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24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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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 상해? 자네, 그런 말일랑 아예 하지도 말게. 이 세상에는 죄 짓는 것 외에는 속상할 일은 하나도 없어. 영혼보다 더 소중한 건 없으니까."(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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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자가 보여주는 새 이야기, 인간 이야기
서정기 지음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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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조교로 일할 때 인연을 맺은 선생님이 쓰신 책이다. 우리나라와 세계 곳곳에서 만난 아름다운 새들이 선생님의 정감 어린 글과 함께 실려 있다. 

학과 조교와 TA를 합치면 꽤 오랜 세월 선생님을 뵈었는데, 그 오랜 시간보다 이 한 권의 책으로 선생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혜화동에서 파주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한 번도 연락을 드리지 못해서 근황을 알지 못했는데(얼마전에 은퇴하셨다는 것만 알았다), 이렇게 멋진 제2의 삶의 살고 계실 줄이야. 새로운 시작에 망설임이 없고 열정을 쏟아붓는 모습은 저 이국의 신비로운 극락조보다 더 감동적이고 존경스러웠다.

이제껏 도감에 실린 사진들을 볼 때 아무 감정이 없었는데, 이 책의 사진들이 어떤 지난한 기다림과 인내를 거쳐 선생님의 카메라에 담겼는지 그 과정을 알고 나니 사진 한 장 한 장이 소중하고 페이지를 넘기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이제 도감을 대할 때는 항상 그 사진을 찍은 이의 노고를 기억하고 넘어가게 될 것 같다. 

평소 까만 글자들만 잔뜩인 책을 읽을 때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우리 막내도 나와 함께 이 책을 두 번이나 읽었다. "엄마는 무슨 새가 제일 좋아?" "이건 암컷이야 수컷이야?" "(동물의 세계에서는 수컷이 암컷보다 아름답다고 설명해주자)난 암컷이 수컷보다 예뻤으면 좋겠어." "이 새는 어디에 살아?" 귀여운 뱁새처럼 어찌나 조잘대는지, 막내 손이 안 닿는 높은 칸에 책을 숨겨놓기도 했다. 

언젠가 탐조하는 사람들에 관한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제목이며 저자는 도무지 기억이 안 나는데, 무슨 탐조 대회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다. 누가 어떤 새를 얼마나 많이 보는지 내기를 하는 것이어서, 그들간의 경쟁이 무척 치열하고 모인 사람들 간에 본 새의 수와 종류를 놓고 온갖 실랑이가 벌어지는 게 탐조의 세계를 모르는 사람으로서는 좀 이해되지 않는 면도 있었다. 거기서 누군가 희귀한 새를 봤다는 얘기가 돌면 모두들 우르르 카메라를 들고 뛰는데, 선생님도 그러셨을 것을 생각하니 살짝 웃음이 나기도 했다. 반면 낯선 땅에서 벌레에 물려 고생하셨다는 대목에서는 안쓰럽고 걱정이 되기도 했다. 

탁란 이야기도 나오는데, 여기서 언급하신 다큐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도 EBS에서 뻐꾸기가 탁란하는 방송을 본 기억이 있다. 남의 둥지에 알을 놓는 것도 어이없는 참이었는데, 글쎄 그 알에서 깬 놈이 원래 주인의 알이나 새끼를 둥지 바깥으로 밀어버리까지 했다. 뭘 알고 하는 짓이 아니라 한들 그 잔인함이 잘 용서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뭘 알고도 이보다 더한 이기적인 생존 본능을 다른 종에게, 같은 인간에게 망설임 없이 휘두르고 있지 않은가. 뻐꾸기 욕할 일이 아니었다. 새들의 서식지를 파괴하고 무분별하게 개발하는 것이야말로! 난개발로 여기저기 파헤쳐지고 있는 제주도, 예외는 아니다. 정말 슬픈 일이다. 자연을 조심스럽게 대할 줄 아는 탐조처럼,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는 애틋한 마음과 예의바른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세상에 참새, 까치, 비둘기만 있는 줄 알았던 무지렁이가 이 책을 통해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있는지 눈호강을 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열심히 새를 기다리고 있을 선생님이 늘 건강하시기를 진심을 담아 기도하며, 다음 이야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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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들의 침묵
토머스 해리스 지음, 공보경 옮김 / 나무의철학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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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특허청에서 보낸 편지였다.
"내가 발명한 십자가상 시계에 관한 거야. 특허를 내줄 수는 없지만 시계 문자판에 대한 저작권 등록을 알아보라고 조언을 해왔더군. 보여줄게."
그리고 냅킨만 한 크기의 종이에 그린 그림을 음식 반입구 트레이에 담았다. 스탈링이 트레이를 당겼다. 
"보통 십자가상에서 두 손은 2시 45분이나 1시 50분을 가리키거든. 발은 6시 방향에 있고. 인기 좋은 디즈니 시계의 시침과 분침처럼, 이 시계의 문자판에서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두 팔이 시침과 분침이 되는 거야. 발은 6시 방향에 고정돼 있어. 그리고 위쪽에는 작은 초침이 후광처럼 돌아가지. 어떻게 생각해?"
해부학적 스케치의 품질은 꽤 좋은 편이었다. 예수의 얼굴은 바로 스탈링의 얼굴이었다.(284쪽)


