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한낮의 연애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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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의 노래 <이별 공식>의 가사엔 이런 내용이 있다 (킁킁, 아재 냄새). '이별 장면에선 항상 비가 오지 열대 우림 기후 속에 살고 있나. (...) 햇빛 눈이 부신 날에 이별해봤니 비오는 날보다 더 심해. 작은 표정까지 숨길 수가 없잖아.'

햇살 쨍쨍한 한낮은 아름답지만 그 속에선 웃음 이외의 표정은 허락되지 않는다. 한낮의 슬픔, 한낮의 분노, 한낮의 부끄러움, 한낮의 체념, 모두 있을 수는 있지만 낮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삶에서 얻는 모욕은 햇살처럼 언제나 우리를 비추고 있다. 우리는 남몰래 울거나 화내거나 하며 표정을 감추고 살아야 할 뿐이다.

김금희 소설집 『너무 한낮의 연애』의 세계에선 모욕이 일상화되어 있다. 표제작 「너무 한낮의 연애」에선 무덤덤한 양희와 세속적인 필용이 나온다. 양희는 무심하게 사랑을 고백하고 무심하게 사랑을 철회한다. 모욕 받았다고 느낀 필용은 한낮의 맥도날드에서 양희에게 악담을 퍼붓는다. 십수 년의 시간이 지나고 필용은 회사에서 한직으로 좌천 당한다. 모욕을 감내해야 할 때 우연히, 운명처럼 양희의 연극을 보게 된다. 우리는 갑자기 받은 모욕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걸까.

때로 견딘다는 건 조용한 투쟁이기도 하다. 「조중균의 세계」의 조중균씨는 괴짜에 외톨이다. 세속적인 화자는 외톨이인 그를 이해할 수 없지만 그의 사연을 듣고 나서 그제야 조금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는 부당함에 대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조용히 항거하고 있었다. 복수를 잊어버리지 않았고, 빈 시험지에 자신의 이름만 적지 않았고, 식사를 하지 않았음과 나태하지 않았음을 고집스럽게 직접 확인받고자 했다. 그의 세계에선 긍정적인 것이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부당한 것은 없다. 부당함에 고개 숙이지 않고 그것을 묵묵히 삶의 밖으로 밀어내는 조중균의 세계는 숙연하고 아름답다.

「세실리아」의 세실리아는 애인 있는 남자를 사랑했다는 이유로 동아리에서 따돌림당하고 「반월」의 이모는 무언가 모호하고 알 수 없는 것을 견디며 섬에서 산다. 「고양이는 어떻게 단련되는가」의 모과장은 생산직으로 좌천당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불행은 설명되지 않고 이유 없이 찾아온다. 그야말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속물적이고 폭력적이고 돼먹지 않은 세계(147)'다. 소설은 느닷없이 찾아오는 모욕을 어떻게 견뎌야 하느냐고 반복해서 묻고, 대답처럼 여러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세실리아는 실컷 웃으며 술 마시고 나서 화자에게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말하고, 이모는 아들을 만나지 않고 전화조차 받지 않는다. 모과장은 회사가 원하는 대로 어려운 기능사 자격증을 따고, 고양이를 찾아주는 일에 몰두한다. 삶을 인정하고, 그립지만 아픈 것들과 단호하게 선을 그음으로써 이들에게 모욕은 '그냥 그런 보통의 일(222)'이 된다.

다시 표제작 「너무 한낮의 연애」로 돌아오자. 필용은 맥도날드에서의 막말을 사과하기 위해 양희의 문산 집으로 찾아간다. 굉장히 가난한 양희네 집을 보고 숙연해진 필용에게 양희는 "사과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이런 나무 같은 거나 봐요."라고, "나무 앞에서는 부끄럽지 않고, 비웃질 않으니까 나무나 보라고요."라고 말한다. 십수 년이 지나 필용은 관객 참여형 연극 무대에서 양희와 마주한다. 세상으로부터 모욕 받는 필용은 나무로 분한 양희를 보고 나와 걸을 때 울음이 터진다. 양희는 나무처럼 성숙한 용서를 했었고, 지금은 성숙한 위로를 하는 것이다. 필용은 비로소 지나간 양희와의 시간의 의미를 깨달았지만 지금은 슬퍼하기도, 다시 사랑하기도 애매한 너무 한낮이다.

