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Das Parfum, 1985, 독일)
파트릭 쥐스킨트(Patrick Süskind, 1949- , 뮌헨)
강명순 역
열린책들
2006.5.10 두레문고

 

 


한 10년쯤 꾸물거렸나보다. 뭐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데, 읽기를, 사기를 굉장히 오랫동안 망설였다.
그리고 오늘 또 거의 1년 만에 미용실엘 갔다. 단골로 가는 미용실 디자이너 언니는 나처럼 뜨문뜨문 오는 손님도 얼굴을 기억하다니 눈썰미가 대단하다.
사실 미용실에 가기 싫은 건 물론 돈이 많이 든다는 경제적 이유가 가장 크지만, 거의 하루를 다잡아 먹는 시간이 아깝다는 이유도 무시할 순 없다. 그 시간에 내가 중요한 다른 무언가를 꼭 하지 않아도 말이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머리를 하고 앉아 있는게 너무너무 지루하다. 난 가끔 아주 절실하고 진심으로 내가 남자로 태어났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미용실에나 가야 1년에 한 번 볼 수 있는 잡지들은 그야말로 내겐 1년치 유행을 한꺼번에 알려주긴 한다. 그것들을 보고 있으면 내가 왠지 아주 잘못 살아왔구나 하는 느낌이 들면서, 살도 빼고, 예쁜 옷도 사고, 화장품도 장만하고, 팩도 만들어보고, 치마도 한 번 사보고 등등 여자로서의 반성(?)에서 앞으로의 인생 계획에 대한 당찬 결의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한다. 그렇지만 이런 결심들은 작심 3일도 못가는 시한부 결심이다.
그리고 대부분은, 내 몸매가 그런 유행을 받쳐주기엔 너무나 그.. 뭐랄까 부적절한 측면들을 갖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바, 잡지 속의 예쁜 언니들은 내가 범접할 수 없는 타자들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나는 집에서 책을 가져가기로 생각하고 집중이 잘 될만한하고, 4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는 얇은 책을 골라봤다. 얼마 전 책 주문할 때 딸려 온 도서목록. 따로 시간내서 읽기는 좀 뭐해서 미뤄두고 있었는데 잘됐다 싶었다. 그런데 지하철 네 정거장 가는 동안 보니 이게 생각보다 너무 재미없고 집중이 안되는 것이다.

핑계겸 나는 또 근처 서점으로 갔다. 책세상 문고나 살림총서 중에 하나, 만원이 안넘는 것으로 사야지 마음먹고 들어갔는데, 웬걸. 찜해놨던 책들이 여기저기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결국 40분을 서성였다. 온다 리쿠의 '밤의 피크닉', '바사리 평전', 플로베르의 '부바르와 페퀴셰', 진중권의 '시칠리아의 암소' 등등. 그중에서 심하게 나를 망설이게 한 건 요슈타인 가아더의 '이야기 파는 남자'였다. 한 다섯 번은 들었다 논 뒤 난 매몰차게 돌아섰다. 그랬는데 기둥 책꽂이에 열린책들 출판사의 책들이 보였다.  
거기에 '향수'가 있었다.
두 가지 판본이 나란히 꽂혀 있었는데, 하나는 양장본이고 하나는 올해 2월에 찍어낸 반양장본이었다. 반양장본은 프랑스의 뽀슈판처럼 종이가 누렇고 갱지같으며 특유의 냄새가 있다. 무엇보다 좋은 건 한손에 잡히는 크기에 '가볍다'는 것이다. 게다가 양장본보다 2천원이나 싸다(근데 제기랄, 인터넷 서점에선 양장본은 30%, 반양장은 10%를 에누리해서 결국엔 양장본이 더 싸네! 이럴땐 그냥 책은 값으로 따질 수 없다, 고 위안하는 수밖에).  
책 속을 열어보니 이 작고 촘촘한 글씨들이란! 너무 귀엽다. 활자와 행간의 집중력이 맘에 든다. 양장본보다 거의 90쪽 정도가 절약된 셈이다. 그만큼 잘려나가는 나무들도 줄어든다는 소리다.
반면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카프카의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는 행간이 너무 넓고, 거기다 사진자료가 있는 면은 검은바탕이라 그 면이 닿는 흰부분이 거뭇거뭇하다. 그리고 검은 잉크에서 나는 좋지 않은 냄새. 편지의 느낌을 살리려는 의도는 엿보이지만 왠지 '종이낭비'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고, 이런 게 맘에 안들면 가독성도 떨어진다.
왜 출판사들은 페이퍼북을 열심히 찍어내지 않은 걸까. 한때는 양장본을 선호한 적도 있다. 책꽂이에 꽂아놓으면 모양새가 더 그럴듯하니까. 근데 정말 읽기에는 좋지 않다. 특히 지하철 같은데서 들고 읽기에는 더더욱 좋지 않다. 그 두꺼운 겉표지의 무게감이란. 도판이나 사진이 없는 책의 경우는 정말이지 빤닥빤닥한 종이나 양장일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너무 멀리 옆길로 샜는데, 다시 '향수'로 돌아와서.
아주 아주 마음에 들었다. 한 손으로 들고 읽기에도 무리가 없고, 비닐캡으로 머리를 씌우고 판대기로 귀를 가리는 통에 자연스레 소리들이 차단돼서 집중도 잘됐다.
10년을 기다려 읽고, 사게 되었는데 기다린 보람이 있다.
이 책을 통해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이성보다 우위에 있는 '감각'의 자유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더불어, 싹둑 잘라버린 머리도 맘에 든다.
앞머리 관리가 좀 걱정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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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6-10-01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년 전 병원 응급실에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 때 친절한 의사 선생님이 빌려 주셨거든요

부엉이 2006-10-02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급실. 향수를 읽기엔 기묘한 장소네요. 책을 읽으실 정도였으면 위급한 상황은 아니었을 거라 상상하며 마음 놓습니다..^^;;

marine 2006-10-03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아니라 병명이 안 나와서 입원실로 못 가고 3일을 응급실에서 보낸 거였어요 대학병원은 진단명이 나와야 정식 입원이 된다더군요 당시 병명은 장티푸스였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