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구판절판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것은 상대가 따분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매력적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입을 다물고 있으면 구제불능일 정도로 따분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46쪽

나는 사랑 때문에 불구가 되었다.-51쪽

생각하는 사람은 사랑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그냥 사랑을 한다.-62쪽

사랑을 바라지만, 자신의 진정한 자아가 드러나면 상대가 실망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76쪽

우리 내부에 부족한 것이 없다면 우리는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80쪽

우리는 서로에 대한 지식이 소유와 자유를 허용한다고 여겼다.-103쪽

웃을 수 없다는 것은 인간적인 것들의 상대성, 사회나 관계에 내재된 모순, 욕망의 다양성과 충돌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109쪽

유머가 있으면 직접적으로 대립할 필요가 없었다.-110쪽

아름다움에 대한 주관적 이론은 기분 좋게도 관찰자를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만들어버리므로.-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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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0 1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엉이 2006-04-20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의 화자가 지극히 세심하긴 하죠, 표현문화가 아닌 풍토에서 자란 우리에겐, 더욱이 한국의 남성분들에겐 약간 동떨어진 얘기라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첨탑
윌리엄 골딩 지음, 신창용 옮김 / 삼우반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먼저 이 책을 읽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을 고백해두어야 할 것 같다.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를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소설의 흐름 중간중간에 불현듯 끼어드는 주인공의 내면독백들, 그들의 불안, 환상들로 인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지 않으면 어느새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소설 속에서 한참을 헤매고 겨우겨우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문득 이러한 혼란스러움이 소설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독자로서의 나'의 혼돈이며, 더 나아가 신앙인 혹은 피조물로서 신의 뜻을 알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의 혼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환상이 첨탑 건설의 가장 중요한 필연성이 되었다는 말씀이시지요?" (206쪽)

환상과 계시(신탁)는 전설과 신화 그리고 성서 속에서 영웅들에게 필연적으로 주어지는 모험을 예고하고, 신의 위대한 뜻을 전달한다. 조슬린 역시 굉장한 흥분 속에서 자신이 주임신부로 있는 대성당에 우뚝 선 첨탑의 환영을 보고, 그것이 "나의 돌로 된 기도의 정확한 형상"(236쪽)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왜 "이 보잘 것 없는 종을 하느님께서 이 자리에 앉히셨는가"(239쪽)를 깨닫고 자신의 그 사업에 "선택"되었다고 믿는다.
영웅은 모험의 시련을 통해 단련되고, 예언자는 제 고향과 집에서는 존경받지 못한다(마태오 13장 57절)고 했다. 조슬린도 성당의 주요인사들과 첨탑을 올리는 인부들로부터 끝없는 반대와 조롱에 시달린다. 그러나 첨탑을 올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일은 더욱더 신의 뜻에 합당하다고, 조슬린은 생각한다.


"우리에겐 겁나고 불합리한 일이기도 하지. 그렇지만 언제부터 천주께서 당신이 선택하신 이들에게 합리적인 요구를 하셨는가?"(147쪽)

조슬린의 환영 체험과 믿음을 뒷받침 해주기라도 하듯 천사는 계속해서 그의 등을 따뜻하게 덥혀준다. 그러나 첨탑이 올라가고 세찬 바람 속에서 음울한 소리를 내며 휘청일 때, "천사는 축복이면서 또한 엄청난 피로를 안겨주"고(151쪽), 로저 메이슨과 구디가 내는 욕망의 신음 소리 앞에서 그는 "천사의 무게에 눌려 허리가 구부정"해진다(152쪽). 이제 그의 등을 따스하게 덥혀주던 천사는 육체적 통증으로 변한다. 아니 그의 곁을 늘 따라다니던 천사 역시 통증에 대한 조슬린의 환상이었다...


나는 건물 전체를 살아 있는, 기도하는 사람의 형상으로 보았었다.(237쪽)

성당의 기초가 튼튼한가를 살펴보기 위해 교차부에 파놓은 구덩이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꿈틀 거리고, 거기서는 몸을 흠칫하게 만드는 악취가 풍겨나온다. 그 위로 "불뚝, 꼿꼿이, 터질 듯, 뿜을 듯, 절정과 위용을 드러내며 새 첨탑이 치솟는 것이다." (9쪽) 이것은 기도하는 사람의 형상이라기 보다는 팽골과 구디, 로저 메이슨과 그 아내, 그리고 조슬린의 뒤섞인 욕망의 분출이며, 은폐되고 지워진 죽음으로 얼룩진 형상이다.


"무너졌소?"
초점에 맞춰진 아담 신부 얼굴이 수그리며 다가와 미소했다.
"아직은요."(271쪽)

조슬린의 일그러진 환상이 빚어냈고, 허무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장난으로 추진된 이 첨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이것은 조슬린의 환상이 진정 하느님의 계시였다는 의미일까. 모르겠다. 조슬린은 단지 신앙심이 너무 깊었을 뿐이고, 하느님께 닿고 싶었을 뿐이고, 그래서 사랑받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어리석음을, 그 어린애 같은 마음을 우리가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나는 단지 그가 죽음을 앞두고 차마 내뱉지 못한 마지막 체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다 : 죄를 짓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하느님이 계신 곳은 하느님만 아실 뿐.(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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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생애
엔도 슈사쿠 지음, 이평아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젠가는 지울 수 있는 연필이 아닌, 보라색 잉크펜으로 죽죽 줄을 그어 놓은, 엄마의 필체와 혹은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필체가 섞여있는, 나로서는 정말 얼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는 이 빛바랜 책을 보게 된 건 어떤 우연일까. 이 사순과 부활의 시기에.