인간은 불행과 모욕 앞에서 '고양이처럼 단련'되지 않는다. 잊을 수도 없다. '이미 봤는데, 이미 들었는데'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다만 우리는 인생의 쓴 부분을 인정하고 견딤으로써 삶의 중요한 부분을 지켜야 할 뿐이다. 견디는 건 나뿐만이 아니다. 모두가 견디고 있는 세상이다. 작가는 나무는 'ㅋㅋㅋ'하고 웃지 않는다고 했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적어도 웃지 않는 것, 어설픈 위로보단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절실하다. 남이 울어도 쳐다보지 않아야 나도 언젠가 편히 울 수 있다. 이것이 어차피 울어야 하는 인간이 울기엔 너무 환한 한낮을 살아가는 방법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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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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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작가의 데뷔작 『표백』을 읽었을 땐 글에 일정 부분 공감하기도 했지만, 글이 청년세대의 좌절감을 부채질하기만 하는 것 같아 불편하기도 했었다. 그러니까 청년세대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너무나 노골적인 글로 보였다는 이야기다. 만날 민족 정서를 자극해서 책 파는 김진명 작가의 변형 같기도 했고.

2015년 5월에 발간된 『한국이 싫어서』도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글이라는 점에선 이전 작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은 청년세대의 좌절감을 이야기하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좀 더 나아가 광범위한 한국 사회의 폐부를 찌르는 데 아마 우리들 대부분은 이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이 책은 가난하고 그저 그런 학벌의 20대 여성이 한국에서의 삶에 환멸을 느끼고 호주로 이민을 가는 이야기다. 책에 묘사된 한국 직장생활과 서민의 삶도 앞이 안 보이지만 한국에서도 호주에서도 서로를 괴롭히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한국인의 민도는 더욱 암담하게 느껴진다.

나 역시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초식동물을 벗어나지 못하는 계층이다. 잘 되어도 사자는 죽어도 될 수 없고, 남이 건들기 힘든 코뿔소 같은 초식동물이나 되면 다행이다. 사회는 약육강식의 정글이지만 구성원의 대부분은 초식동물이다. 그렇기에 특히 젊은이를 위시한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이 책의 담론-헬조선 담론-이 절절히 와 닿을 것이다. 어쨌거나 한국이 싫어도 우리는 한국에서 살아야 하고, 그게 비록 초식동물의 삶일지라도 적어도 마음이나마 편하게 풀 뜯어 먹으며 살고 싶으니까.

이전 작보다 일침은 더 날카롭고 통렬해졌다. 문장도 훨씬 세련돼졌다. 읽히는 글을 쓰려면 먼저 유명해져야 한다고 기존 문단 권력을 비판했던 장강명 작가는 시의성을 누구보다 잘 꿰뚫는 이야기들을 써냈고, 그로 인해 이제는 확실히 '읽히는' 작가가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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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이 아닌 모든 것
이장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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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려면 적어도 몇 권의 책을 읽어야 하는 걸까요? 저는 김훈, 박민규, 한강을 좋아합니다. 좋아해서 찾아 읽다 보니 어느새 더 읽을 책이 없을 정도입니다 하하. 반면에 딸랑 세 권 읽은 작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어떨까요. 이장욱은 다작하는 편이 아니지만 그렇다 쳐도 세 권은 적긴 적네요. 단편 두 권, 장편 한 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이장욱은 제가 좋아하는 작가라 말할 수 있습니다. 문예지에 실린 그의 단편은 늘 기대됩니다. 

단편은 읽기 쉬워 사람들이 선호하는 장르지만 잘 쓰인 장편 소설이 긴 서사 끝에 주는 감동을 기대하긴 힘듭니다. 또한 그저 그런 단편 소설은 읽어도 기억에 잘 남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분명 단편 소설엔 그것만의 카타르시스가 있습니다. 정교하게 축조된 짧은 이야기만의 재기 넘치는 느낌과 뭉클함이 있죠. 전 많은 단편 소설을 읽었지만 대부분 머릿속에서 쉽게 휘발되는 바람에 (ㅎㅎ) 강렬한 인상으로 온전하게 기억하는 단편 소설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꼽아볼까요? 저의 인생 소설인 박민규의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가 무조건 먼저입니다 헤헤. 그 밖에는 김연수의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김훈의 「영자」, 이기호의 「김박사는 누구인가?」 정도뿐이군요. 이장욱을 빼면 말입니다. 이장욱의 이전 소설집에 수록된 「고백의 제왕」, 「변희봉」과 이번 소설집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의 「절반 이상의 하루오」, 「우리 모두의 정귀보」를 최고의 단편 소설 리스트에 주저 없이 포함 시킬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이장욱의 단편 소설은 좋습니다.

