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벤구르 을유세계문학전집 57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지음, 윤영순 옮김 / 을유문화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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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심해에서 사는 생물들을 촬영한 다큐멘타리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생명의 황홀감에 빠져들었다. 바닷 속 깊은 곳에 살아있는 생명체들이 살기위해 펼치는 저 나름대로의 생존법에 감탄을 하며 보았다.  바닷 속 깊은 심해에 사는 생물들은 조개껍데기를 이용해 몸을 보호할 줄 알았고 때로는 위장술을 펼치기도 하며 나름의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생물들은 오로지 살기 위해 생존했다. 오로지 인간만이 죽기 위해 생을 포기한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교만함으로 인류문명을 이루어 왔지만, 만물중에서 생을 포기하는 것은 오로지 인간밖에 없다. 생물들을 보면서 왜 유물론이 떠올랐는지는 모르지만, 이제까지의 교만을 버리고 아주 작은 생물들에게서 생명의 소중함을 배우는 것처럼, 우리에게 자연과 물질에게서 배우는 겸손함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하는 생각에 더욱 조그마한 생물체들이 경이로워 보였다. 이 책 《체벤구르》를 처음 본 순간 그런 유물론의 가치가  떠오른 것은 ‘소비에트 유토피아 문학의 정수’라는 소개글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점점 잊혀지고 있는 공산주의의 이념인 유물론은 최근 읽은 책들에서 느끼는 공통점과 연결되어 있어서이다.  그것은 바로 세계의 중심이 '인간'이 아닌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말하는 '사물의 흐름'을 인지하라는 말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과거 많은 지도자들이 그리고 현재 명망높은  철학자들이 여전히 이구동성으로 가장 이상적이고도 완벽한 사상으로 보고 있는 이유를 바로 이 책《체벤구르》를 읽으면서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개미나 모기 정도의 지혜만 주어졌다라도, 가난하지 않도록 삶을 단번에 구축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 사소한 생물들은 우애로운 생활을 하는 위대한 기술자들이다. 인간이 개미와 같은 장인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

 

 

소설의 시작은 자하르 파블로비치라는 장인의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자하르 파블로비치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물건을 나무로 만든다. 농기구나 가정용 기구, 하다못해 프라이팬까지 나무로 만들었는데 자하르 파블로비치가 타고난 장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에게서 배운 것이 아닌 오롯이 자연의 산물이다. 자하르 파블로비치는 태어나면서 홀로 자연과 공생하면서 살았으며 자연을 통해 모든 것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자하르 파블로비치가 자연을 느끼는 방법과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이 바로 유물론적 사고라는 것은 자하르 파블로비치가 바로 공산주의 이념을 가장 잘 표현해내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하르 파블로비치를 보면서 내가 그동안 이해했던 유물론적 사고가 단단히 잘못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실제로 현대인들은 죽었다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환경이리라...그런  자하르 파블로비치는 자연의 법칙으로 세상을 본다.

 

그는 사심 없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기질에서 나오는 노동이 언젠가 오직 돈 하나만을 위한 것이 될 때, 그때 세계의 종말이 오리라 믿었다. 아니 심지어, 종말보다도 더 나쁜 것이다. 마지막 기술자가 죽은 후에는 태양의 식물들을 먹어 치우고, 기술자의 제품들을 망가뜨리기 위해 최후의 악당들만이 살아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p78

 

그리고 또 한명의 유물론자 사샤 드바노프가 있다. 아버지가 죽자 고아가 된 사샤는 자식이 많은 집 드바노프의 양자로 들어가지만, 가난과 기근으로 입에 풀칠하기가 힘들어지지 드바노프의 큰아들 프로샤에게 쫓겨난다. 심지어 프로샤는  마을에서  우연히 만난 자하르 파블로비치에게 1루블을 주고 사샤를 판다. 

 

"왜 인간은 악하든 선하든 그저 그런데, 기계는 그토록 훌륭한 것일까요?

 

 

스승은 인간의 지혜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기계 스스로의 희망에 따라서 기계가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인간들은 여기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p64

 

자하르 파블로비치의 양자로 들어간 사샤 이바노프는 양부에게서 그러한 기질을 그대로 물려받는다. 아니 사샤는 아버지가 죽음을 동경하여 바다에 빠져 들었던 그 시점부터 자연을 이해해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늙음과  생生이 주는 어쩔 수 없는 슬픔과 비애로 자하르 파블로비치는 자신의 전부처럼 사랑한 양아들 샤사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혁명가로 만든다.  양아버지의 권유로 볼세비키당에 입당한 사샤는 그렇게 러시아에 요동치는 혁명의 물결에 참여하게 되고, 공산주의의 가장 이상적인 유토피아 마을 ‘체벤구르’에 다다르게  된다.

 

드바노프는 체벤구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드바노프는 이전에도 이 작은 마을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는데, 왜 그런지 그 단어는 미지의 나라의 매혹적인 울림을 닮아 있었다.

 

이렇게 안드레이 플라토노프는 공산주의의 가장 이상적인 , 그리고 완벽한 나라를 소설 속에서 구현해 내었다. 요동치던 시대 ,혁명의 시대속에서 느꼈을 법한 사회적인 혼란이 체벤구르의 주인공들에게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노동계급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지독하고 암담한 현실을 살아가야 했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숙명과 자연과 공명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믿음을 혁명으로 완성해가고자 몸부림치는 사샤 드바노프를 통해 나는 새로운 유토피아 세상을 보았다. 유물론이라는 것이 예전에는 물질만능주의 쯤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주인공 자하르 파블로비치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삶을 터득해가는 과정, 기계를 아름다움으로 보는 감격의 순간들을 통해 참된 유물론을  배울 수 있었다. 굳히 표현하자면,  자연의 흐름을 나와 일치해가는 과정과 같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듯이, 타인과 나와의 경계가 없는 곳, 경쟁이 필요없는 곳, 살아가기 위해 공생해야 하는 유토피아의 세계, 그러나, 체벤구르는 영원히 유토피아로만 존재하는 곳이라는 것. 

 

덧 ; 소설을 집필할 당시 소련은 공산주의가 스탈린주의적 관료 국가로 변질되고 있었다. 그런 시대에 진정한 공산주의 이념을 담은 체벤구르는 금지당했다. 60년이 지나서야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는데 이미 공산주의는 몰락해가고 있는 중이었다. 읽은 뒤의 소감은 공산주의가 왜 가장 완벽한 사상인지를 알 수 있게 되어 기쁜 책이었지만, 서글픔이 남는 것은 이제 어쩌면 공산주의는 회생불가가 아닌가 하는 씁쓸함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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