영화에는 없는 부분이다. 그래서 좀 상상을 해봤는데, 이내 얼굴이 찡그려졌다.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냥 디즈니 시계의 시침과 분침처럼 혐오감이 들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세상에 정말 이런 시계가 있을까? 있다면 사는 사람도 있을까? 이런 소리 하면 제정신이 아니구나 할 사람도 있겠지만, 어쨌든 영화와 책 속의 인물이니까 그래도 한니발 렉터에게 일말의 동정이란 게 있었는데 저 부분을 읽고 나선 묘하게 몸서리가 났다. 신성한 것을 모독하고 고통을 즐기며 잔혹하고 인간의 상상을 넘어선 캐릭터라는 건 익히 잘 알고 있었음에도, 저 묘사는 이상하게 내 안의 금기를 건드린 듯 혐오감이 일고 싫었다. 


워낙 영화가 유명하고, 또 책을 읽기 전에 최근 영화를 다시 본 터라 책을 읽으면서 영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는 원전의 플롯을 짜깁기하고 빼서 스토리를 만들었는데, 정말 멋진 편집이다. 원전에서 이 사람과 관계된 것을 저 사람에게 부여하고, 이 사건을 저 사건과 연결시킨 부분들이 굉장히 매끄럽고 또 영화적이다. 영화에서 생략한 부분들은 미드 <한니발>에서 요소요소 잘 살리고 있는데, 원전 <양들의 침묵>이 잉태하고 거기서 파생된 버전들은 원전이 탄탄하기에 더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는 클라리스 스탈링의 감정선을 더 세밀하고 천천히 따라갈 수 있어서 좋았다. 아무래도 영화는 한니발이 몇 번 등장하지 않아도 워낙 강렬하고 스펙터클한 신이 많아서 클라리스보다는 한니발이 부각되는 느낌이 있었는데(나만 그럴지도...), 책에서는 영화가 생략하거나 암시한 스탈링의 생각들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에서 비롯된 삶의 균열을 악착같이 딛고 일어서 강인하게 버티고 있지만, 한편 어머니와 동생들과 떨어져 가게 된 친척집 목장에서 구하지 못한 양들의 울음소리는 생명에 대한 부채감으로 스탈링을 끈질기게 따라다닌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형편이 어려워진 엄마는 맏이인 클라리스를 친척집에 보내는데, 그녀가 가게 된 목장은 나이든 말과 양을 도살하는 도살장이었다. 어느 날 양의 비명과 같은 울음소리에 잠이 깬 클라리스는 현장을 목격했고, 어린 그녀가 안고 도망치기에는 너무 버거웠던 양 대신 눈이 거의 멀다시피 한 '한나'라는 말을 끌고 도망친다. 


연약한 생명에 대한 연민과 그들의 고통에 괴로워하는 클라리스. 한편 무례함에 대한 혐오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예술적 완벽성에만 반응하는 한니발. 클라리스와 한니발은 선과 악의 대척점에 있지만 두 사람은 묘하게 공감하고 이해하며 서로의 생각을 읽는다. 클라리스는 생물학적 아버지를 잃었으나 한니발은 그녀의 정서적 공백과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정신적 아버지 역할을 한다. 기묘하고 아름답지 않은 방법이기는 하지만.