사실 이 책을 읽은 건 3월 말인데, 왠지 감이 안 잡혀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문득 생각해보니 이 책의 화두는 기억하는 방법인 듯합니다. 표제작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 는 방화 사건으로 체포된 박물관 관리 직원의 독백입니다.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오히려 맹렬하게 기린에 대해 생각하죠. 화자는 초반부터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겠다고 하며 자신의 비뚤어진 성장담을 이야기합니다. 그의 인생은 거짓 증언으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이번엔 기린불이 놓인 자리에 방화를 했는데, 불탄 자리에 기린불의 잔해가 없습니다. 과연 그는 기린불을 태워 없앤 것일까요, 절도를 숨기기 위해 방화를 한 걸까요. 이 이야기는 농밀한 자기 고백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기억을 타자에게 강요할 때 발생하는 폭력의 우화이기도 합니다.

「절반 이상의 하루오」는 인도 여행에서 만난 일본인 하루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루오의 외할아버지는 미국인이었고, 어머니는 오키나와 태생이었습니다. 어딘지 일본인 답지 않은 하루오는 말합니다. "절반 이상의 하루오는 어딘지 다른 하루오"라고 말입니다. 전통시장에서 현지인과 섞여 장사를 하고, 갠지스 강을 멀뚱히 떠내려가는 하루오는 차라리 현지인 같습니다. 엉뚱한 하루오의 절반 이상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어디서든 그의 절반은 보는 사람의 몫입니다. 하루오는 "아름다운 건, 하루오를 제외한 모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하루오의 절반 이상을 경험했고 그가 아름답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정귀보」는 무명이었다가 사후에 유명해진 화가 정귀보의 평전 집필을 부탁받은 작가의 시점에서 진행됩니다. 그의 '놀랄 만큼 단조로운' 인생이 어떻게 사후에 유명해졌는지, 유년기부터 회고합니다. 평범한 남자처럼 여러 여자들과 연애하다 이별하고, 차이기도 하고, 작가로선 별 볼 일 없었습니다. '벨다른 이유는 읎'이 화가의 길을 선택한 정귀보의 인생을 증언과, 유작 등으로 재구성하려 하지만 그의 죽음이 자살인지 실족사인지도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의 화자는 자신의 기억을 타자에게 백 퍼센트 강제하기에 우리는 그를 신뢰할 수 없습니다.「절반 이상의 하루오」에선 하루오의 삶과 우리의 기억이 절반씩 조화를 이루고, 그래서 하루오에 대한 기억은 왠지 늘 뭉클합니다. 「우리 모두의 정귀보」에선 정귀보의 목소리가 아예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까요. 이처럼 본인의 목소리가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 '남의 목소리'만으로 그 사람의 생을 재구성하기란 얼마나 우습고 말이 안 되는 일입니까. 평전 집필 작가는 정귀보의 시신을 두 눈으로 보고, 정귀보가 죽음을 맞기 전날 밤 혼자 술을 마셨다는 주점에 가본 뒤에야 정귀보를 조금 이해할 것 같다고 말합니다. 타자에 대해 말하려면 적어도 그 사람이 처했던 상황에 자신을 놓아봐야 합니다. 타자를 진정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할 때 '정귀보'는 '우리 모두의 정귀보'가 됩니다. 이 소설집은 때론 기억을 편리하게만 이용하며, 겪지 않고 남에 대해 쉽게 이야기하곤 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키가 작고 몸이 왜소했어. 몸무게의 변화는 별로 없는 편이었는데, 최근 몇 개월간 체중이 확 줄었지. 종양 때문인 게 틀림없어. 옥시콘틴 같은 마약성 진통제가 서랍에 쌓여 있었으니까. 머리카락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고, 휴대전화는 폴더식 구형이 확실해. 카드는 두 개. 하나는 거래 은행의 비자카드고 다른 하나는 오케이캐시백 적립용이지. 오케이 캐시백이라니. 옥시콘틴의 세계와 오케이캐시백의 세계는 대체 얼마나 먼 것일까? 하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샴쌍둥이처럼 붙은 세계인지도 모르지. 마약성 진통제와 오케이캐시백의 아름다운 조화 속에 인생이 있는지도 모르니까. 죽어가면서도 습관처럼 오케이캐시백 포인트를 적립하는 게 빌어먹을 인생이라는 것이니까. 4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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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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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이라기보단 왠지 소설에 대한 잡담이 될 것 같군요. 잡담을 굳이 쓰고자 하는 건 정말로 지루한 주말이기 때문입니다. 주말을 함께 하는 밀란 쿤데라도 지루하구요 하하. 최근에 다시 읽은 건 아닙니다. 그럼에도 소설의 인상 깊은 장면들은 모두 머릿속에 남아 있고, 언제든지 꺼낼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여러 번 읽었기 때문이죠. 지금은 단지 새로운 걸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웬만해선 읽은 책을 다시 읽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읽기'는 아주 적은 양의 독서를 할 때 습관입니다. 독서에서 온전히 재미만을 추구할 때였죠. 이 책은 여러 번 읽어도 질리지 않고 재밌습니다. 제가 여러 번 반복해서 읽은 책은 몇 권 되지 않습니다. 잭 런던의 『야성의 절규』, 양귀자의 『모순』과 『희망』,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윤대녕의 『미란』 정도 군요. 여기에 『칼의 노래』를 더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이 소설의 무엇이 그렇게 제 마음을 흔든 건지 얘기해볼까요.

