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예수의 생애
엔도 슈사쿠 지음, 이평아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젠가는 지울 수 있는 연필이 아닌, 보라색 잉크펜으로 죽죽 줄을 그어 놓은, 엄마의 필체와 혹은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필체가 섞여있는, 나로서는 정말 얼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는 이 빛바랜 책을 보게 된 건 어떤 우연일까. 이 사순과 부활의 시기에.
얼마전, 다운 받아놓은 영화를 보려다가 제작년 사순 때 받아놓은 멜 깁슨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슬쩍 틀어봤다. 처음 이 영화를 보기 전에도 많은 용기가 필요했지만, 역시 끝까지 다시 볼 엄두가 나지 않아 베드로가 예수를 잡으러 온 병사의 귀를 자르고, 그 소란의 와중에서 예수가 병사의 귀를 다시 붙여주는 장면에서 정지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항상 폭력이나 학대에 대해 참을 수 없는 건 그것이 엄연히 '인간 대 인간'의 관계 속에서 벌어진다는 점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못하게 되는 순간부터 문명은 다시 야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백인이 흑인을 채찍질하고, 기독교도가 이교도를 학살하고, 부자가 가난한 자를 멸시하는 냉혹한 이분법적 세계 안에 소위 문명 세계의 기득권자들이 다져 놓은 이성적 사유와 철학적 담론들은 새빨간 거짓말들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그래서 세상이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고 점점 더 느끼게 될수록 더욱더 의지하게 되는 것은 신앙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부와 권력이 아니라 가난한 모습으로, 이 책에서 이야기하듯 '현실성 없는' 사랑을 전하는 무력한 신의 힘은 모순적이게도 그 '무력함'에 있다는 것이 점점 더 나의 마음을 끈다. 부와 권력 같은 지상의 왕이 지닌 강력함은 나의 것이 아니란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가 이해하고 껴안으려고 했던 인간적 고통들은 바로 나의 것이기도 하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삼위일체를 이룬다고 교회에서 가르치고 나도 그것을 믿지만, 어쩐지 하느님과 예수님은 다른 존재로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내가 예수님과 다르게 느끼는 하느님은 이 책에서 말하는 세례자 요한의 하느님과 더 가깝다. 죄많은 인간에게 회개하라고 강력히 촉구하는, 진노하는 하느님이다. 구약의 하느님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셨지만, 그에 따르는 엄격한 규율과 그것을 어겼을 때의 가혹한 벌을 상정하셨다. 인간의 배반은 그 불완전함으로 인해 예정된 것이고, 하느님은 당신의 분신이며 소중한 아들인 예수를 통해 인간의 구제책을 마련하신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비논리적인가, 창조주는 애초에 인간을 보다 도덕적으로 만들면 되었을 것을.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겠다. 신의 오묘한 심리를 한낱 미물인 내가 어찌 알겠는가. 단지 얕은 믿음만 지닌 내가.)
때로는 지나친 소설적 상상력으로, 때로는 단조로운 설명적 어투로 예수의 생애를 되짚어 보는 이 책을 읽으며 반신반의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 책이 적어도 '중재자' 예수의 면모를 나에게 일깨워준 것만은 틀림없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에게 기대했던 것은 정치적 메시아이며, 나 역시 어떤 면에서는 예수를, 내 삶을 획기적으로 바꿔줄 현실적 메시아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속죄할 용기조차 내지 못해 하느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고 얼굴을 가리고 있는 나의 두손을 거두어 주시고, 사랑의 하느님을 향해 눈을 들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신다.
예수의 생애의 핵심이며, 우리에게 가장 큰 신앙을 필요로 하는 부활의 대목에 작가는 '수수께끼'라는 장제목을 붙인다. 우리는 매 미사때마다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라고 고백하지만, 나는 솔직히 육신의 부활의 실체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고 할 수 있다. 믿으라고 하니까 믿는 척한다고 해야할까. 저자는 예수 사후, 제자들이 죽음을 무릅쓴 전도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진짜 살과 피로 이루어진 '육신의 부활'이라기 보다는 예수 죽음의 충격과 그 가르침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부모님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우리가 그들을 마음 속에 간직하는 것처럼 생전 예수의 모습이 제자들의 마음 속에서 부활한 것이라고. 나 역시도 예수님은 내 마음 속에 살아계심을 느끼고, 때로는 삶에서 작은 기적들을 체험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수수께끼 같다. 예수의 부활을 논하는 것은 많은 위험과 논쟁이 따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다빈치 코드』의 상영을 놓고 갈등하는 것은 믿음에 대한 불안한 반증이 아닐까. 우리의 믿음이 비록 겨자씨만 하더라도, 그것은 쉽게 흔들리지 않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