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위험하다
마리아나 엔리케스 지음, 엄지영 옮김 / 오렌지디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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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불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한 편으로 신뢰하는 작가가 된 마리아나 엔리케스.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에 단숨에 구입했다. '침대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위험하다'는 12편의 단편 및 중편으로 이뤄진 소설집이다. 이 작품이 그녀의 첫 공포소설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작가적 상상력의 원형 혹은 원석에 해당하는 작품 같았다. 두 작품의 테마 또한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지역의 풍습과 지형의 특성을 아우르는 무속 신앙, 여성 차별과 고독, 소외의 문제, 불평등한 사회 구조가 만든 가난의 공포, 군사 정권이 자행한 폭력의 역사, 퇴폐적 성향과 도착적인 심리 등... 작가의 언어는 시대의 불안한 현실을 만들어내고, 원고지 위에서 피어난 픽션은 진실을 밝힌다.


작가가 만든 세계는 현실에서 살짝 뒤틀려있다. 그러나 책을 읽다 보면 그 뒤틀린 세계가 진짜 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르헨티나 특성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공포소설이지만 이야기 속에 휩쓸려가다 보면 결국 그러한 특성을 잊게 된다. 한국과는 지리적으로 지구 반대편에 존재하는 낯선 나라의 이야기가 꼭 내 주변에서 익히 일어나고 있는 삶의 한 모습처럼 여겨진다. 이불 밖으로 길게 뻗어나가면 저 거리의 어둠 속에선 일상인 것처럼 폭력과 공포가 난무하고, 그것들이 악마처럼 고개를 휙 돌려 나를 발견하고 성큼 다가올 것만 같은 두려움에 빠진다. 마리아나 엔리케스는 늘 그 지점을 잘 포착해낸다. 저주받은 마녀의 집처럼 낯설고 비현실적인 공간을 내가 사는 안락한 공간 위로 살며시 포갠다. 비현실은 현실이 되고 공포는 일상이 된다.


수록작 모두 다른 빛을 내는 다이아몬드 원석 같은 재미를 안겨다 줬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수록작은 '돌아온 아이들'과 표제작인 '침대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위험하다'이다. '돌아온 아이들'은 수록작 중 서사가 가장 잘 짜인 중편이었다. 표제작 '침대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위험하다'는 짧지만 현대 여성의 건조한 일상을 소름끼치도록 절묘하게 묘사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다만, '우리가 불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에 비해 전체적으로 서사의 재미는 약했다. '우리가 불속에서~'는 서사의 완결, 호러적 재미가 좀 더 빼어났다면 '침대에서~'는 어딘지 담배 연기처럼 흐릿하고 모호하며 서사가 뚜렷하게 잡히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정서는 이것대로 좋았다. 


마리아나 엔리케스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피투성이가 된 소녀의 모습이 겹쳐진다. 누가 저 연약한 소녀를 피투성이로 만들었는가? 어쩌다가 세상은 이토록 썩은 냄새를 풍기는가? 틀림없이 무언가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잃어선 안되는 것을 잃어버렸기에 그 빈자리에 어둠이 차고 공포가 구더기처럼 들끓게 됐다.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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