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홍신 세계문학 13
레오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최경준 옮김 / 홍신문화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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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읽은 《안나 카레니나》이후 십년 뒤의 작품이다. 부활의 주인공 네흘류도프는 <안나 카레니나>의 주인공 레빈과 매우 흡사한 캐릭터이다. 레빈의 청교도적인 사고와 노동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모습이라든지 삶에 대한 애착, 도덕적인 신념들을 <부활>의 주인공 네흘류도프에게서도 똑같이 볼 수 있다. 이 주인공들을 통해 작품 전반에 흐르는 기독교적인 사상과 삶을 깨달아가는 과정들이 바로 ‘톨스토이주의’ 즉, 기독교적 아나키즘이라 평가하는 톨스토이의 사상적인 면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이런 ‘톨스토의주의’가 가장 잘 표현되어진 주인공이 바로 부활의 주인공 네흘류도프라 여겨진다.

 

고모 집에서 반은 하녀, 반은 양녀 같은 존재로 자란 카튜샤. 이런 어정쩡한 신분은 어린 카튜샤가 반은 상류사회, 반은 하류사회에 익숙하다는 말이다. 충분히 독립할 수 있음에도 고모 집을 떠나지 않았던 것도, 고모 집을 떠나서 하녀로서만 살아가기 싫었고, 나이가 차 혼담이 들어 올 때마다 하류층 사람들의 삶이 눈에 들어올 턱이 없었다. 그러던 중, 고모들의 조카 네흘류도프는 완벽하고 멋진 상류층 남자로 보이게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순수하고 깨끗한 그리고 도덕적인 청년이었던 네흘류도프는 카튜샤와 사랑에 빠지고 순전히 정신적인 사랑을 나눈다. 그 뒤 3년, 군대에 간 네흘류도프는 변해 있었다. 모든 훌륭한 일에는 자기의 생명도 돌보지 않을 정도로 순진하고 헌신적이었던 그는 몇 년의 군대생활로 자기의 쾌락만을 사랑하는 타락하고 세련된 이기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이 모든 무서운 변화가 그에게 생긴 것은 그가 스스로를 믿지 안하고 남을 믿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자기를 믿지 않고 남을 믿게 된 것은 자기를 믿으면서 산다는 것이 너무나도 괴롭기 때문이었다.-p71

 

 

이런 변화는 네흘류도프에게 정신적으로 깊은 사랑으로 연결되어지곤 하던 카튜샤를 쾌락의 도구로 삼으면서 타락해간다. 네흘류도프는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카튜샤를 범하지만, 이후 100루블을 전해주는 것으로 자신의 죄를 잊고 살게 되고 이후 카튜샤는 크나큰 불행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는데, 네흘류도프와의 하룻밤으로 카튜샤는 임신 하게 되고 몸이 무거워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고모들은 카튜샤를 쫓아낸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아이는 죽고 예쁘고 아름다웠던 카튜샤는 자연적인 수순을 밟아 유곽에 발을 들여놓게 되고 그곳에서 7년을 살았다. 타락한지, 8년이 되는 해에 카튜샤는 감옥에 들어가게 되는 사건으로 법정에 서게 되고 배심원으로 참여한 네흘류도프와 조우하게 된다.

 

 

카튜샤와 네흘류도프의 만남은 네흘류도프에게 커다란 정신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데 타락했던 영혼이자 대지주였던 네흘류도프를 순진하고 헌신적인 , 곧은 기질과 정열의 네흘류도프로 바뀌게 되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너무나 순결하고 아름다웠던 카튜샤가 자신이 첫날 밤 희롱하고 버린 인생의 잔인함을 카튜샤에게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네흘류도프에게 더욱 큰 죄책감과 고통을 준 것은 카튜샤에게 선고 된 ‘시베리아 유형’이라는 형벌이다. 이성적이었고 높은 신분의 네흘류도프는 고아였고 여자라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몰아가는 법의 이면으로 죄책감만이 아닌, 사회의 부조리한 모든 것에 대해 고통을 느낀다.

 

사냥터에서 상처 입은 새를 죽여버려야 할 때 경험하는 몸서리치고 불쌍하고 괴로운,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p98 

 

카튜샤가 시베리아 유형을 받은 날, 카튜샤는 세상의 모든 남자들을 증오하기 시작했다. 첫사랑 네흘류도프에게 버림받으며 이후 만난 모든 남자들이 자신을 쾌락의 상대로만 대했으며 남자들 모두 자신의 아름다움을 칭찬했건만, 자신을 모두 유죄라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 '남자'들이라는 사실에 그녀는 처음으로 환멸을 느낀다. 그런 그녀에게 매일 같이 찾아와 용서를 빌고 희생을 무릅쓰고 결혼하자고 졸라대는 네흘류도프를 따라 변화된 삶을 살게 되지만, 카튜샤에게 네흘류도프는 넘지 못하는 큰 벽이 있었다. 이후 네흘류도프와 카튜샤의 눈부신 내면의 변화가 일어난다.

 

《부활》의 주인공 네흘류도프는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보다 더욱 종교적이고 더욱 도덕적인 관점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이다. 또한 매우 영적이다. 톨스토이는 끊임없이 인간의 자아를 영적인 자아와  물질적인 자아로 나누어 두 자아가 네흘류도프의  내면 세계에서 치열하게 싸우며 선택해가는 과정을 밀도 있게 그려내고 있는데 이런 내면 심리에 대한 탁월한 서술방법은 '인간'의 자아와 욕망에 대해서 깊은 사유를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힘이 있다. 이런 두 개의 자아는 기독교적인 사상에 바탕을 둔 것으로 영혼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편으로는 네흘류도프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을 매우 인상적으로 느꼈는데 ‘Cogito’(나는 생각한다)라는 데카르트의 근대적 세계관이 아닌  ‘우리는 생각한다’라는 세계관을 <부활>에서도 발견하게 되었다. 오로지 인간만이 유일한 세계상이 아닌 각자의 세계로터 우리의 공통세계를 함께 만들어나간다는 ‘Cogitamus’ 세계관을 부활의 주인공에게서 발견하게 될 줄은 몰랐다. 바로 이 부분 ' 이 세상 모든 것은 생명이 있으며 생명이 없는 것은 없다. 우리가 생명 없는 무기물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물체는 우리가 꿰뚫어 볼 수 없는 거대한 유기체의 한 단위인 사람의 사명은 이 유기체와 모든 살아있는 생명을 지켜나가는 데 있다.(p529) 이런 행위의 중심에 카튜샤와 네흘류도프가 있다. 이기적이었던 대지주 네흘류도프가 회개한 후 이웃에게 희생하며 삶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모습과 카튜샤가 7년동안 화려하게 치장하며 타락해가는 모습보다 고난과 노동에 길들여지며 이웃에게 봉사한 2개월을 더욱 보람되고 가치있게 여기는 모습에서 이들 중심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이었는지를 떠올려보는 시간들이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모든 것’만 찾고 있다. 그러므로 발견될 까닭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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