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얼굴의 여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5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비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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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도 깊은 곳에서 채탄 작업을 하던 광부 뒤로 뭔가가 스윽 다가온다. 검은 얼굴의 여우다. 놀란 광부가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살피니 진짜 여우가 아니라 여우 가면을 쓴 여자다. 하지만 새로이 공포가 밀려온다. 어째서 이토록 깊은 땅속에 저런 가면을 쓴 여자가 느닷없이 나타난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자가 천천히 가면을 벗는다. 하얀 피부의 아름다운 여자다. 여자는 광부의 일을 도와준다. 그렇게 둘은 날마다 땅속 깊은 곳에서 만나 채탄 작업을 한다. 어둠 속에서도 여자의 하얀 피부는 유난히 빛난다. 그러나- 그러한 나날이 길어질수록 광부는 알 수 없는 무기력증에 빠진다. 그리고 여자의 하얀 피부가 점점 시커멓게 변해간다. 도움을 줬으니... 대가를 치러야...

 

미쓰다 신조의 '검은 얼굴의 여우'는 패전 이후 일본 탄광에서 벌어지는 기묘하고도 무시무시한 참극을 다룬다. 지식인 청년 모토로이 하야타는 일본의 재건을 위해 뭐라도 하고 싶어 탄광 일에 뛰어든다. 그러나 탄광이 무너지는 대참사가 발생하고 그후 더 무시무시한 일들이 벌어진다. 밀실상태의 방안에서 광부들이 연이어 기묘한 모습으로 죽고, 그때마다 검은 얼굴의 여우가 출몰한다. 이것은 살인귀가 저지른 연쇄살인인가, 여우신이 내린 앙화인가?

 

무엇보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 징용과 그들이 받은 불평등과 폭력을 관찰자적인 입장으로 세세히 다룬다는 게 이번 소설의 특징이다. 작가는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반성해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한일 국민 모두 고통과 상처를 입었지만 그 모든 잘못은 침략국에게 있다. 검은 얼굴의 여우는 무엇일까? 그것은 전쟁으로 죽은 이들의 울분이고, 어둠 속에 갇혀 나올 수 없는 원귀들의 한이다. 과거의 악행은 결코 그냥 묻어지지 않는다. 책임감 있는 반성이 없다면 검은 얼굴의 여우는 언제라도 저 깊은 어둠 속에서 저벅저벅 걸어나와 피의 심판을 내릴 것이다.

 

마침 미묘한 시기에 출간한 '검은 얼굴의 여우'는 그래서 더 짙은 메시지를 던진다. 전쟁은 정치인이 일으킨다. 늘 그들이 문제다. 두 나라의 싸움은 두 나라 정치인들의 싸움이다. 그래서 이 책의 이 문장이 특히 의미심장했다. '설령 나라와 나라가 싸우고 있다고 해도 두 나라 국민끼리 서로 죽일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실은 그렇다. 두 나라의 국민은 서로 악의가 없다. 악의를 부추기는 것은 일부 비열한 정치인들의 간계다. 양국의 국민들은 그 우매한 함정에 빠져선 안 된다.

 

미쓰다 신조의 소설답게 심장이 얼어붙는 공포와 숨막히는 미스터리가 씨줄과 날줄로 엮이며 완벽한 괴담 추리소설을 만들어낸다.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불가해한 공포의 끝에 이르러 명쾌하게 풀어내는 논리적 추리의 쾌감이 압권이다. 특히 에필로그에서 밝혀지는 마지막 반전이 가슴을 때린다. 비극적 역사가 낳은 검은 얼굴의 여우는 종극에 이르면 무서움보다 처연함이 앞선다. 인간은 그토록이나 무섭고 잔인하며 또 나약하고 슬픈 존재다. 깊은 탄광 속에 갇혀 나갈 수 없는 여우의 피눈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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