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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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하지도 않은 여학생이 연주회 초대장을 보내온다. 초대장의 주소대로 찾아가 보니 그곳은 언덕 위 외딴 집. 인기척이 없는 그곳의 녹슨 철문은 굳게 닫혀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다. 초인종을 눌러도 침묵뿐! 어둠이 내리고 발걸음을 돌리는데, 언덕 밑에서 이상한 노인이 다가와 말한다. 자네는, 중심이 여러 개 있으면서 둘레를 갖지 않는 원을 떠올릴 수 있겠나?


하루키의 소설을 꽤 읽은 편이지만 솔직히 스토리가 기억나는 작품은 거의 없다. 그의 책에는 일목요연한 스토리가 없기 때문이다. 뚜렷한 주제도 없다. 그래서 작품의 의미를 느끼기가 힘들다. 소소한 이야기 같으면서도 뭘 말하고자 하는지 통 알 수 없다. 그래도 한때 하루키의 마력에 푹 빠져 열렬히 그의 책을 탐독했다. 첫 시작은 군 복무 시절 읽은 '태엽 감는 새' 1권이었다. 낯설고 어렵지만 소설의 신세계를 경험하는 듯한 재미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하루키에 조금 질려 있다. 너무 똑같은 얘길 미사여구만 바꿔서 우려먹는 기분이 든다. 듣기 좋은 노래도 한두 번이지 그의 소설에는 지속적으로 야구, 재즈, 클래식, 팝, 술, 여자, 성- 이런 것들이 반복된다. 좋게 말하면 사랑의 고독, 현대인의 자아성찰 등으로 읽을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작가가 소설을 통해 투영하는 중년 남자의 성적 판타지 같기도 하다. 그런 것에 너무 오래도록 집착한다는 느낌마저 들며 그의 소설이 지리멸렬해졌다. 늙어가는 작가가 자신의 로망을 소설로 채우려는 몸부림처럼 여겨진다. 소설 속에선 젊음도, 여자도, 성적 유희도, 이지적인 자아도 언제든 소환할 수 있으니. 


실제로 '일인칭 단수'는 작가가 일부러 메타 소설적 분위기로 엮으며 소설 주인공을 자신과 동일하게 봐주길 바란다. 마치 실제로 겪은 에세이를 기술하듯이. 물론 이것이 작가의 교묘한 노림수일 수도 있다. 앞서 비판을 조금 했지만, 역시 하루키가 녹록지 않은 작가라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지적인 분위기에 대한 판타지는 중년 남성들의 로망이기도 하며, 작가는 일부러 그것을 드러내 보이면서 스스로에게(혹은 그런 로망을 품은 중년 남자들에게) 역습의 펀치를 날린다. 이 책은 총 8편의 단편으로 구성됐는데 7편은 일본 문예지에 실린 작품들이고, 마지막 한 편인 '일인칭 단수'만 새로 추가해서 엮은 것이다. 이 마지막 한편이 작가의 통렬한 노림수였다. 어째서인지는 꼭 책을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하루키 소설은 잘 읽히지만, 결코 쉬운 소설은 아니다. 이번 소설은 대체로 하루키 입문자용으로는 적절하니 하루키에 도전하고 싶은 독자라면 좋은 독서가 될 수 있다.


제목이 뜻하는 일인칭 단수란 '개인의 시점'을 말하는 것이리라. 개인의 시점은 좁을 수밖에 없고 그것으로 타인을, 세상을 다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심지어 그 시점만으로는 자신을 다 이해하기도 힘들다. 세상은 모든 일인칭 시점들이 모이고 부딪치고 교류하며 형성되는 곳이다. 삼인칭 복수의 시점으로 삶을 볼 수 있다면 모든 정답이 한눈에 들어올 테지만, 인간에게 그런 전능은 없기에 일인칭 단수의 시점으로 삶의 단편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다. 하루키가 늘 자아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테다. 자아 깊숙이 들어가다보면 그 속에서 우주를 발견하고, 그 우주의 시선으로 다시 나를, 세상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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