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박물관
오가와 요코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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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제작 의뢰를 받고 외딴 마을로 간 남자는 그곳에서 괴팍한 성격의 노파와 어린 소녀를 만난다. 노파는 죽은 이의 유품으로 가득 찬 박물관을 원한다. 남자는 노파의 집에 머물며 병이나 사고로 죽은 마을 사람들의 유품을 훔치는 일을 한다. 그리고 때를 같이해서 조용한 마을엔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과연 그들은 원하는 침묵 박물관을 만들 수 있을까? 때로는 무수히 쏟아지는 말들 속에서 내 모습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소음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내 영혼이 너덜너덜해지고, 존재감이 사라지는 듯한 기분. 그럴 때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면, 오롯이 나를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침묵의 의미는 뭘까? 


'임신 캘린더', '박사가 사랑한 수식', '미나의 행진'등 오가와 요코의 소설은 간간이 챙겨보는 편인데, 지금껏 읽은 작품은 다 좋았다. '침묵 박물관'은 '박사~'나 '미나~'보다는 '임신 캘린더'와 분위기가 비슷한 작품이다. 조용히 흐르는 서사 속에 인간의 속마음을 해부하는 듯한 서늘한 감각이 녹아있다. 담담한 문체와 뚜렷한 플롯 없이 전개되는 서사 기법은 하루키 소설의 느낌도 난다.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남다른 시선이 행간에 넘쳐나는 것, 가독성이 뛰어난 것도 닮았다. 하루키와 다른 점은 응집력의 차이다. 하루키는 뭔가 인물이나 스토리가 저절로 끝까지 가버리도록 내버려 두는 타입이라면, 오가와 요코는 결국 그 모든 서사와 정서를 주제의 끈으로 강렬하게 묶어낸다.


세상의 끝에 존재하는 듯한 마을, 그 마을을 한 번도 벗어나지 않은 노파와 소녀, 묵언으로 수행하는 침묵 전도사, 그리고 겉으로 보기엔 지극히 단조로운 일상을 파고드는 폭탄 테러와 연쇄살인. 소설은 삶을 담담하게 관조하는 듯하지만 곳곳에서 죽음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죽은 이가 남긴 물건을 전시하는 박물관을 만들고자 하는 노파와 건축 기사의 이야기는 죽음이나 끝이 아닌, 죽음 이후의 계속되는 '스토리'를 말하고 있다. 


침묵이란 뭘까? 침묵은 '존재의 부재'가 아니다. 소설 속 침묵 전도사는 말을 절대로 하지 않지만 누군가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은 허용한다. 때문에 침묵은 나에게로 쏟아지는 세상의 이야기다. 몰랐던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러므로 죽음 역시 '존재의 끝'이 아니다. 삶과 죽음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로 연결된 고리다. 라스트의 섬뜩하면서도 몽환적인 반전은 이 기묘한 소설 속 세계의 주제를 더욱 증폭시킨다. 작가는 죽은 이의 유품을 통해 침묵 너머의 삶까지 인간의 의식을 확장시킨다. 건축 기사는 노파의 뜻을 받들어 죽은 이를 기억할만한 물건을 훔치고, 그 물건에 새로이 스토리를 만들어간다. 


침묵 박물관의 의미는 여기에 있다. 유품을 마주하는 이들이 있기에 '죽음 이후에도' 이야기는 언제까지고 이어진다. 반대로 산 사람은 유품이 자신에게 얘기하는 것을 듣게 된다. 죽음은 삶에게 삶은 죽음에게- 서로가 서로에게 침묵으로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침묵이란 뭘까? 그것은 나를 잃어버리지 않는 자세이고, 삶 전체를 관조하는 시선이다. 그러니 아무리 바쁘고, 말의 홍수 같은 일상에 시달려도- 가끔은 눈을 감고, 입을 닫고, 침묵의 속삭임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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