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 이야기 1부 - 그 여름날의 기억
박건웅 지음, 정은용 원작 / 새만화책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선물로 만화책을 받고 엄청 좋아했는데... 만화책 치고는 엄청 두껍다. 그러나 만화라고 결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한국전쟁 당시에 양민학살을 가감하게 드러낸 만화였고 노근리사건은 반세기 동안이나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던 슬픈 기억이자 아픈 상처였다. 그러나 노근리사건 피해자와 유족들의 불굴의 의지로 사건의 실체가 세상에 드러났고, 끈질긴 노력의 결과로 1994년 2월 대한민국 국회에서 노근리 특별법이 제정되었으며, 이제는 전쟁인권과 평화의 대명사가 되었다. 수묵기법으로 그려진 이 만화책은 생존 피해자들의 이야기와 더불어 다큐형식으로 서술되며 적절한 은유와 묘사, 회화적인 만화다. 1권은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대통령은 한강다리를 폭파시킨채 피난하고 절대 피신하지 말라는 남아서 서울을 지키라는 스피커만이 공허하게 울리는 서울에서 차마 다리를 건너지 못했던 사람들이 피난길에 오르게 되면서 노근리 학살까지의 과정이다.

그러나 피난민들을 노근리 쌍굴에 가두어놓고 무차별 학살을 감행 할 줄 몰랐던 사람들은 너무도 처참히 죽어갔다. 십분 이십분의 간격으로 기관총을 쏘고 굴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총을 맞아 죽었고 굴 안에는 시체가 산을 이루어도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무더운 여름 날씨에 시체들은 산을 이루고 부풀어 시체와 엉겨붙은 피에서 나는 악취와 배고픔도 견디기 힘들었지만 더 힘들었던 것은 갈증이었다.

후에 조사에 의해서 미군에 의해 피난민 학살된 사건은 노근리 외에도 여러 건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 그들이 자행한 비무장 인디언 학살사건....

1864년 샌드 크릭 대학살.

1890년 운디드니 대학살.

당시 인디언 학살에 참여한 부대가 바로 제 7기병대였다.

제 7기갑연대는 영문으로 7th Cavalry Reginent로 표기하는데,

원래대로 번역하면 제 7기병대이다.

그런데 미군 역사에서 기병대를 지칭하던 Cavalry가 살아남아 , 지금은 기갑부대의 의미로 상요되고 있다. 이 제 7 기병대가 12년전에는 인디언을 학살했고 , 50년 전에는 노근리에서 우리 부모형제들을 도살하듯 학살한 것이다.


[노근리 이야기] 2권은 ‘끝나지 않은 전쟁’에 대한 기록이다.한국 전쟁(6.25전쟁) 발발 1개월 후인 1950년 7월 25일부터 7월 29일까지 만 4일간, 대한민국 충청북도 영동군 하가리와 노근리 일대에서 참전 미군에 의해 발생한 피난민 대량 학살 사건은 당시 미 제1 기갑사단과 인근 미 제25 보병사단에는 피난민 속에 적군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이유로, 전선을 통과하는 모든 피난민을 ‘적으로 간주’해 총격을 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지금까지 AP 통신 기자나 미 국방성 조사반에게 미군이 노근리에서 미간인을 공격한 사실을 증언한 참전 미군은 확인된 사람만 25명에 이른다. 1950년 노근리 사건 발생 직후, [조선인민보]는 사망자만 약 400명에 이른다고 보도한 바 있다. 하지만, 사건 발생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정확한 피해 규모를 파악하기란 불가능한 실정이다. 노근리 사건은 노근리 미군 양민 학살 사건 대책위원회의 활동과 AP 보도(2000년 퓰리처상 수상-탐사보도 부문)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났으며, 한국 전쟁 중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의 구체적인 경우로 꼽히고 있다.

노근리 사건은 한국인 전체의 역사 인식의 문제이며 나아가 온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과 평화의 문제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0년의 세월이 흘렀다. 현재 젊은 세대의 한국전쟁에 대한 인식은 그 이전 세대와 다르다. 전쟁으로 인해 남과 북 모두 많은 인명 피해와 경제적 손실을 입었고, 이러한 전쟁은 남북을 막론하고 정당화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노근리 사건을 통해 하나 알게 된 것은 그러한 과거를 통해 지구촌에서 또 한번 이런 학살이 자행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언제 쯤이면 이 땅에 평화가 찾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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