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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러나 싶을 땐 뇌과학 - 뇌를 이해하면 내가 이해된다
카야 노르뎅옌 지음, 조윤경 옮김 / 일센치페이퍼 / 2019년 10월
평점 :
인간의 모든 기관 중에서 가장 신비한 것을 꼽으라면 단연 '뇌'가 아닐까. 뭐 다른 기관들도 그 작동 원리를 파고들면 혀를 내두르게 되지만, 모든 동물 중에서도 가장 고등한 인간의 뇌는 최고가 아닐까 한다.
사실 이러한 뇌의 구조와 기능을 알아낸 여러 학자들의 연구 역시, 고차원적 뇌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전두엽, 대뇌피질, 변연계 등등 각기 다른 기능을 하는 뇌의 영역들이나, 시냅스, 미엘린, 축삭돌기 같은 미세한 구조와 기능방식까지, 복잡하고 유기적인 구조도 구조이지만 그걸 알아낸 학자들에게도 감사와 찬사를 보낸다.
이 책을 만난 건 운명적이었다. 요즘 심리학과 뇌과학을 통해 인간관계의 해법을 찾는 책을 번역하고 있는데, 뇌 구조와 관련한 설명에서 참고도서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겸사겸사, 스마트폰의 노예가 된 이후로 진득하게 책 읽기가 몹시 힘들어진 상황이라 '강제성'을 부여할 필요도 절실했다. 그러던 차에 SNS에서 이 책의 서평단 모집 게시물을 봤고, 평소 이런 '당첨'의 운이 별로 없긴 하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덜컥 신청했다.
다행히 과학의 '과' 자도 모르는 문과 무지렁이가 봐도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만큼, 가속도가 있는 책이다. 더 심각한 걸 원하는 분들에겐 성에 차지 않을지 모르지만, 뇌과학도 내지 신경과학도를 꿈꾸지 않는 이상 속인들의 지식욕을 채우기엔 아주 딱인 책이지 싶다.
전문적인 용어들이 줄줄이 나오고 있음에도, 정갈한 번역과 편집, 일목요연한 구성, 적절한 예시들로 가끔가다 '아하!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통찰도 선물해준다.
목차를 살펴보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4장 내 머릿속 내비게이션 -뇌 GPS 편이었다. 그중에서도 '훈련으로 머릿속 GPS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을까?-세상 모든 길치에게 희망을'이 큰 도움이 되었다. 세상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길치인 나는 어렸을 적 가장 큰 공포가 '어딘가에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햇수로 6년째 제주에 살고 있으나, 아직도 여기가 동쪽인지 서쪽인지 잘 구분을 못하고, 남편이 '여기 왔었던 거 기억하지?'라고 물으면 우물쭈물 자신있게 대답을 못하는 중증 길치다. 가끔 왼쪽과 오른쪽도 헷갈려서, 혹시 오른쪽으로 가야 하는데 왼쪽 깜빡이를 켤까 봐 운전면허도 따지 못한, 딱한 뚜벅이가 바로 나란 사람이다.
방향감각이란 어느 정도 타고나는 것이지만, 뇌의 GPS에 해당하는 해마를 단련하면 길치 탈출이 가능하다니, 나에겐 정말 희망적인 소식이다. 생각해 보니, 아직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동생과 유럽여행을 갔을 때 지도에 의지해서 이곳저곳 길을 찾아다니던 기억이 떠오른다. 사실 나보다는 길눈이 밝은 동생이 더 큰 역할을 하긴 했지만, 일단 생판 모르는 곳에서 숙소를 찾고, 어딘가를 돌아다니다 다시 숙소로 무사귀환 했다는 게 남들보다 작을 나의 앙증맞은 해마 덕분이라니, 고맙다 해마야!
그런데 이 책을 읽기 전에도 그랬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정말 스마트폰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뇌에 독 같은 존재란 걸 여실히 깨닫는다. 훈련을 통해 해마를 단련시킬 수는 있지만, 내비게이션이 아니라 종이로 된 지도가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한다. 이와 관련한 일본의 한 실험은 굉장히 흥미롭다(150쪽부터 관련 내용). 피실험자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어, 첫 번째 그룹에는 내비게이션 앱이 있는 휴대폰을 주고, 두 번째 그룹에는 종이 지도를 주고, 세 번째 그룹에게는 말로만 설명을 해주었다. 목적지에 도달한 뒤 이들에게 걸어온 경로를 지도로 그려달라고 했는데, 누구나 예상한 바대로 가장 힘들게 지도를 그린 그룹은 첫 번째 그룹이고, 가장 쉽게 그린 것은 세 번째 그룹이었다.
놀라운 것은, 내비게이션을 사용한 첫 번째 그룹이 가장 먼 경로를 택했고, 가능 도중 가장 많이 멈칫거렸다는 점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진짜 소리내어 '오호~'라고 말했다. 남편도 늘 그런다. 평소에는 내비게이션을 잘 안 쓰지만, 처음 가능 장소라 내비게이션을 사용하고 나면 항상 "저 길로 가면 될 것을, 내비 때문에 한참 돌아왔네"라고 투덜거리는 것이다.
또 인간의 기억에 관해 설명한 부분도 재미있었다. "기억은 우리가 매일매일 맞닥뜨리는 온갖 감각 정보들로 과부하가 걸리는 것을 막아주는 일종의 보호 장치"(130쪽)이다.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부분만 구성해서 '기억의 골격'을 형성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들은 하위로 분류하거나 아예 없애버리지는 않더라도 구석탱이에 밀쳐놓는 것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의문이 떠오른다. '그럼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판단하는 건 누구지?' 이건 의식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지 않나? 왜 가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건 더 선명하게 떠오르고, 기억하고 싶은 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일이 발생하지 않나?
기억의 왜곡은 말할 것도 없다. 올해 구정에 친정에 갔다가 초등학교 때 쓴 일기장을 가지고 왔는데, 일기를 읽어보곤 멘붕에 빠졌다. 나름 초등학교 때 공부를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일기 속에는 시험을 많이 틀려 고뇌하는 6학년의 내가 있었다! 가끔 시험을 좀 잘 본 적도 있었는데, 아마도 내 기억의 골격은 이 정보를 가장 중요한 사실로 저장했는가 보다. 어쨌든 기억도 생존본능의 하나로, 분명 나에게 유리한 정보를 선별하여 저장하는 것이겠지.
끝으로 이 책을 읽으며 반성의 기회를 가져본다. 스마트폰이 여러 모로 독이 된다는 걸 알면서도 손에서 놓지 못하는 나. '읽지도 않을 책 뭐하러 사'라며 핀잔을 주는 남편에게 '읽을 거야, 읽을 거라고' 소리만 지르는 나. 여기서 벗어나려면 스마트폰은 눈과 뇌를 늙게 하고 결국 치매로 귀결될 확률을 아주 많이 높인다는, 고로 건강한 100세 시대를 위해서는 건강한 식습관과 적절한 운동, 그리고 해마 단련이 중요하다는 만고의 진리를 이제 마음에 담아두지만 말고 실천에 옮기자!
진짜 끝으로, 좋은 책과 좋은 영화를 보면 결국 글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되는데, 이 책을 통해 별 고민 없이 오랜만에 긴 수다를 부려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