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그것은 나의 부동항이다. 일 년 중 절반이 항구가 얼어붙어 출항하지 못하는 배의 심정을 아는가? 나는 모른다. 아마 외교사 가르치시는 전홍찬 교수님도 모르시겠지. 하여튼 답답했을 거다. 그래서 그 옛날 바닷길이 모두 얼어붙어 욕구불만의 세월을 겪었던 러시아 제국의 짜르는 약소민족을 두들겨 패면서 역사적 히스토리, 아니 히스테리를 부렸다고 한다. , 나는 히스테리가 없어서 다행이다. 더 옛날 창세기의 모세는 에굽에서 유민들을 탈출시키며 홍해를 갈랐다고 한다. 나는 스물여섯 먹고 꼴랑 일본에 가는 거라서, 그런 멋은 나지 않는다. 이건 조금 아쉽네. 폼 나게 살고 싶은 게 내 꿈인데.

 


물리학의 관성의 법칙은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때를 놓치면 늘 힘이 든다. 남들 갈 때 대학을 가고, 남들 입대할 때 따라가는 편이 여러모로 안전하며, 하다못해 중박은 치는 평탄한 선택지인 것이다. 사회적 시계는 늘 어설프게 철저하다. 어쩌겠는가. 나는 삼수를 했고, 군대를 미뤘다. 애초부터 직선도로가 없었기에 돌아갔다. 지나간 것을 탓할 수는 없다. 달리기가 빨라서 다행이다. 뭐 하여간, 이십대 초반의 두근거리는 호기심과 열정으로 덜컥 여행권을 샀다면, 지금쯤 심리적 빙벽 같은 건 없었을 것인데, 기껏 현해탄 너머 일본 가면서 살짝 쿵 쫄리는 이 마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역시 사람은 세월이 겹쳐질수록 보수적으로 변한다더니, 놓쳐버린 때가 사람을 더 큰 겁쟁이로 만든다. 일본 온천에서 묵은 때를 잔뜩 밀고 올 것이다. 



나는 여행이 초래하는 인생의 우발사태를 좋아한다. 두 번째 수능이 끝나고 부산에 놀러 갔고, 그것이 아예 부산에 터를 잡고 살게 만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부산대를 졸업했고 내친김에 대학원까지 들어갔다. 틈틈이 여기저기를 싸고 경제적으로 다녀왔다. 강원도 산간 오지에서 차를 놓쳐 친구들과 덜덜 떨며 노숙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제주도가 부지런한 나의 한계였다. 제주는 정말 맛있고 아름다운 섬이었지만 나의 심리적 마지노선을 철옹성처럼 굳게 지켰던 곳이었다. 할아버지 세대가 경주로, 어머니 세대가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갔듯이, 그 시대의 한계치 같은 그런 곳이 있지 않는가. 나의 급발진은 여기서 멈춘 듯 했다. 그래서 속이 답답했다.

 


부산에 있으면서도 국경을 넘으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이와 체중과 함께 덩달아 늘어가는 생활비와 소비습관의 맹렬한 공세에 방어전을 치르던 나는 번번이 공항 문턱에서 돌아서야 했다. 내가 진 장남의 등짐은 매번 공항 수하물의 무게 한도를 초과해버린 것이다. 없을 땐 없어서 못 갔고, 있을 땐 무서워서 못 갔다. ‘아 이 돈이면 6개월을 놀면서 학교 다닐 수 있는데.’ 유물론의 벽을 넘으면, 관념론의 덫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일본에 간다. 이곳에 가기 위해 대학원을 그냥 쉬어버렸다. 휴학하면 장학금 하나가 끊기는데, 그 출혈을 인생의 수업료라 생각해야지 별수 있나. 참고로 이건 깨알 틈새 자랑인데, 나는 지난 학기에 장학금을 다섯 개를 받아서 학교 한도를 초과했다. 하하하.

