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로라 리프먼 지음, 홍현숙 옮김 / 레드박스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친근하다면 근사한 말이겠지만, 과거 자신을 납치했던 남자가 “나는 네가 어디 있든지 널 알아볼 수 있어.” 라는 편지를 보내왔다면,  그 불쾌함과 공포를 어떻게 견딜수 있을까. 처음 이 책을 보면서 추리소설이라 생각했는데 굳이 분류하자면 심리 스릴러이다. 사건보다는 주인공의 심리에 치중하여 전개하고 있고,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액자식 구성이다. 소녀 엘리자베스가 납치 당하던 열 다섯 살의 그 날과 현재  서른 여덞의 나이이며  두 아이를 둔 엄마인 엘리자의 이야기가 과거-현재-과거-현재를 넘나든다.

 

 

 

 이 소설의 모티브는 작가가 수많은 여성을 강간하고 살해했는데 딱 한 사람만을 살려둔 실화가 발단이 되었다. 살아남은 희생자의 삶이란 어떤 삶일까 하는, 호기심으로 시작되었지만, 결국은 현 사형제도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져준다. 여전히 사형제도에 존폐에 대해서 갑론을박이 오가고 있지만, 이 책은 사형제도를 찬성이나 반대가 아닌, 그 자체에 대한 물음이다. 비유하자면, 포스트모던 비평의 한 지점인 교차모순의 지점처럼 , 이것도 저것도 아니지만 상당히 문제적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실에 다가가 미학적으로 형상화 하였다.  

 

열 다섯,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납치된 한 여자. 엘리자베스와 잘생겼지만, 키가 작아 열등감을 가지고 있던 월터. 월터가 한 여자를 죽이고 길가에 파묻고 있을 때, 그 장면을 다 봤을 것이라 생각하고 엘리자베스를 태워 다니게 되면서 이 둘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자신의 몫으로 나온 달걀을 힘겹게 삼키느라 애쓰고 있는 이 소녀의 어떤 면이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이 여자애는 나 같아.'

월터는 속으로 생각했다. 온순하고 상냥한데다 최선을 다하지만, 사람들은 이 애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세월이 흘러, 엘리자베스에서 엘리자로 살아가고 있으며 사랑스런 아들과 딸, 남편 피터와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중산층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엘리자에게 월터로부터 도착한 편지는 엘리자를 다시 과거 엘리자베스로 돌려놓는다. 엘리자가 되어도 매일밤 찾아오는 살해당하였던 소녀들과 월터에게 납치되어 함께한 기억으로 엘리자는 다시 고통의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다행히  남편 피터는 단 한 마디로 위로를 하는 재주가 있었다.

 

“우린 왜 번개가 하필이면 그곳을 쳤는지 머리 싸매고 고민하지 않잖아.”

 

 게다가 희생자 중에 유일한 생존자라는 이유로 엘리자는 마지막 희생자의 어머니였던 홀리의 어머니 트루디에게는 따가운 눈총을 받고 ,  

 

‘왜 당신 아이들은 모두 살아 있는 거지? 당신이 이렇게 특별한 이유가 뭐야?“

 

인권 운동가인 바버라 라포투니는 월터가 오랜 종신형 끝에 사형을 선도받자 월터를 구명하기 위해 엘리자를 이용하려 한다.

 

바버라가 분개하는 것은 바로 엘리자의 .......... 평온함이었다.

 

소위 인권운동가라 하는 사람이 성폭행범이자 수많은 소녀들을 살해했는데 단지 '과거'라는 이유로 '현재'의  월터를 구하기 위해서  유리한 증언을 해달라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게 아닌가 싶다. 희생자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엘리자는 이렇듯 여러 사람과 싸워야 했다. 그리고 이 모습이 바로 사회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으며,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는 곳이 우리가 매순간을 생활하고 부딪혀야 하는 사회라는 곳이다.

 

사형제도를 두고 갑론을박은 여전하다. 하지만, 소설을 통해 사형제도에 얽혀있는 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표현하는 작가의 섬세한 필치는 놀라우리만치 섬세하다.  소설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사람이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바버라가 월터를 위해 구명운동을 하지만, 바버라는 월터를 완전히 이해했을까. 그리고 그런 행동이 생존자인 엘리자를 고통스럽게 한다는 사실을 몰랐고,  어여쁜 딸 홀리를 잃은 엄마의 마음을 엘리자는 이해할 수 없었기에 희생자 엄마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제러드라는 작가는 보이는 것이 진실이라는 듯, 엘리자와 월터를 사랑하는 사이로 소설을 쓴다. 결국 그것이 보이지 않는 폭력과 다름없다는 것을 ,  이들 모두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이렇듯 소설에 등장하는 어떤 누구도 서로를 이해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을 위해서 이해하는 척 할 뿐이다.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이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해 나가고 있지만, 소설 그 이면에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심리 상태까지 유추해볼 수 있도록 생생하게 묘사가 진행된다. 그리고 인간이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많이 저지르는 오류가 합리화라는 이름으로 ,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는 존재임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납치당하여 극적으로 구조되었지만, 엘리자를 기다리는 무수한 가해자들처럼, 우리가 매일 선善이라는 이름으로 아무 생각없이 저지르게 되는 사소한 무례함과 불친절을 떠올려보면 알게 모르게 우리는  모두 피해자이자 가해자인지도 모르겠다. 말그대로 이것도 저것도 아니지만 상당히 문제적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실을  미학적으로 형상화 시킨 소설이다. 우리는 그  교차모순 지점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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