얼마전, 다운 받아놓은 영화를 보려다가 제작년 사순 때 받아놓은 멜 깁슨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슬쩍 틀어봤다. 처음 이 영화를 보기 전에도 많은 용기가 필요했지만, 역시 끝까지 다시 볼 엄두가 나지 않아 베드로가 예수를 잡으러 온 병사의 귀를 자르고, 그 소란의 와중에서 예수가 병사의 귀를 다시 붙여주는 장면에서 정지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항상 폭력이나 학대에 대해 참을 수 없는 건 그것이 엄연히 '인간 대 인간'의 관계 속에서 벌어진다는 점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못하게 되는 순간부터 문명은 다시 야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백인이 흑인을 채찍질하고, 기독교도가 이교도를 학살하고, 부자가 가난한 자를 멸시하는 냉혹한 이분법적 세계 안에 소위 문명 세계의 기득권자들이 다져 놓은 이성적 사유와 철학적 담론들은 새빨간 거짓말들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그래서 세상이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고 점점 더 느끼게 될수록 더욱더 의지하게 되는 것은 신앙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부와 권력이 아니라 가난한 모습으로, 이 책에서 이야기하듯 '현실성 없는' 사랑을 전하는 무력한 신의 힘은 모순적이게도 그 '무력함'에 있다는 것이 점점 더 나의 마음을 끈다. 부와 권력 같은 지상의 왕이 지닌 강력함은 나의 것이 아니란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가 이해하고 껴안으려고 했던 인간적 고통들은 바로 나의 것이기도 하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삼위일체를 이룬다고 교회에서 가르치고 나도 그것을 믿지만, 어쩐지 하느님과 예수님은 다른 존재로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내가 예수님과 다르게 느끼는 하느님은 이 책에서 말하는 세례자 요한의 하느님과 더 가깝다. 죄많은 인간에게 회개하라고 강력히 촉구하는, 진노하는 하느님이다. 구약의 하느님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셨지만, 그에 따르는 엄격한 규율과 그것을 어겼을 때의 가혹한 벌을 상정하셨다. 인간의 배반은 그 불완전함으로 인해 예정된 것이고, 하느님은 당신의 분신이며 소중한 아들인 예수를 통해 인간의 구제책을 마련하신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비논리적인가, 창조주는 애초에 인간을 보다 도덕적으로 만들면 되었을 것을.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겠다. 신의 오묘한 심리를 한낱 미물인 내가 어찌 알겠는가. 단지 얕은 믿음만 지닌 내가.)

때로는 지나친 소설적 상상력으로, 때로는 단조로운 설명적 어투로 예수의 생애를 되짚어 보는 이 책을 읽으며 반신반의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 책이 적어도 '중재자' 예수의 면모를 나에게 일깨워준 것만은 틀림없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에게 기대했던 것은 정치적 메시아이며, 나 역시 어떤 면에서는 예수를, 내 삶을 획기적으로 바꿔줄 현실적 메시아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속죄할 용기조차 내지 못해 하느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고 얼굴을 가리고 있는 나의 두손을 거두어 주시고, 사랑의 하느님을 향해 눈을 들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신다.

예수의 생애의 핵심이며, 우리에게 가장 큰 신앙을 필요로 하는 부활의 대목에 작가는 '수수께끼'라는 장제목을 붙인다. 우리는 매 미사때마다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라고 고백하지만, 나는 솔직히 육신의 부활의 실체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고 할 수 있다. 믿으라고 하니까 믿는 척한다고 해야할까. 저자는 예수 사후, 제자들이 죽음을 무릅쓴 전도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진짜 살과 피로 이루어진 '육신의 부활'이라기 보다는 예수 죽음의 충격과 그 가르침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부모님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우리가 그들을 마음 속에 간직하는 것처럼 생전 예수의 모습이 제자들의 마음 속에서 부활한 것이라고. 나 역시도 예수님은 내 마음 속에 살아계심을 느끼고, 때로는 삶에서 작은 기적들을 체험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수수께끼 같다. 예수의 부활을 논하는 것은 많은 위험과 논쟁이 따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다빈치 코드』의 상영을 놓고 갈등하는 것은 믿음에 대한 불안한 반증이 아닐까. 우리의 믿음이 비록 겨자씨만 하더라도, 그것은 쉽게 흔들리지 않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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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카프카 (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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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란 일상성의 테두리를 뛰어넘는 것일세. 계시 없는 인생이 무슨 인생이란 말인가! 다만 관찰하는 이성에서 행위하는 이성으로 뛰어 옮겨 가는 것, 그것이 중요하지..."-91쪽

"논리나 도덕이나 의미는 그것 자체가 아니라 관련성 속에서 생겨나네..."-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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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카프카 (상)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사 / 2003년 7월
구판절판


"하지만 인간은 무엇인가에 스스로를 밀착해 살아가는 존재지"-207쪽

침묵이란 귀에 들리는 것이다.-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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