 


나는 분명 느리고 더디지만 성장하고 있다. 내 성장판은 아직도 많이 열려있다. 나는 이 주문을 내 마음속에 주입하기 위해, 전 재산을 털어 때를 놓쳐 복잡해진 여권을 만들고, 항공권과 숙박을 구했다. 사실 하마터면 이것도 어영부영 기다리다 생활비로 다 까먹어 못 갈 뻔했다. 원래 돈이라는 게 두루마리 휴지 같아서, 처음엔 막 써도 닳지 않다가 어느 순간 심에 힘겹게 엉겨 붙은 빈약한 쪼가리만 보이기 마련이다. 지갑사정의 휴지심이 보이기 전에 남은 돈을 다 털어버렸다. 모조리 탕진하고 새로 출발할 것이다. 그러면 내가 좋아하는 록 밴드의 이름처럼, 나는 부활할 것이다.

 


새내기 때 서른이 되기 전엔 꼭 이루고 싶은 숙원사업을 세 가지 정했더랬다. 하나는 몸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스물두 살에 고강도 육체노동으로 이뤘는데, 유지하지 못해 초기화의 아픔을 겪고 있다. 사진이나 찍어둘걸. 두 번째는 책을 내는 것이다. 일상 에세이 한 권, 또 고전에서 찾은 정직한 생각들을 추려낸 교양 인문학 도서 한 권을 쓰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자력으로 해외여행을 가는 것이었다. 남자인생은 서른부터다. 뒤는 나도 모르겠다. 원래 사람은 자기의 하찮은 선택에 늘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며 자기 멋대로 사는 것이다. 바다는 얼어도 하늘은 얼지 않는다. 4일 남았다. 굿바이.

 

 

-2017.12.07

@PrismMaker

※본 에세이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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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7 17: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7 2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munsun09 2017-12-07 17: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쓴이의 심적 변화와 상황들이 잘 들어옵니다. 제 30년 넘는 독서이력??
으로 평한다는 오만속에 님 글이 좋아요.
더불어 일본여행 잘다녀오세요^^

프리즘메이커 2017-12-07 22:16   좋아요 1 | URL
제 글을 좋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일본도 잘 다녀오겠습니다 ㅎㅎ

syo 2017-12-07 1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동안 프메님의 글을 볼 수 없는 건가요? 아니겠죠?

다녀오시면 더 멋진 글들을 만날 수 있겠군요. 기대합니다^^

프리즘메이커 2017-12-07 22:16   좋아요 0 | URL
잠깐 재충전 좀 하고 다시 필봉을 빛내보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밀레니엄 (문학동네) 1
스티그 라르손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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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발굴단


         본 코너에서는 제가 읽은 책에서 발견한 좋은 문장들을 기록합니다.

왜 선정했는지 뭐가 좋았는지에 관한 제 의견이나 코멘트를 따로 덧붙이지 않고,

단순하게 기록에만 집중합니다. 제가 추려낸 부분이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특히 그가 재계의 늑대들을 혐오하는 이유가 급진적인 좌익사상 때문이 아니라고 말한 부분에서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미카엘은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은 아니었어도 정치적 '이즘'은 극도로 불신했다. p.81

그는 동료 기자들을 경멸했고, 그 경멸은 인간의 기본적 윤리만큼이나 명백한 진실들에 기반했다. 그가 보기에 등식은 간단했다. 터무니없는 투기로 수백만 크로나를 날린 은행 이사는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안된다. 사욕을 채우려고 유령회사를 만든 CEO는 감옥에 가야 한다. 마당에 공용 화장실을 놓고 비좁은 원룸을 학생들에게 임대하면서 세금까지 떼먹으려고 월세 영수증을 발행해주지 않는 악덕 집주인은 죄인 공시대에 매달아놔야 한다.  p.82

"내 생에 이십오 년, 혹은 삼십 년은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로 하랄드 같은 인간들을 용서하며 보냈네. 그러고 나서 깨달았지. 혈연이 사랑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하랄드 같은 인간을 변호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도." p. 163