1. 문장

소설이 대개 그렇지만, 김훈의 소설은 특히 비정한 이야기뿐입니다. 이런 엄혹한 내용을 담은 문장을 미문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정반합을 이용한 김훈의 문장은 분명 아름답습니다. 책의 어느 곳을 펼쳐봐도 한눈에 김훈이 썼다는 걸 알 수 있죠. 문장만으로 그것의 주인을 알아볼 수 있게 쓰는 작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김훈 말고는 박민규 정도밖엔 떠오르지 않는군요. 맞습니다. 김훈은 단순히 문장을 잘 쓰는 걸 넘어선 스타일리스트입니다. 특히 제가 이 책에서 좋아하는 문장은 소설을 여는 첫 문장입니다. 어떤 기사를 보니 한국인이 좋아하는 첫 문장 TOP 10 안에 들었더군요. 『설국』, 『이방인』, 『7년의 밤』, 『인간 실격』 등 모두 멋진 첫 문장들을 뽐내지만 그래도 저는 김훈의 첫 문장을 제일 좋아합니다. 읽으신 분들이 많겠지만 다시 읽어볼까요.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김훈은 이 문장을 두고 오래 고민했다고 합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로 쓸지,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로 쓸지 말입니다. 조사 '은'과 '이'의 차이밖에 없지만 뉘앙스 차이는 상당합니다. 꽃'은' 피었다고 말하면 섬들이 버려진 작금의 상황이 부정적인 것이 됩니다. 반면 꽃'이' 피었다고 말하면 상황에 대한 주관적 평가는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단지 섬은 버려진 것이고, 꽃이 피어난 것이지요. 오랜 기자 생활을 했던 김훈 아재는 후자를 선택합니다. 놓인 상황을 관조합니다. 이 객관성과 단순성이야말로 김훈 문장의 아름다움입니다.

2. 인간 이순신

아주 뻔한 이야기군요. 인간으로서 이순신이 갖는 고뇌를 잘 나타냈다는 말입니다. 뭘 어떻게 써놨길래 우리의 영웅 이순신이, 인간 이순신으로 변하게 되는 걸까요. 저는 코찔찔이 시절부터 위인전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이순신 편은 특히 많이 읽었죠. 무릇 사내 아이란 전쟁 영웅에 끌리게 되어있는 법이니까요 하하하. 위인전 속 이순신은 젊었을 때부터 무용을 뽐내며 여진족을 때려잡고, 낙마했지만 상남자 답게 부러진 정강이를 동여매는가 하면, 모함에 백의종군하게 되나 무난히(?) 연전 연승합니다. 사실이 그런 거라고 말하면 어쩔 수 없지만, 별로 인간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차라리 초인이라는 말이 정확할 것입니다. 저는 캡틴 헬조선이라고 부르고 싶군요 하하하.

그럼 김훈이 쓴 이순신은 어떨까요. 여자와 섹스하고, 고문으로 망가진 몸 때문에 잠자리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과음 후 구토하고, 먹을 것이 없어 장졸들이 굶을 때 먹는 끼니를 무안해하고, 사로잡은 적 청년 무사를 살리고 싶어 속으로 안달합니다. 이전의 어떤 매체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평범한 인간의 생리들입니다. 김훈의 문장에서 이순신은 캡틴 헬조선의 경지에서 내려와 비로소 범인凡人의 자리에 안착합니다.

특히 제가 좋아하는 장면은 이순신이 예비 전장 시찰하러 잔잔한 강물을 거슬러 올라갔을 때 마을에 들러 국밥을 먹는 장면입니다. 갑자기 저도 콩나물국밥 먹고 싶어지네요... 가 아니라 소설 이야기를 해야지. 장면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아낙이 쌀을 씻어 밥을 짓는 동안 나는 장터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송여종이 멍석을 구해와 깔아주었다. 나는 멍석에 누웠다. 백성들은 다투고 웃고 욕지거리를 하며 하루의 거래를 마무리짓고 있었다. 밥이 익는 향기 속에 시장기가 솟아났다. 그리고 노곤한 졸음이 몰려왔다. 나는 장터 멍석 위에서 잠들었다. 봄볕이 이불처럼 따스했다. 송여종이 잠든 나를 흔들어 깨웠다.

