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리가 정상이라면
야마시로 아사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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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후코와 머리 없는 닭, 이렇게 셋이서 산책을 나가기도 했다. 인적 없는 막다른 길을 골라 날개 달린 흰색 덩어리를 풀어놓는다. 비쩍 마른 후코는 입안에서 구슬을 달각, 도록 굴리면서 교타로를 따라 한들한들 걸었다. 후코에게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덧없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황량한 겨울 대지를 거니는 머리 없는 흰색 닭과 소녀는 마치 환영처럼 보이기도 했다.

 

책을 읽으며 가장 강렬하게 머릿속에 남은 문장이다. 그리고 이 문장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곧 소설 전체에 풍기는 분위기다. 어딘지 쓸쓸하고 애처롭고 몽환적이며 아련한 그리움이 감돈다. 야마시로 아사코- 오츠이치의 또다른 필명이다. 그러므로 그냥 오츠이치로 말하고 싶다. 이 작가 소설을 처음 접한 게 'ZOO'라는 소설집에 실린 단편 '세븐룸'이다. 그때의 충격과 공포, 비애, 강렬한 여운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얼마 전에 읽은 그의 또다른 소설집(혹은 엔솔로지?) '메리수를 죽이고'를 장르문학이 도달할 수 있는 정점이라 평했는데- 이 작품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은 거기서 더 올라간다. 정말 경이로운 작품이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신세계를 작가는 한뜸한뜸 유려한 문장으로 쌓아올려 마법처럼 펼쳐보인다. 확실히 이 작가는 천재다.

 

여덟 편의 소설이 실렸지만 모두 색깔이 다르다. 공포, 미스터리, 드라마, 스릴러, SF, 판타지까지... 장르는 다르지만 모든 작품에 서늘하고 차가운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묘한 것은 결국 이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분위기는 공포보단 '비애'다. 인간의 삶은 서글프다. 어째서 우리는 무수한 이별 앞에 놓여야 하고, 눈앞에서 죽어가는 앵무새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것일까? 인간은 나약하고 비겁하고 불완전하다. 그렇게 슬픔과 상처를 떠안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작가는 바로 그러한 '존재의 쓸쓸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수록작은 '머리 없는 닭, 밤을 헤매다', '아이의 얼굴',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 이렇게 세편이다. 이 세편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글의 분위기와 메시지가 정돈되는 느낌을 받았다. 상실과 비애, 죄악과 속죄, 고통과 희망,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을 감싸 안는 서글픈 그리움!

 

우리는 모두 커다란 어른 외투를 걸친 어린아이다. 아직 성장통을 견디는 중이고, 잔혹한 통과의례를 시험받는 중이다. 머리가 잘려나간 채로 움직이는 닭처럼 내 존재가 무엇인지, 무엇을 해야하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모르는 채 황량한 겨울 밤을 헤매고 있다. 이 기나긴 어둠의 터널이 지나면 그 끝엔 아스라한 희망이 어쩌면 우릴 기다려주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환청 같은 믿음을 가슴에 품고!

 

 

p.s. 수록작 중 '무전기'는 오츠이치의 전작 '메리수를 죽이면'에 수록된 '트랜시버'와 같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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