"난 노예를 고용한게 아니네." p.166

"세상에는 이런 자들이 깔렸지. 나도 숱하게 겪었다네. 충고 하자면, 이런 자들이 떠들 땐 그냥 내버려두게. 잘 기억해뒀다가 나중에 기회가 있을 때 빚을 갚아주면 되니까. 하지만 지금처럼 날뛰며 공격할 때는 참아야 하네" p. 188


"사는 동안 내겐 수많은 적이 있었지. 그 속에서 한 가지 배운 게 있어. 패배가 확실하면 싸우지 마라. 하지만 나를 모욕한 자는 절대 그냥 보내지 마라. 묵묵히 기다리다가 힘이 생기면 반격하라. 더이상 반격할 필요가 없어졌다 할지라도." p.188

지금껏 누구도 그녀에게 의견을 물은 적이 없었다 p. 193


빌어먹을 놈아! 열 살 때부터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했어! p.198

"싸우자는 게 아니에요. 항상 그런 개자식들에게 어떻게라도 정상을 참작해주려 애쓰는 꼴들이 한심할 따름이죠" p. 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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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눈이 왔다. 

흡연자 직원들이 담배를 피우러 나간 사이, 

나도 좀 쉴 겸 눈 사람 하나를 몰래 만들었다.

 

 

수학을 싫어하는 해로운 '문돌이'도 머리를 싸매고 계산기를 두드려야 할 때가 있다. 빈약한 통장 잔고로 다가올 미래를 생각할 때, 요즘 같은 마무리의 계절이 1년 치 성찰을 강요할 때가 그렇다. 나는 경제관념이 투철한 김생민 씨처럼 꼼꼼한 계산과 '스튜핏! 그뤠잇!'의 상벌체계를 갖추진 않았더라도, 기초산수로 잘 궁리하면서 나름의 재무계획을 짜곤 한다. 돈이 없으면 원래 머리라도 잘 굴려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알뜰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전해 내려오는 삶의 비법이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나의 경험과 주변의 삶에 관한 관찰을 종합한, 심리묘사가 주를 이루는 '극사실주의 팩션(Faction)'이다. 이 의식의 흐름이 청춘이 당면한 삶을 이해하는 데 조금의 도움이 되길 바란다.

 


대학가는 물가가 싸다. 더 멀리 나가지 않기로 한다. 넉넉잡아 칠천 원짜리 밥을 하루 두 끼만 먹는다. 이젠 10대가 아니니, 하루 세끼 다 챙겨 먹으면 살이 찐다. 아침에 한잔, 점심 먹고 한잔. 천 원짜리 아메리카노를 하루 두 잔 사 먹는다. 쿠폰은 반드시 받기로 한다. 나 하루 만 육천 원씩, 달에 48만 원을 먹어 치우는구나. 등록금은 짬짬이 공부해서 장학금으로 퉁치기로 한다. 거주지는 임대료가 무료인(그러나 마음의 빚과 눈치가 복리로 쌓이는) 부모님의 집을 이용하기로 하자. 여기에 휴대전화 요금이 달에 6만 원. 교통비가 10만 원. 옷은 가성비 좋은 스파 브랜드의 기본템 위주로, 한 달에 위아래 합쳐 한 벌씩만 3만원. 아니 살아 숨 쉬는 의식주 비용만 벌써 67만 원이 필요하다.

