함을 깨닫고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분투한다. 자신이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이며 지금 제대로 이행하고 있는지에 대한 탐구는 결국 오늘날을 살아가는 모든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숙제이다. 나란 존재는 무엇일까? 여기에 명쾌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또, 대답할 수 있다고 한들 그것이 진정으로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진실임을 확인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부분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산다. 수많은 타인들과 대화를 하고 있는 듯 하지만 실상 나 혼자 떠들고 있으며 커뮤니케이션은 상실 당했을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이러한 가설 조차도 내가 인간이고 그래서 인간 중심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나온 오류성 결론일지 모른다. 아예 처음부터 나란 존재는 없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누가 삶과 죽음의 뚜렷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겠는가?

지금 이 순간 과연 내 얼굴은 존재하고 있을까? 만약 그 질문에 대한 진정한 해답이 당신이 이제 껏 진실이라고 믿어왔던 모든 정서적 관념들에 위배되는 지독한 반전이라면, 감당할 자신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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