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가는 유가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은모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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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평범한 형제가 있다. 남들과 조금 다른 것이라면 일란성 쌍둥이라는 것. 그리고 조금 이상한 능력이 하나 있다는 것. 생일 하루만 통하는 능력. 그것은 하루동안 2시간마다 둘의 위치가 바뀐다는 것이다. 물리적 법칙을 무시하는 비현실적인 현상이긴 하지만 그것을 특별한 능력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우습다. 그저 둘의 위치가 바뀌는 것뿐이다. 초인적인 힘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눈에서 레이저가 나가는 것도 아니다. 동생이 있던 곳에 형이, 형이 있던 곳에 동생이- 그렇게 위치만 바뀔뿐, 그외 다른 것은 없다. 그정도로는 위기에 빠진 사람을 구하거나, 악당들로부터 세상을 구하는 슈퍼히어로가 될 순 없다


그래도 형제는 그 작은 능력이 즐거웠다. 아버지에게 지독한 학대를 당하며 고통스러운 어린시절 내내 그 '작은 기적'은 삶의 '작은 활력'이었다. 재미삼아 위치를 바꿔보고(물론 바뀌어지는 것이다. 선택 사항이 아닌, 강제 이동인 셈이다), 이런 저런 실험도 해보며 논다. 말 그대로 그 이상한 현상은 형제에게만 의미있는 놀이이고, 신이 부여한 지극히 사소한 선물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형제의 그 능력이 위기에 빠진 누군가를 구해준다. 학대와 냉대로 얼룩져 마음 속에 깊은 벽을 두르고 있던 형제는 그렇게 한 걸음을 내딛는다. 높고 커다란 벽을 부수고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그 작은 움직임이 기적같은 구원을 만든다.


이사카 고타로는 한때 동서를 토탈해서 가장 좋아하던 작가다. '러시 라이프'를 우연히 읽고, 감탄과 감동을 금하지 못해 이후 그의 전작품을 줄줄이 사서 읽었다. 놀랍게도 다 '걸작'이었다. 하지만 이후 미묘하게 작가의 작풍이 바뀌기 시작했다. 아마도 '골든 슬럼버'의 상업적 대성공 때문일까? 꽤 다작을 하던 작가가 과작을 하기 시작하더니, 초기 작품에서 느낀 스피디한 전개와 촘촘한 미스터리의 묘, 그리고 시원한 플롯이 흐릿해지며 읽는 재미가 점차 약해졌다. '화이트 래빗' 이후의 소설부터 예전의 명성을 되찾아갔다. 아무튼 이번 작품 '후가와 유가'는 작가의 초기 작풍으로 완전히 돌아온 작품이었다. 읽는 내내 '중력 삐에로''마왕'이 떠올랐다.(화성에서 살 생각인가도 살짝 떠오름)


이사카 고타로 소설의 특징은(전성기 시절의 특징이라 할 수 있지만) 이야기가 한 편의 '모험' 같다는 것이다. 이번 작품 '후가는 유가'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도 쌍둥이 형제의 모험을 다룬 한 편의 활극이다. 전작 같은 절묘한 미스터리의 묘는 없지만 읽는 내내 형제의 활극에 심장 박동이 함께 뛴다. 마음을 닫고 오직 둘이서만 교류하던 형제가 마침내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하고자 자신들의 능력을 발휘하는 대목에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통쾌함이 느껴진다. 그렇게 세상은 아주 조금씩 바뀔 수 있는 것을 작가는 말하고 있다. 남의 일인데 뭐- 하며 외면하면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역지지라고, 형제는 아픈 이들의 상처를 보며 자신들의 아픔을 떠올린다. 그렇게 타인과 교류하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바라보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고 움직인다. 비록 보잘 것 없는 능력이라고 해도, 움직이는 순간 세상은 어떤 식으로든 바뀐다. 눈에 보이지 않을만큼 좋아진다. 형제는 그것을 깨닫는다. 그 작은 움직임들이 모여 마침내 커다란 악도 처단할 수 있다는 정의의 진리를... 이사카 고타로를 모르는 독자라 해도 입문용으로 보기 더없이 좋은 소설이다. 소소한 능력만을 믿고, 나머지는 정의의 본질에 모든 것을 맡긴- 두 형제의 마지막 승부는 엄청난 긴장과 카타르시스, 그리고 뼛속 깊이 파고드는 진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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