 


까짓것 벌어보기로 한다. 팔다리 멀쩡하고 젊으니까, 시간이 남아봐야 놀기밖에 더 하겠나. 아직 뭘 해야 할지 뭘 하고 싶은지 잘 모른다. 어차피 흘러갈 시간, 돈으로 바꿔놓는 게 최선이겠지. 이미 부모님에겐 신세를 지고 있지만, 협상력을 발휘해 내친김에 부모님께 교통비와 전화 요금만 대신 내달라고 부탁한다. 그럼 51만 원. 다행히 내년도 최저시급이 많이 올랐다. 7,530. 그 정도면 주말을 투자해 충당할 수 있다. ·일 하루 9시간씩 일하면, 54만 원. 3만 원이나 남는다. 이 돈이면 울적할 때 치킨 한 마리, 매달 미용실에서 컷트 한번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알바 소개하는 어플리케이션을 깐다. 학교 커뮤니티에 구인란을 뒤적거린다. 아르바이트 자리가 괜찮은 게 없다. 이 돈 주고 그렇게나 부려먹겠다고? 그럴 거면 정직원을 채용해야지, 무슨 알바를 쓰나. 6개월 1년씩 일하는 게 직원이지 아르바이트인가? 이것저것 재고 따지니까 할 일이 별로 없다. 다들 양심 불량이다. . 아니다. 나 말고도 일할 사람 많구나. 갑자기 자기 주제를 단번에 깨닫는다. 울며 겨자 먹기로 몇 군데 면접을 본다. 겨우 얻은 알바, 사람 불편하게 만들고 잘릴지도 모르니 주휴수당 그런 거는 머릿속에서 잊기로 한다. 이 정도는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다고 배웠다. 어떠한 난관도 청춘의 긍정은 이겨낼 것이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착각하지 말자. 나는 직장인이 아니다. 학생이다. 학생의 본업은 공부다. 아르바이트는 생활비 때문에 하는 것이다. 남는 시간에 공부해야 한다. 이왕이면 남들보다 잘 해야 한다. 좋은 직장과 풍족한 미래를 위해서는 투자가 필요하다. 투자금을 융통해야 한다. 학원비부터 토익시험 응시비가 도통 비싼 게 아니다. 뭐 토플은 30만 원이나 한다고? 최대한 소비를 줄인다. 시간은 고정되어 있으니, 더 일에 체력과 시간을 빼앗길 수 없다. 부모님께 한 번 더 굽혀본다. 마법의 '엄마 카드', 그 화수분 같은 힘을 한 번만 더 믿어보기로 한다. 그 대신 친구나 선후배 관계 따위, 다 유지비만 잡아먹는 거추장스러운 것들이다. 안 만들고 돈을 아낀다.

 


외롭다. 벚꽃이 피고 바다가 어른거리며 단풍이 들고 눈이 온다. 춘하추동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괴로운 계절이다. 그렇게 피했는데도 사람인 이상 사랑에 빠지고야 만다면 어떡할까. 부모님께 계속 손 벌리는 것도 찜찜한데, 그 돈으로 연애까지 하다니. 불효가 막심하다. 커피값이고 밥값이고 예산이 1.5배가 뛰어버린다. 사랑하는 사이에 분위기도 내고 좀 해야 하니까. 누가 사랑에 마음이 전부라고 했는가. 구애에서부터 사랑은 매번 증명하는 것이다. 기념일이 다가온다. 선물을 사야 한다. 진도는 브레이크를 모르고 앞서간다. 놀이공원이나 모텔이라도 갈 적엔 큰 출혈을 감수해야 한다. 심지어 콘돔마저 비싸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좋은데 별수 있을까.

 


