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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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로봇 클라라는 운명처럼 만난 소녀 조시에게 선택되어 조시의 집 AF로 간다. AF는 인공 친구라는 뜻의 가정용 로봇을 의미한다. 근미래 자식들의 친구 겸 돌보미 겸 가정교사 역할까지 할 수 있는 AF는 부유층 사회에 널리 퍼진 인기 상품이다. 클라라는 조시의 친구가 되고자 무던히도 노력하지만 인간의 '외로움'에 관한 감성적인 접근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게다가 조시는 남다른 아픔을 지니고 있다. 클라라는 조용히 조시의 곁에 머물며 진정한 친구란 무엇인지 고민한다. 그런 한편 조시가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자 태양이 머무는 그곳, 헛간으로 향한다.


'나를 보내지 마'는 가즈오 이시구로가 노벨문학상을 받기 한참 전에 읽은 소설이다. 그때의 가슴 먹먹해지는 감동과 전율을 지금도 기억한다. 어마어마한 거장이라는 것을 그 한편으로 느낄 수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몇 년 후 그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신작 '클라라와 태양'은 작가 본인도 언급한 것처럼 '나를 보내지 마'와 비슷한 느낌의 작품이다. '나를 보내지 마'를 감명 깊게 읽은 독자라면 틀림없이 '클라라와 태양'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무엇보다 이 작가는 문장이 너무 좋다. 미문이나 화려한 비유에 기대지 않고, 인물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묘사하는 그 담백한 문장에 매료된다) 


처음에 이 소설을 펼쳤을 때는 다소 밋밋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2001년 영화 'A.I.'가 얼핏 겹쳐지기도 했다. 뭔가 특별난 게 없어 보였다. 그러나 나는 잊고 있었다. 이것이 가즈오 이시구로의 스타일이라는 것을. 그는 언제나 모든 것을 한꺼번에 확 펼쳐 보여주지 않는다. 조금씩, 독자가 작품 속 인물들에게 교감할 수 있도록, 그렇게 천천히 다음 이야기를, 그리고 다음 비밀을 풀어놓는다. 때문에 한참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작가가 만들어놓은 그물에 걸려들어 꼼짝도 못하게 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때부터는 무방비로 작품 속에 푹 빠져들 수밖에 없다. '클라라와 태양'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일상물처럼 여겨지던 소설이 조금씩 인물들이 품은 뜻밖의 사연과 그들을 단단히 묶은 채 돌아가는 비밀스러운 세계관으로까지 독자들을 바싹 끌어당긴다. 결국엔 또 한 번 가슴이 먹먹해지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클라라의 마지막 선택은 초지능을 가진 인공 로봇이라기엔 너무나도 인간적이었기에...!


소설 속에서 중요한 키워드가 두 개 등장한다. 하나는 '향상'이고 또 하나는 '태양'이다. 향상은 인간의 유전자를 우월하게 업그레이드하는 첨단 과학 의료 기술을 뜻하는 것이다. 부유층 집안의 아이들은 대부분 향상 과정을 거친다. 향상은 이른바 우성 인간인지 열성 인간인지를 아이 때부터 가르는 기준이다. 하지만 이 향상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신체가 거부반응을 일으킬 경우에는 불치병에 이를 수도 있다. 조시 역시 무리한 향상 과정을 통해 큰 병에 걸리고 만다. 소설 속에서 향상은 과학 기술, 문명 이기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그것과 정반대에 위치한 것이 태양이다. 


클라라는 기본적으로 태양열을 에너지로 작동한다. 태양은 클라라에게 생명의 원천이다. 클라라가 조시의 집에 가기 전에는 늘 쇼윈도에 진열되어 있었다. 그때 클라라는 창밖 도시 풍경에 매료되었다. 태양이 노랗게 품고 있는 그 거리. 생명과 과학 문명이 공존하는 세계. 클라라는 태양을 사랑했다. 그래서 태양을 막는 도시의 공해가 싫었다. 공해를 내뿜는 쿠팅스 기계가 싫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지점이 미묘했다. 클라라는 태양열로 움직이는 존재다. 그래서 태양을 좋아하고 공해를 싫어했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메커니즘의 문제였을까? 클라라는 자신이 의식하든 아니든- 태양이라는 자연을 사랑하고 쿠팅스 기계라는 문명에(거기에는 자신의 존재 또한 포함되는데도) 거부반응을 보인 것이다. 클라라는 과학 문명의 힘보다 태양의 힘을 믿는 아이였다.


책을 읽으며 가장 마음을 움직였던 부분은 역시 클라라가 헛간으로 가는 장면이었다. 왜 클라라가 그토록 그 헛간에 집착하는지, 도대체 헛간에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라라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헛간으로 향했다. 그리고 비로소 헛간에서 클라라가 하는 행동, 그 행위에는 과학적 논리적으로 절대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감수성'이 숨어 있었다. 그것은 현대 과학이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위치에서 태양처럼 따뜻하게 인간을 감싸 안아주는 위대한 힘의 본질적인 기운이었다. 우리는,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어른은 이미 그 기운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외면했다. 잊었다. 그래서 잃어버렸다. 인간을 완벽히 인간답게 만드는 그 힘을 인간은 모두 잃어버렸는데, 오히려 클라라는 알고 있었다. 그 어떤 현대 문명 기술로도 이룰 수 없는 기적과도 같은 힘이 무엇인지를!


이 소설은 SF로 시작해서 드라마와 스릴러, 공포, 판타지까지 모두 아우르며 동화적 감성으로 끝맺는다. 많은 작품으로 세계를 감동시킨 거장은 가슴 따뜻해지는 동화로 돌아와 삭막한 현대인의 가슴에 단비를 내린다. 책을 덮고 나도 클라라가 자꾸 떠오른다. 클라라는 너무나도 매력적이고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였다. 클라라는 순수한 마음을 간직한 아이였다. 태양이고, 엄마였다. 자식의 건강을 기원하는 엄마의 두 손에 흐르는 정화수였다. 믿음이 있어야 할 곳에 차가운 기계 문명이 꽉 들어차버린 현대인의 마음에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떠난 천사였다. 어째서 지구상의 모든 동물, 식물 그리고 로봇까지 알고 있는 진리를 인간만 모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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