또 한 명의 아버지 역할을 하는 인물 잭 크로포드는 말하자면 다정하지 않은 아버지다. 아직 연수원 학생 신분인 클라리스와는 계급 차이가 한참 나는 상관이긴 하지만 소통이 일방적이고, 뭔가 챙겨주는 듯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부재한다. 어쨌거나 클라리스의 재능을 알아본 건 그였고, 클라리스의 성장을 위해서는 이런 방임형 아버지가 필요하긴 했지만. 그런 크로포드 옆에 죽어가는 아내를 둔 건, 이 인물에 대한 작가의 애정 어린 변명일지도 모르겠다. 


한니발과 잭 크로포드(그리고 스미스소니언의 필처는 다소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외에 클라리스 주변에 있는 남성들은 모두 클라리스에게 적대적이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피해자로, 주변인으로,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낯설과 이질적인 것으로 본다. 그 대표적 인물이 칠턴인데, 솔직히 한니발보다 더 밥맛없고 역겨운 인물이다. 이런 상황에서 홀로 사투를 벌이는 클라리스의 모습은, 오를 수 없는 우물에 갇힌 캐서린과 다를 바 없다. 클라리스가 제임 검의 집 지하실에서 흑단 같은 어둠 속을 헤맬 때, 속수무책으로 어둠 속의 허공을 헛되이 휘저을 때 그 무력감은 극에 달했다. 도움의 손길 하나 없는 극단적 고립 속에서 그녀가 범인을 검거하고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남성들을 뒤로 한 채 승리할 때도 사실 마음속으로는 환호보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안도감이 먼저였다. 


"스탈링의 상처가 서서히 치유되고 있었다." (629쪽)


한니발이 책 마지막에 쓴 편지에서처럼, 클라리스가 "보게 될 지하감옥은 이게 마지막이 아니"고, 클라리스가 "사건을 해결할 때마다 양들은 한동안 침묵"할 것이다. 


"양들의 울음소리는 당신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고, 그 울음소리는 아마 영원히 멈추지 않을 거야."(637쪽)


이건 클라리스의 숙명이고, 굴레다. 어쨌든 '한동안'이나마 양들은 침묵할 것이고 그동안 그녀는 곤히 잠들 수 있을 것이다. 

내용을 다 알고 본 책이었는데도 긴장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미드 <한니발>에서는 판권 문제로 클라리스 스탈링을 등장시키지 못했고, 나무의 철학 출판사에서는 <레드 드래곤>이 빠진 시리즈를 내놨다. 아마 이것도 판권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판권 때문이라면 문제가 잘 해결돼서 꼭 이 시리즈로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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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의 회전 - 헨리 제임스 장편소설 열린책들 세계문학 192
헨리 제임스 지음, 이승은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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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문득 아무 이유 없이 한밤중에 히치콕 영화가 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유료여서 미뤄뒀던 <현기증>이 무료로 풀렸길래 냉큼 바로보기를 눌렀다. 


<현기증>의 오프닝타이틀은 단연 압도적이었다. 아이폰에 이어폰을 꽂고 봐서 그런지 배경음악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지금 봐도 그닥 촌스럽지 않은 그래픽을 몇 번이나 돌려봤다. 


아마도 내가 <현기증>을 본 다음, 의식하지 못한 채 《나사의 회전》을 집어든 건 나선은하 같은 그 오프닝타이틀 그래픽 때문이었을 거다. 영화의 3분의 2 지점까지 시종 느리고 정적인 템포로 간당간당하게 진행되다, 매들린이 교회 종탑에서 떨어져 죽은 뒤부터 모든 게 급박하게 돌아가고 주디 역시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법으로 죽는다. 그리고 허무하게 영화 끝. 처음에 줄거리와 결말을 모르고 봐서 사뭇 황당했는데, 빙글빙글 돌아가는 나선형의 구조처럼 주디 역시 매들린과 같은 방법으로 같은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더 좋은 결말은 없었을 것이다. 
스카티가 친구의 부탁을 받고 그의 아내(매들린)를 미행하는 내내 우리는 매들린이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없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여자의 기이한 행동들과 다중의 복선들에 스카티가 속아넘어가듯 우리도 속아넘어간다. 