몽상을 멈추고 주판을 다시 굴려본다. 아무래도 연애를 하려면 유지비 견적이 나오질 않는다. 견적이 안 나오면 구애도 하지 않는다. 그게 비용이 저렴하다. 우리에겐 위험을 감수할 돈이 없으니까. 구조적 실업이 있듯, 구조적 독신이 있는 것이다. 숨 쉬는 비용으로 70에 육박하는 돈을 쓰고, 연애를 시작하면 돈 백이 필요하다. 공부하고 일하고 놀고 미래를 준비하면서, 그것까지 어떻게 감당하랴. 20대는 그렇게 혼자 살아간다. 정치의식이 없고, 패기가 없으며, 사회성이 부족한 20대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아르바이트를 빼먹으면서 데모할 청년은 더는 이 땅에 살지 않는다. 밥을 굶으면서 사당오락의 신화를 써 내려갈 혈기도 이제는 옛일이다. 나름대로 젊은 세대는 사력을 다해 버티고 있다. 버티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무다. 더 이상 위대한 헌신과 고상한 동기를 요구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온갖 담론으로 분칠해도, 청춘의 맨 얼굴은 아마 이것과 가까울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도 별 수 없다. 청춘의 대표를 자처하며, 또 좌파 이데올로기적 충동에서 시작한 정의감이 충만한 글이 아니었다. 그냥 나는 돈이 급하다. 그런데 오마이 뉴스에서 원고료 5만 원 출금 제한을 걸어 놨다. ‘빨리 몇 개 더 써서 반드시 고료를 타내고야 말 것이다!’ 라고 다짐하던 찰나, 기사채택에서 까였다. 아씨.. 마지막 문장은 삭제하는 편이 좋았나?



-2017.12.05 

@Prism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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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할아버지와 사촌동생. 

할아버지께서는 평생 고기를 낚으셨다. 

가만히 꼬마 동생이 서툴게 낚시하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고 계신다.

할아버지게서는 어떠한 원칙으로 평생을 살아가셨을까?

20년전 품안에 있던 손자는 비로소 그것이 궁금해졌다.






1. 증상


 


만사가 귀찮다. 겨울이면 늘 이렇다. 사회적으로 늘 하이텐션의 핏대를 자랑하는 나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저혈압의 모계유전을 따랐다. 혈압이 낮으니 피가 늦게 돈다. 잠이 깨는 아침에 특히 피가 덜 돈다. 의식과 육신의 기상 시간이 늘 다르다. 항상 몸이 지각한다. 피가 몸에 도는 속도가 느리니, 덩달아 몸도 늦게 데워진다. 루피는 기어 세컨드 쓰면 금방 피가 끓던데, 나는 그게 잘 안 된다. 추위를 많이 타고, 피가 모자라는 발끝은 특히 차다. 정신은 뜨거운 심장을 가졌는데, 생물학적으로 냉혈한인 셈이다.

 


그래서 나는 아침에 늘 정신이 탁하다. 여름이건 겨울이건 자발적으로 예열되지 않는 몸뚱이를 덥히기 위해선, 온수 샤워를 해야 한다. 샤워기는 수압이 셀수록, 물은 약간 뜨거운 게 좋다. 더러움과 피로가 씻기며 활력이 돋는 느낌이다. 겨울이 싫다. 신체 리듬과 생활패턴이 다 야행성에 맞춰져 있다. 축구도 공부도 글도 다 한밤중에 잘 된다. 아니 아예 집중이라는 것은 밤에만 된다. 낮엔 피로와 싸우고 산만함과 싸워야 한다. 오늘도 낮 시간을 버렸다. 따지고 보면 난 20대의 대부분을 이렇게 살아왔다. 누가 시킨 것도 처벌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이렇게 살아왔다. ‘아침형 인간좋다는 부추김에, 그렇게 살고자 노력했지만, 저혈압의 굴레를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 에라 그냥 되는대로 살기로 했다.

 




2. 진단

 


세상에 내가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이다. 수십 년을 살아온 한 인격체의 해묵은 습속을 어떻게 일격에 개조할 수 있을까. 만난 지 10분 만에 하나님의 뜻을 설파하고 주입하려는 뭇 기독교인들의 전도가 대부분 성과가 없듯, 생각은 개종하거나 회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살아온 수십 년의 사고방식은 단숨에 혁명적으로 바꿀 수 없다. 이것을 인정해야 하는 데, 그때의 나는 이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여전히 잘되지 않고 어렵기만 하다. 살붙이고 산 내 어머니도, 내 동생도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게. 원래 세상의 이치고 인간의 한계인 것이다. 나조차 나를 바꾸지 못하니까.

