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잃어버릴  것을 

                                                     - 조   병   화 -

 

          나에게  잃어버릴  것을  잃어버리게  하여  주시고
          나에게  남을  것을  남게  하여  주십시오

 

          와글와글  타오르던  무성한  여름은
          제자리  자리마다  가라  앉아
          귀중한  생명들을  여물게  하였읍니다

 

          보시다시피
          어젠  담당할 수  없이  숨찬  계절이었읍니다

 

          이제  돌아갈  것을  돌아가게  하여주시고
          총총히  서  있는
          잎  떨어진  나무  상수리  지나는  바람에도

 

          생명을  알알이  감지할  수  있는
          소리  없는  가을을  나에게  주십시오

 

          기름진  미운  얼굴을  거두고
          기도를  올리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우수수  세월이  지나는  나의  자리
          검은  수림처럼  그대로  말  없이

 

          잃어버릴  것을  잃어버리게  하여  주시고
          나에게  남을  것을  남게  하여  주십시오                                                                     

                       

                                                                 제 5시집.  -  사랑이 가기  전에 -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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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는 조병화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이고 1955년 발행되었다.
  어느 소녀에  의하여 읽게된 이 시집은 내가 대학 들어 가고 나서인  1955년 겨울인것 같다.

  조병화 선생은 이때 서울고등학교에서 '물리'를 가르치고 계실때여서 한동안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기억되군 하였다.    

  그 소녀,  지금쯤은 손주, 손녀 여러명 있는 할머니가 되었음직 한데 도무지 그림이 안 그려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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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04-09-21 09:59   좋아요 0 | URL
혹시..그소녀가 수암님의 첫사랑 아니신가요?..^^

水巖 2004-09-21 10:13   좋아요 0 | URL
그런가봅니다. 그래서 조병화 시인의 시를 좋아했나 하고 문득 생각해 보는군요.

이렇게 되줄을 알면서도
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이런 시도 있었죠. 한 동안 외우고 다니던 시였죠. 지금은 중간 열들이 헝크러지고 생각이 잘 안나지만.

진주 2004-09-21 13:56   좋아요 0 | URL
1955년에 대학을 들어가시고, 조병화를 좋아하는 소녀를 만나시고.......
1955년이라면 아직 태어날 꿈도 못 꾸던 저도 조병화님의 시를 좋아합니다.
과연..좋은詩는 세월을 초월한다는 생각이 듭니다.늘 건강하세요^^
조병화님의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살며시 두고 갑니다.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서러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외로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사나운 거리에서 모조리 부슬러진
나의 작은 감정들이
소중한 당신 가슴에 안겨들은 것입니다.

밤이 있어야 했습니다.
밤은 약한 사람들의 최대의 행복
제한된 행복을 위하여 밤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눈치를 보면서
눈치를 보면서 걸어야 하는 거리
연애도 없이 비극만 깔린 이 아스팔트

어느 이파리 아스라진 가로수에 기대어
별들 아래
당신의 검은 머리카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나보다 앞선 벗들이
인생은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한 것이라고
말을 두고 돌아들 갔습니다.

벗들의 말을 믿지 않기 위하여
나는
온 생명을 바치고 노력을 했습니다.

인생이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하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믿고
당신과 같이 나를 믿어야 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하나의 최후와 같이
당신의 소중한 가슴에 안겨야 했습니다.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水巖 2004-09-21 16:11   좋아요 0 | URL
박찬미님, 조병화 시인의 시를 좋아하시는 군요. 저는 어느 해 도서전시회에 갔다가 당시 학원사에서 발행한 조병화 시전집 아홉권을 산 적이 있었답니다. 이 9권의 전집에 조병화 시집 30권이 들어가 있는 전집이였는데 장정도 그렇고 4.6판에 반양장이여서 전집이라고 하기엔 좀 초라해 보였지만 제1시집에서 제 30시집이 들어 있어 좋다고 사 버렸죠.
그 이후 들쑹 날쑹 사서 전 52시집에서 없는것도 있고 이중에 한정판 시집이라는 책도 있는데 제34시집인 [후회없는 고독] 미학사刊 인데 제가 산 책은 344/500 (2쇄) 500부 한정판에 조병화 선생의 친필 싸인이 있는 시집이랍니다. 1990년 간행된 이 시집은 당시 시집으로는 일금 10,000원이라는 무척 비싼 책값이였죠. 양장본이긴 하지만.
그런데 2刷인 이 책이 1,2쇄 합해서 500부 한정판인지 아니면 각각 500부 한정판인지 좀 모호 하더군요.
< 이렇게 될줄을 알면서도> 시 감사합니다.

진주 2004-09-21 16:40   좋아요 0 | URL
앗...좋아한다는 말을 경솔하게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병화님의 시집도 한 권 안 갖고 있으면서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 갑자기 양심에 찔려요 흑흑...
그러나, 열악한 여건 때문에 제겐 다른 책들도 거의 없습니다. 거의 도서관을 이용하는 편이지요.
조병화님의 시전집...부럽습니다....

水巖 2004-09-21 16:59   좋아요 0 | URL
책을 소장해야 좋아한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이제 이분도 돌아가셨으니 누가 한번 진짜 전집 한번 안 만드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작이어서 엄두를 못내는거 아닌가 몰라요. 돌아가신 뒤로 빠진 책 메꿔 볼라고 주문해 보는데 또 품절된 책도 많더라고요.
말만 전집이지 학원사刊 전집, 원래는 10권인데 (수필집이라 한권 뺐답니다) 정말 초라한 책이였어요. 여러 사람이 다 보라고 일부러 그렇게 간행 했는지는 몰라도 장정도 뭐 별로 였답니다.
학원 이라는 잡지 아세요? 내가 중학교 다니던때 중고등 학생을 위한 잡지였답니다. '학생계'인가 하는 잡지도 있었는데 중도에 없어지고 유일한 학생 잡지였는데 그 잡지사에서 만든 시집이 좀 그랬다 싶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