이 '알 수 없음'은 《나사의 회전》에서 더 심화된다. 이번에 읽은 판본은 열린책들 판본인데, 2006년에 처음 읽은 건 민음사 판본이었다. 줄거리와 소설 작법 자체가 '알 수 없음' 투성이인지라 진짜 어렵게 꾸역꾸역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읽기 어렵기는 했지만 유령이 출몰하고, 시종일관 쫄깃하고, 도대체 결말이 어찌 될 것인가 독자를 안달하게 만드는 그 밀당에 매료돼, 더 꼼꼼히 읽어봐야겠다는 집념으로 저런 짓(?)을 했던 것 같다. 


어쨌든 수확은 있었다. 책이란 사물도 궁합이 맞는 시기가 있나 싶을 정도로 이번 독서는 성공적이었다. 이 지리멸렬한 이야기가 이렇게 쉽게 읽힐 게 아닌데, 혹시 몇 분 몇 시간이 지나면 가독력이 사라지는 건 아닐까 싶어 가능한 한 손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열린책들 판본을 다 읽은 뒤 민음사 판본을 살짝 훑어보니 역시 다시 읽어도 어려웠다. 판형, 문체 등등의 문제일까. 이러나 저러나, '심리 소설의 아버지'라는 작가의 타이틀에 걸맞게 주인공인 가정교사의 널뛰는 감정변화를 묘사한 부분은 심하게 말하면 진짜 미친여자 헛소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의 생각과 감정의 변화를 그 흐름대로 받아적는다고 하면, 그걸 읽는 타인은 도무지 논리적 연관성이 없어 헛소리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읽기 어렵다, 번역이 엉망이다 이런 아우성이 나오는 것 같다. 원문 자체가 그러할진대, 나는 이 정도 번역이라면 진짜 훌륭하게 하셨다고 박수를 쳐드리고 싶다. 아직 시공사 판본은 읽지 않았는데, 또 시간이 한참 흐른 뒤 내게 어떤 감동을 가져다줄지 좀 아껴뒀다 읽으련다(확실히 민음사 판본에 대해선 하나같이 번역을 문제삼고 있는 듯하다). 
알라딘에서 이 책을 검색하다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기록대로라면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는 '만화세계명작'으로 처음 출간됐다는 것과, 이 출판사에서 개정판을 낼 때 '유령의 집'이라는 제목으로 바꿨다는 점이다. 가정교사의 심리묘사를 다 빼고 줄거리만 요약하면 유령이 출몰하고 어린아이 두 명이 등장하니 아마도 어린이책으로 타깃을 잡았나보다. 그러다 비유적으로만 등장하는 나사의 회전이라는 모호한 제목보다는 훨씬 으스스하고 언뜻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한 '유령의 집'으로 출간했다는 게 흥미롭다. 어떤 의미에서는 작가의 의중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유령들을 동화 속 고블린이나 요정, 도깨비로 인식했다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나사의 회전(The Turn of the Screw)'이라는 제목은 작품 내용과 별로 관련없으면서도 묘하게 잘 어울린다. 오히려 영어 제목보다 우리말 제목이 이 작품의 으스스한 분위기와 더 잘 맞는 것 같다. 아니면 어릴 적에 본 <어셔 가의 몰락>에서 관뚜껑 나사 풀리는 장면이 너무나 강렬하게 남아 있기 때문인지도!  
책에서 나사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건 두 번이다(적어도 내가 찾은 바로는). 첫 번째는 액자소설인 이 이야기의 액자부분에서, 가정교사가 썼다는 이 이야기를 묘사하는 부분에 등장한다. 


