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눈이 왔다. 

흡연자 직원들이 담배를 피우러 나간 사이, 

나도 좀 쉴 겸 눈 사람 하나를 몰래 만들었다.

 

 

수학을 싫어하는 해로운 '문돌이'도 머리를 싸매고 계산기를 두드려야 할 때가 있다. 빈약한 통장 잔고로 다가올 미래를 생각할 때, 요즘 같은 마무리의 계절이 1년 치 성찰을 강요할 때가 그렇다. 나는 경제관념이 투철한 김생민 씨처럼 꼼꼼한 계산과 '스튜핏! 그뤠잇!'의 상벌체계를 갖추진 않았더라도, 기초산수로 잘 궁리하면서 나름의 재무계획을 짜곤 한다. 돈이 없으면 원래 머리라도 잘 굴려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알뜰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전해 내려오는 삶의 비법이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나의 경험과 주변의 삶에 관한 관찰을 종합한, 심리묘사가 주를 이루는 '극사실주의 팩션(Faction)'이다. 이 의식의 흐름이 청춘이 당면한 삶을 이해하는 데 조금의 도움이 되길 바란다.

 


대학가는 물가가 싸다. 더 멀리 나가지 않기로 한다. 넉넉잡아 칠천 원짜리 밥을 하루 두 끼만 먹는다. 이젠 10대가 아니니, 하루 세끼 다 챙겨 먹으면 살이 찐다. 아침에 한잔, 점심 먹고 한잔. 천 원짜리 아메리카노를 하루 두 잔 사 먹는다. 쿠폰은 반드시 받기로 한다. 나 하루 만 육천 원씩, 달에 48만 원을 먹어 치우는구나. 등록금은 짬짬이 공부해서 장학금으로 퉁치기로 한다. 거주지는 임대료가 무료인(그러나 마음의 빚과 눈치가 복리로 쌓이는) 부모님의 집을 이용하기로 하자. 여기에 휴대전화 요금이 달에 6만 원. 교통비가 10만 원. 옷은 가성비 좋은 스파 브랜드의 기본템 위주로, 한 달에 위아래 합쳐 한 벌씩만 3만원. 아니 살아 숨 쉬는 의식주 비용만 벌써 67만 원이 필요하다.

 


까짓것 벌어보기로 한다. 팔다리 멀쩡하고 젊으니까, 시간이 남아봐야 놀기밖에 더 하겠나. 아직 뭘 해야 할지 뭘 하고 싶은지 잘 모른다. 어차피 흘러갈 시간, 돈으로 바꿔놓는 게 최선이겠지. 이미 부모님에겐 신세를 지고 있지만, 협상력을 발휘해 내친김에 부모님께 교통비와 전화 요금만 대신 내달라고 부탁한다. 그럼 51만 원. 다행히 내년도 최저시급이 많이 올랐다. 7,530. 그 정도면 주말을 투자해 충당할 수 있다. ·일 하루 9시간씩 일하면, 54만 원. 3만 원이나 남는다. 이 돈이면 울적할 때 치킨 한 마리, 매달 미용실에서 컷트 한번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알바 소개하는 어플리케이션을 깐다. 학교 커뮤니티에 구인란을 뒤적거린다. 아르바이트 자리가 괜찮은 게 없다. 이 돈 주고 그렇게나 부려먹겠다고? 그럴 거면 정직원을 채용해야지, 무슨 알바를 쓰나. 6개월 1년씩 일하는 게 직원이지 아르바이트인가? 이것저것 재고 따지니까 할 일이 별로 없다. 다들 양심 불량이다. . 아니다. 나 말고도 일할 사람 많구나. 갑자기 자기 주제를 단번에 깨닫는다. 울며 겨자 먹기로 몇 군데 면접을 본다. 겨우 얻은 알바, 사람 불편하게 만들고 잘릴지도 모르니 주휴수당 그런 거는 머릿속에서 잊기로 한다. 이 정도는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다고 배웠다. 어떠한 난관도 청춘의 긍정은 이겨낼 것이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착각하지 말자. 나는 직장인이 아니다. 학생이다. 학생의 본업은 공부다. 아르바이트는 생활비 때문에 하는 것이다. 남는 시간에 공부해야 한다. 이왕이면 남들보다 잘 해야 한다. 좋은 직장과 풍족한 미래를 위해서는 투자가 필요하다. 투자금을 융통해야 한다. 학원비부터 토익시험 응시비가 도통 비싼 게 아니다. 뭐 토플은 30만 원이나 한다고? 최대한 소비를 줄인다. 시간은 고정되어 있으니, 더 일에 체력과 시간을 빼앗길 수 없다. 부모님께 한 번 더 굽혀본다. 마법의 '엄마 카드', 그 화수분 같은 힘을 한 번만 더 믿어보기로 한다. 그 대신 친구나 선후배 관계 따위, 다 유지비만 잡아먹는 거추장스러운 것들이다. 안 만들고 돈을 아낀다.

 


외롭다. 벚꽃이 피고 바다가 어른거리며 단풍이 들고 눈이 온다. 춘하추동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괴로운 계절이다. 그렇게 피했는데도 사람인 이상 사랑에 빠지고야 만다면 어떡할까. 부모님께 계속 손 벌리는 것도 찜찜한데, 그 돈으로 연애까지 하다니. 불효가 막심하다. 커피값이고 밥값이고 예산이 1.5배가 뛰어버린다. 사랑하는 사이에 분위기도 내고 좀 해야 하니까. 누가 사랑에 마음이 전부라고 했는가. 구애에서부터 사랑은 매번 증명하는 것이다. 기념일이 다가온다. 선물을 사야 한다. 진도는 브레이크를 모르고 앞서간다. 놀이공원이나 모텔이라도 갈 적엔 큰 출혈을 감수해야 한다. 심지어 콘돔마저 비싸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좋은데 별수 있을까.

 


몽상을 멈추고 주판을 다시 굴려본다. 아무래도 연애를 하려면 유지비 견적이 나오질 않는다. 견적이 안 나오면 구애도 하지 않는다. 그게 비용이 저렴하다. 우리에겐 위험을 감수할 돈이 없으니까. 구조적 실업이 있듯, 구조적 독신이 있는 것이다. 숨 쉬는 비용으로 70에 육박하는 돈을 쓰고, 연애를 시작하면 돈 백이 필요하다. 공부하고 일하고 놀고 미래를 준비하면서, 그것까지 어떻게 감당하랴. 20대는 그렇게 혼자 살아간다. 정치의식이 없고, 패기가 없으며, 사회성이 부족한 20대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아르바이트를 빼먹으면서 데모할 청년은 더는 이 땅에 살지 않는다. 밥을 굶으면서 사당오락의 신화를 써 내려갈 혈기도 이제는 옛일이다. 나름대로 젊은 세대는 사력을 다해 버티고 있다. 버티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무다. 더 이상 위대한 헌신과 고상한 동기를 요구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온갖 담론으로 분칠해도, 청춘의 맨 얼굴은 아마 이것과 가까울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도 별 수 없다. 청춘의 대표를 자처하며, 또 좌파 이데올로기적 충동에서 시작한 정의감이 충만한 글이 아니었다. 그냥 나는 돈이 급하다. 그런데 오마이 뉴스에서 원고료 5만 원 출금 제한을 걸어 놨다. ‘빨리 몇 개 더 써서 반드시 고료를 타내고야 말 것이다!’ 라고 다짐하던 찰나, 기사채택에서 까였다. 아씨.. 마지막 문장은 삭제하는 편이 좋았나?



-2017.12.05 

@PrismMaker

※본 에세이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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