 


생각이라는 것은 천천히 스며들고 물들어 가는 것이다.’ 내 색깔을 유지하며 옆에서 바르게 사는 것만으로도 제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그 이상은 오지랖이다. 한두 번의 대화나 논쟁으로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그 사람 주변에 유의미한, 그러면서도 본인과 다른 선택지로 버텨주는 것이 역시 최선이다.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다. 자기만의 경험에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로운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불교에서도 그것은 열반이나 해탈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보통 사람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인 것이다. 나는 잠정적으로결론을 내렸다.

 

 




3. 처방

 


영원히 비범한 사람도, 영원히 평범한 사람도 없다. 내가 한번 이겼으면, 언젠간 나는 한 번 질 것이다. 여러 차원에서 이기고 지고를 주고받는 것이 동등한 관계다. 항상 이기거나 항상 지는 관계라면, 필시 그것은 장기 말을 부리는 사람 같은 지배-복종을 전제하고 있다. 그래서 나의 고민은 동등한 관계에 지속성에 관한 물음이다. 또한, 어떻게 사람을, 또 나 자신을 대할지에 관한 원칙이기도 하다. 솔직히 나도 글이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다. 이렇게 자문자답을 길게 하는 것도 어쩌면 재능이고 어쩌면 병리 현상이 아닐까.

 

여하튼 한 분야에서 조금 두각을 드러냈을 때, 그래서 몇몇 호의와 칭찬이 너무 쉽게 얻어질 때, 사람은 쉬이 교만해지고 자기객관화와 자기교정 능력은 둔해진다. 자신의 비범함에 취해 평범한 다수를 부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비범함과 평범함은 사실 태양이 비추는 순간의 각도 차이다. 그것을 영원이라 착각하는 것에서 나는 인간관계의 비극이 찾아온다고 생각한다.

 


내가 되니까 너도 할 수 있다.’ ‘내가 해봐서 아는 데따위는 상담이 아니고 공감도 아니고 조언도 아니다. 그냥 자기 자랑이다. 잘 되면 자기 덕이고, 못되면 나는 되던데.’ 하고 끝나는 그런 조언은 악이라고 생각한다. 안 그래도 힘든 사람, 남은 자존감까지 갈취해서 자기를 높이려는 얄팍한 기만에 불과하다. 사람의 마음에는 글로 미뤄 알 수 없는 수많은 속사정이 녹아있다. 거짓공감으론 마음을 살 수 없다. 그래서 이런 돌팔이를 만난다면, 나는 내 인생을 묻지 않기로 한다.

 

유능하다는 이미지를 갖는 사람은 보통 게을러지는 경우가 잦다. ‘나는 너희가 하지 못하는 큰 기획을 했으니 디테일은 알아서 하라.’는 하나 마나한 말이다. 악마와 천사는 모두 디테일에 숨어있는 걸 어쩌겠나. 그 용의 눈알을 찍는 마지막 붓은 디테일인 걸. 디테일은 성실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게으른 자가 경쟁에 임할 경우는 적에게 제거되지만, 협력에 임할 경우는 동료에게 쫓겨난다는 것을 명심하기로 한다. 선민의식은 늘 나를 좀 먹는다.

 

오늘의 긴급함을 위해 미래를 약속하는 버릇, ‘~된다면 ~를 주겠다.’ 따위의 영어식 조건절을 입버릇처럼 하는 사람을 피하기로 한다. 공수표를 남발하다 보면 인간관계에도 파산이 있다. 사람이 사람을 떠나는 것은 그 사람이 힘이 없거나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치게 만들어 서다. 만일, 그 사람을 믿고 싶거든 말이 아니라 행동의 교환을 살피도록 한다. ‘행동의 등가만이 관계에 지속성을 부여한다. 동등한 행동을 책임질 수 없다면 부추기지도 말아야 한다.