"(한) 아이가 이야기에 나사를 조여주는 효과를 준다고 한다면, 두 아이가 등장하면 어떻겠습니까?"
"그야 물론 두 아이들이 나사를 두 번 조여준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8쪽)

"내가 계속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자연'을 신뢰하고 그것을 참작함으로써, 그리고 나의 기괴한 시련을, 물론 이례적이고 불쾌한 방향이지만 결국 공정한 대결을 위해, 즉 평범한 인간의 도덕성이라는 나사를 한 번 더 조이기를 요구하는 압력으로 여김으로써 가능했다.(207쪽)


사실 '나사'는 사전적 정의 이상의 의미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수도 있고, 그것이 주로 '조이다'나 '돌리다'라는 동사와 짝으로 쓰인다는 점을 고려할 때 긴장을 증폭하는 매개체로도 보인다. 그 자신이 비평가였던 작가가 무리하고 무례한 해석(비난)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또한 다양하고 열린 해석이 가능하도록 사건의 흐름, 인물의 심리에 공백과 모호함을 의도적으로 심어둔 면이 있으니 나사에 대한 해석도 마음대로 해보라는 영리한 장치가 아닐까 싶다.

요전에는 미드 한니발과 영화 양들의 침묵과 책 한니발 라이징으로 홀린 듯이 즐겁고 행복했는데, 이번엔 이 두 편의 영화와 책이 주는 흥분감으로 이렇게 주절대고 있다. 
알라딘 북플 앱에 보면 다들 핫한, 들어보지 못한 책들을 읽고 계시던데 나는 왜 이리 고리타분한 고전이 좋은지. 것두 요즘엔 읽었던 거 또 읽고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 같은 기분도 약간 든다. 영화도 옛날 영화가 좋고, 심지어 80년대나 90년대, 휴대폰이 나오기 이전 전화번호부를 뒤지거나 쪽지로 연락을 남기는 그런 아날로그 시대가 왜 이리 그리운지 모르겠다. 나이 들어가는 증거일 텐데, 그렇게 싫지는 않다.






"(한) 아이가 이야기에 나사를 조여주는 효과를 준다고 한다면, 두 아이가 등장하면 어떻겠습니까?"
"그야 물론 두 아이들이 나사를 두 번 조여준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 P8

"내가 계속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자연‘을 신뢰하고 그것을 참작함으로써, 그리고 나의 기괴한 시련을, 물론 이례적이고 불쾌한 방향이지만 결국 공정한 대결을 위해, 즉 평범한 인간의 도덕성이라는 나사를 한 번 더 조이기를 요구하는 압력으로 여김으로써 가능했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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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디아의 비밀 비룡소 걸작선 21
E. L. 코닉스버그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비룡소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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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디아와 제이미는 우체국에서 나와 그랜트 센트럴 역으로 걸어가서 대합실 의자에 앉았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실멍이 컸다. 차라리 그 편지가 정중하지 않은 게 나았을 것이다. 무례한 편지였거나 비꼬는 편지였더라면 화라도 낼 수 있겠지만, 정중하기 그지없는 거절의 편지를 두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실 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클로디아는 울었다.

제이미는 클로디아를 잠시 내버려두었다. 제이미는 가만히 앉아서 마음을 다독이려 애쓰며 긴 의자의 숫자를 세었다. 클로디아는 계속 울었다. 제이미는 의자에 앉은 사람의 숫자를 세었다. 그래도 클로디아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제이미는 의자 한 개당 몇 사람씩 앉아 있는지 계산했다.

마침내 닭똥처럼 뚝뚝 떨어지던 눈물이 그치자, 제이미가 말했다."(p.157~158)


다시 읽어도 참 좋다. 

이번에 읽으면서 유독 와 닿았던 부분은 "제이미는 클로디아를 잠시 내버려두었다"는 저 구절이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꼽으라면 밑도 끝도 없이 우는 때, 적어도 지금까지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하지 못한 일을 꼽으라면 단연 '가만히 내버려두기'일 것 같다. 이제는 세 아이 다 그럴 나이가 지나서 우는 일도 드물지만, 기쁨이건 슬픔이건 그 감정을 온전히 소화할 만큼 아이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참지 못했다. 어떻게든 상황을 끝내고 재빨리 안정시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중요한 과정들을 생략해버리기 일쑤였다. 

제이미가 클로디아를 기다리며 하는 저 행동들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다 피식 웃음이 나왔는데, 돌연 나는 저만큼 견뎌내고 기다릴 수 있을까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나니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든든한 '부'로 뒷받침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너만 바라봐' 할 자신도 없지만, 생각해보면 가장 하기 쉽고 꼭 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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