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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로 간 빨간 모자 ㅣ 산하작은아이들 16
조엘 포므라 지음, 백선희 옮김, 마르졸렌 르레이 그림 / 산하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고전의 힘은 튼튼한 뼈대와 내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꾸만 새로운 텍스트를 생산해 내게끔 하는 데 있는 것 같다. 샤를 페로의 '빨간모자' 이야기 역시 그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원작인 샤를 페로의 '빨간모자'는 이야기를 속속들이 파헤쳐 보면, 사실 굉장히 무서운 이야기다. 직접 겪지 않고도 머리에 쏙 들어올 교훈을 준다는 목적 치고는 좀 과하지 않나 싶다.
그래서 그림형제는 '나무꾼'이라는 존재를 덧붙여서 이야기를 순화시켰다. 동화는 꼭 해피엔딩이어야 한다는 법칙은 없지만 아무래도 이런 결말이라면 좀 더 마음이 놓인다.
<무대로 간 빨간모자>는 좀더 현대적인 색채를 가미했다. 빨간모자-엄마-할머니 이 세 여자의 관계는 단절되어 있다. 엄마는 너무 바빠서 빨간모자와 놀아줄 시간이 없고, 멀리 요양원에 보낸 자기 엄마를 찾아가서도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다.
엄마는 자기 아이에 대해 모른다. 파이를 만들어내면 할머니를 보러 혼자 가게 해주겠다는 엄마의 공허한 약속을 빨간모자가 얼마나 진실되게 믿고 있는지. 빨간모자의 마음은 엄마와 할머니를 담을 만큼 넓다는 사실도.
다시 원작의 이야기대로 빨간모자는 할머니를 만나러 혼자 길을 떠나고 늑대를 만난다. 그런데, 그 늑대는 눈이 너무나 아름답다. 아름다운 눈 때문에 빨간모자는 늑대의 흉한 모습과 시커먼 속내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토록 아름다운 눈이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비극적 아이러니마저 느끼게 할 정도다. 만약 '늑대는 시커먼 털과 날카로운 이빨을 가졌다'는 식의 묘사를 했더라면 거기서는 익히 알고 있는 무서움, 즉 학습된 무서움밖에는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늑대의 계획을 간파하고 있는 독자한테는 빨간모자의 눈을 가려버리는 그 아름다운 눈이 더욱 소름끼치게 느껴진다.
이제 할머니를 잡아먹은 늑대는 빨간모자를 구슬린다. 아이와 늑대의 동문서답식 대화는,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무서웠던 부분이다. 죽음의 손길을 조금씩 죄어오는 늑대의 조바심난 마음, 대화 중간에 빨간모자가 울먹이며 갑작스레 내뱉는 "엄마가 보고싶어요."라는 말. 하지만 엄마는 빨간모자한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다. 그 공허한 메아리가 위험에 홀로 노출되어 있는 빨간모자의 상황을 더욱 긴박하게 만든다.
결말은 그림형제의 이야기를 따랐다. 빨간모자는 샤를 페로가 말하는 '낯선 사람을 경계하라'는 교훈보다 '단절'의 공포를 마음 깊이 새겨넣은 것 같다. 어른이 된 빨간모자는 자기 엄마와는 달리 할머니가 된 엄마를 멀리 두지 않는다.
바쁜 엄마가 많아진 요즘 세상. 바쁜 엄마를 둔 아이들의 시선을 잘 포착했고, 잔혹동화의 요소도 가미하여 고전동화 '빨간모자'를 새롭게 본 시각이 신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