스물일곱이 되기까지 채 한 달도 남지 않았다. 대학 시절 처음 스물일곱의 학교 선배를 봤을 때, ‘뭔 저런 아저씨가 있어?’ 하고 놀랬더랬다. 그러던 내가 그 나이에 들어섰다. 나는 그때 보다 확실히 피가 식었다. 점점 자기 분수를 알고 그 선을 넘지 않고 기다리는 것도 꽤나 큰 미덕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자기 분수의 무거움, 책임감의 압박. 뜨거운 심장을 가진 생물학적 냉혈한은 오늘도 1인분을 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1인분하기가 이렇게나 어려운지를 체감하고 있다. 글의 절반만이라도 살아보고 싶다고 시린 발의 사내가 밤기운을 받아 나에게 편지를 쓴다. 나이 먹기 싫다. 굿밤.

 

 

-2017.12.02 

@PrismMaker 

 

 ※ 본 에세이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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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dla2189 2017-12-02 23: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멋진 사진. 멋진 글. 멋진 삶.

프리즘메이커 2017-12-03 19:23   좋아요 1 | URL
밍 ㅠㅠ

2017-12-03 0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3 1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2-03 11: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내년이 스물여덟이라면.. 아직은 괜찮습니다.. ㅎㅎㅎ

프리즘메이커 2017-12-03 19:23   좋아요 1 | URL
ㅋㅋㅋ 스물일곱인데 글을 잘못 썼습니다 ㅠㅠ ㅋㅋ
 
플라이, 대디, 플라이 더 좀비스 시리즈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문장 발굴단


         본 코너에서는 제가 읽은 책에서 발견한 좋은 문장들을 기록합니다.

왜 선정했는지 뭐가 좋았는지에 관한 제 의견이나 코멘트를 따로 덧붙이지 않고,

단순하게 기록에만 집중합니다. 제가 추려낸 부분이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상대 학생은 장래가 창창한 젊은이입니다. 물론, 따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간단히 말해 애정싸움이지요. 그런 일 때문에 두 젊은이의 장래를 망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특히, 따님의 이미지에 상처를 입힐지도 모릅니다." p.31

누군가에게 지시받은 대사를 그냥 읊어대는 듯한 어투였다. 그 순간 내가 느낀 것은 분노라기보다는 짙은 피로였다.  p.32

"자신의 인생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겠지. 애석하게도 말이야. 고작 자신의 반경 1미터 정도만 생각하고 태평하게 살다가 죽으면 행복할 텐데 말이야." p.85

"그냥 숫자만 채우려 하면 안 돼. 상상을 하면서 움직여. 우리는 인간이지 기계가 아냐!" p.111

"우리는 시험문제를 잘 풀지 못한다는 단 하나만의 이유로 쭉정이 취급을 당해요. 우리가 어떤 인간성을 가지고 있는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거죠. 간단히 시험을 쳐서 그 결과로 인간을 분류하고 레테르를 붙이고 알기 쉽게 한 곳에 모아서 관리하려는 게 기분 나빠요." pp.117-118

저기에 맞으면 어떻게 될까?

아냐, 생각을 하지 말자. 맞으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자.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건 긴장을 풀고, 눈앞의 사태를 받아들이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다. p.147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공포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p.154


"폭력에는 정의도 없고 악도 없는 거야. 폭력은 그냥 폭력일 뿐이야. 그리고 사람에게 휘두르는 폭력은 반드시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어."


"되돌아온 폭력을 다시 되돌려주려고 폭력을 휘둘러. 그런 반복이야. 그러므로 폭력의 사슬에 휘말려 들고 싶지 않다면, 가능한 한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이긴 다음, 폭력세계에서 산뜻하게 도망치는 거야. 그리고……." p.159


그리고 불안이나 고뇌가 없는 인간은 노력하지 않는 인간일 뿐이야. 정말 강해지고 싶으면 고독이나 불안, 고뇌를 물리치는 방법을 상상하고, 배워보는 거야. 자기 힘으로. "높은 곳에 는 타인의 힘으로 올라가서는 안된다. 남의 등에 머리를 올려서는 안 된다."

"누구?"

"니체."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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