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주 목사의 대학 중용 읽기
이현주 지음 / 삼인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동양철학을 지배하는 사유방식은 유기체적 자연관’이. 나는 이 말이 참 좋다. 서양의 기계론적 자연관은 서양에 과학혁명을 일으키게 하는 사상이 되었지만, 서양의 사유체계는 이미 인간이 아닌 과학에 의존하는 딜레마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양의 사상은 여전이 인간이 중심이다. 유기체라는 말자체가 어느 한 부분의 변화가 전체의 변화를 낳을 수 있고 , 전체의 변화가 모든 부분의 변화를 낳을 수 있기에 동양의 철학은 모두 유기체로 연결되어 있다. <이현주 목사의 대학중용읽기> 이 책에서도 그런 동양의 유기체적 자연관을 바탕으로 노자,공자,예수의 사상이 유기적임을 말하고 있다. <대학><중용><논어><맹자>를 사서로 칭하여 유교적 근본사상으로 송나라 때에는 무조건 읽어야했다. 대부분의 대학,중용,논어,맹자에 대한 책들은 주석으로 한자원문과 저자의 해석을 실어놓는 구성이지만, 이 책은 목사인 저자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동양철학과 접목시켜 중심인 예수를 바라보고 있다. 저자는 중심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 통하기 때문이고 나의 예수는 그 중심에 계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大學之道대학지도는 在明明德재명명덕이라.” 대학을 공부하는 목적은 를 투명하게 비워 빛 가운데 빛으로 존재토록 하는 데 있다는 말이. 저자는 명명덕을 천하에다 하면 평천하자기 나라에다 하면 치국자기 집안에 하면 수신이라 말하는데 결국 모든 것의 중심은 수신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 하다. 나를 투명하게 비우는 것, 이것이 대학의 바탕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주 현상은 헤아릴 수 없이 복잡다단하지만 그 모든 것을 그렇게 존재하는 원리는 단순 소박한데 오직 한가지 중심으로 들어가보면 세상은 단 하나의 원리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대학의 모든 가르침의 기본은 수신修身이다.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수신(자신의 몸을 닦는 일)이 먼저이다. 수신이라는 기둥에 격물,치지,성의,정심이라는 뿌리가 있고 그 위에 제가 , 치국, 평천하라는 가지와 열매가 대학이라는 나무인 것이다.

 

 

모든 물이 현상에서는 각양각색으로 복잡다단하지만 중심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단순 소박해지다가 마침내 핵에 이르면 단 하나의 원리로 수렴된다. 예수는 그 원리를 일러 사랑의 원리라고 한다. 사랑에서 만물이 생겨나고 사랑으로 만물이 돌아간다. 요한은 그 사랑을 하느님이란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대학 5장의 격물치지格物致知 는 공자의 일이관지와 一以貫之 유기적으로 연결됨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중용과도 맞닿아있는 사상이기도 하다. 여기서 나는 동양철학을 유기체적 자연관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확실히 느끼게 되었는데 모든 앎이라는 것은 같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이 문심을 알고 혜두가 열려야 진정한 공부라고 하였듯이 슬기 구멍이 열리는 것을 이라고 표현한다면, 학문을 함에 있어서 앎이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스스로 아는 사람이 있고, 배워서 아는 사람이 있고 많은 고생 끝에 아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앎을 이루고 보면 그 셋이 모든 같다는 것이 공자의 말이자, 격물치지이다.

 

()이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지지 않으며, 지나침도 미치지 못함도 없는 것(不偏不倚無過不及)을 일컫는 것이고, ()이란 떳떳함平常을 뜻하는 것이라고 주희는 설명하였고, 정자(程子)는 기울어지지 않는 것不偏을 중이라 하고 바꾸어지지 않는 것不易을 용이라 하였다. 저자는 을 알고 용을 알면 이 책을 다 읽은 셈이라고 한다. 하지만 , 늘 생각하건데 중용이 가장 어렵다.   어울리면서 휩쓸리지 않는다. (화이불류)라는 말처럼 어울리되 한통속이 되지 않고 소인은 그와 반대로 한통속이면서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요즘 어지러운 정치판을 보며 정치인들이 중용의 의미를 떠올려봤으면 싶다. 군자는 서로 조화를 이루어 살면서도 각자 개성을 유지하고 중심에 서서 어디에도 기울지 않는다( 中立而不倚)고 하였다. 정당은 서로 헐뜯고 같은 정강정책아래 당원이면서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며 실망감을 감출 길이 없다.

 

대학편은 다소 건조하고 딱딱한 느낌이 들어 쉬이 읽혀지지 않지만, 중용편에 들어서는 깊이가 더 한 느낌이다. 대학보다는 아무래도 중용편이 더 수신에 가까워서인지도 모르겠다. 수신, 자신의 몸을 닦는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러나, 최근 들어 혼란한 정치, 사회를 바라보며 개인적으로는 모두 수신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신을 하다보면 중심이 생기고 그 중심으로 가지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다시 가슴에 새기는 시간이었다.

 

눈앞에 있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다가오는 것들을

다가오는 그대로 맞아들이기

 

떠나가는 것들을

떠나가는 그대로 떠나보내기

 

얼마나 쉬운 일인가?

,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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