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완
오승호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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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과 백, 선의와 악의가 피처럼 흩뿌려진 그날, 진실은 실종됐다.


한 여학생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소녀. 소녀는 자신을 괴롭히는 여학생이 죽이고 싶을 만큼 밉다. 어느 날, 그 여학생이 소녀를 대형 쇼핑몰 스완으로 부른다. 소녀가 스완에 도착하고 곧바로 사건이 터진다. 두 테러범이 스완으로 들어와 무차별 살상을 가한다. 살기 위해 도망치는 이들의 아우성, 총성, 그리고 순식간에 피로 물든 스완. 한 테러범이 스완의 스카이라운지로 들어선다. 그곳에 소녀가 있다. 남자는 소녀에게 총구를 겨누며 말한다. 네가 골라, 다음으로 죽일 사람을... 그리고 총성, 피, 신음소리가 이어진다. 그 순간 소녀의 눈에 자신을 괴롭힌 그 여학생이 눈에 들어온다. 다음은 저 아이 차례야. 테러범이 그렇게 말하며 총구를 겨눈다. 


데뷔작 '도덕의 시간'으로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하며 천재 작가로 떠오른 오승호, 일본 이름 고 가쓰히로. 재일 3세인 그는 다른 재일 작가와는 달리 정체성 문제나 국가관을 다룬 소설은 쓰지 않는다. 그는 국가나 인종을 초월한 '인간의 본성'을 날카롭게 해부하는 소설을 써서 문단의 극찬을 받고 있다. 일본 추리작가협회상과 요시카와 에이지 신인상을 동시 수상한 '스완' 역시 끔찍한 테러사건 이후 남겨진 이들의 불안과 공포, 그리고 '인간의 이중성'을 탁월한 필치로 그려낸 수작이다.


소설은 두 테러범이 쇼핑몰에 들이닥쳐 수십 명을 무차별 학살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놀라운 것은 이 오프닝 학살씬이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 그리고 결말의 진실까지 모두 담고 있는 복선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피범벅의 오프닝이 지나면 한 인물이 마련한 수수께끼 같은 모임으로 이어진다. 이 모임은 스완 사건의 생존자 중 다섯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을 초대한 인물은 그들과 함께 그날 사건의 '사실'들을 재구성한다. 


제목이 뜻하는 스완은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 이야기와 닿아 있다. 백조와 흑조, 오데뜨와 오딜, 선과 악- 세상은 언제나 모든 것을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누길 원한다. 거의 강박에 가깝다. 이를테면 건물 하나가 무너진다. 수십명의 사상자가 나온다. 부실 건물 설이 불거지고, 이내 사회는 안전 불감증에 대한 공포에 휩싸인다. 내가 사는 아파트도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공포! 희생자들에 대한 동정과 일이 그렇게 된 것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 혼란의 단계가 지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마녀사냥. 군중은 자신들에게 닥친 불안과 공포를 풀어낼 '대상자'를 찾기 마련이다. 누군가에게 비난의 돌팔매를 하고, 누군가는 그 팔매질에 피투성이가 되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그들은 날선 모순의 질문만 던져댄다. 넌 흑이야, 백이야? 


어째서 '우리편 아니면 적', '흑 아니면 백'으로만 모든 것을 제단하려는 걸까? 세상에는 다양한 인간이 존재하고 인간의 마음은 흑백이 아닌 그라데이션에 가깝다. 뒤통수에 총구가 겨눠진 소녀에게 어떤 선택지가 있었을까? 무턱대고 '넌 그때 이렇게 했어야 최선이었잖아!'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뒤통수에 총구가 겨눠지지 않은 이들이 그렇게 편안하게 결과론만 따질 자격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중은 진실이 아닌 오직 '흑과 백'만을 원한다. 작가는 이러한 군중 심리가 만들어낸 괴물 같은 사회를 보여준다.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은 그 괴물 같은 사회의 먹잇감이 되어 다시 피투성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소설은 전체적으로 오프닝, 모임 전반부, 모임 후반부, 결말- 이렇게 네 등분으로 나누어지는데, 단숨에 빠져들게 만드는 오프닝을 지나 모임 전반부는 다소 지루하게 흘러간다. 그러나 모임 후반부부터 드러나는 진실 공방이 숨 가쁘게 책장을 넘기게 만든다. 그리고 대망의 라스트, 그 충격적인 결말과 가슴 먹먹해지는 에필로그는 잊을 수 없는 여운으로 각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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