간이 어떠하실는지....

아낙이 멍석 위에 밥상을 차렸다. 나는 그 장터에서 송여종, 안위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아낙이 국밥 열 그릇을 말아서 나룻배편으로 격군들에게 보냈다. 말린 토란대와 고사리에 선지를 넣고 끓인 국이었다. 두부도 몇 점 떠 있었다. 거기에 조밥을 말았다. 백성의 국물은 깊고 따뜻했다. 그 국물은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온 진액처럼 사람의 몸 속으로 스몄다. 무짠지와 미나리 무침이 반찬으로 나왔다. 좁쌀의 알들이 잇새에서 뭉개지면서 향기가 입 안으로 퍼졌다. 조의 향기는 안쓰러웠다. 아낙이 뜨거운 국물을 새로 부어주었다. 나는 짠지를 씹었다. 봄의 짠지 속에 소금의 간은 가볍고 싱싱했다. 안위는 세 번째 밥그릇을 내밀었다. 국에 만 밥을 넘길 때 창자 속에서 먹이를 부르는 손짓을 나는 느꼈다. 나는 포식했다. 돌아갈 때 안위는 쌀 한 봉지를 아낙에게 주었다. 어디까지 가시는지, 내려갈 길에 또 들르시라고 아낙은 말했다.'

문장 어디에서도 영웅의 면모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저 시장하며 졸리고, 백성의 국물이 진액처럼 몸에 스미고, 쌀이 부족해 조를 섞어 지은 조밥의 향기가 안쓰럽고, 포식했을 뿐입니다. 뭐 하나 직접적인 말은 없지만 전쟁통에서도 백성들은 버려진 섬마다 꽃이 핀 것처럼 살아가고, 이순신은 그런 백성을 애정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저는 이 문단을 좋아합니다.

3. 비굴한 이순신

크게 보면 인간 이순신 단락과 마찬가지 이야기지만 왠지 따로 이야기하고 싶군요. 『칼의 노래』 를 원작으로 한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김명민을 스타로 만들어준 드라마지요. 김훈도 『칼의 노래』로 문단의 스타가 됐으니 이래저래 이순신은 필승 카드가 맞습니다. 앗, 그러고 보니 영화 <명량>은 최다 관객 수를 기록했군요. 물론 저도 봤습니다만, 영화의 국뽕 함량이 치사량에 가까운 수준이라 여러분께 별로 추천해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불멸의 이순신>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쩌다 보니 우연히 딱 한 장면만 스치듯 보게 됐습니다. 바로 이순신이 진린의 배 안에서 그에게 칼을 겨누고 결연히 외치는 장면이었죠. 드라마는 보지 않았지만 그게 어떤 장면이고 어떻게 왜곡된 건지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장면은 진린이 왜구의 수급을 넘겨받기로 했고, 그걸 통제공에게도 드릴 테니 굳이 추격전을 펼치지 말자고 이순신에게 말한 직후 장면입니다. 당시엔 전공을 적의 수급(머리)으로 평가했고 이는 명과 조선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조선-명 연합군의 마지막 추격을 막기 위해 명나라 사령관 진린에게 수급 수천을 넘겨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진린의 입장에선 싸우지 않으면 자신의 병력이 상하지 않아서 좋고, 더욱이 적의 수급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기에 거절할 필요가 없었던 제안이지요. 그러나 이순신의 생각은 다릅니다. 잘린 머리의 국적은 확인할 수도, 확인할 필요도 없습니다. 적이 넘기기로 한 수급은 일본인들의 것이 아니라 잡혀있는 조선인 포로의 머리가 될 것이기 때문에 이순신으로선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입니다.

드라마에선 진린의 말을 들은 이순신이 칼을 뽑습니다. 과연 대국의 장수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불의에 무릎 꿇지 않는 영웅답습니다. 하지만 씁쓸합니다. 영웅의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해 비현실적인 장면을 삽입한 것이니까요. 반면 소설에서는 이순신이 무릎을 꿇고 빕니다. 조선군만으로 추격하겠으니 수급을 받지 말아달라고 말입니다. 자꾸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 이야기만 해서 죄송하지만 넥스트 노래 이야기를 덧붙여 볼까요. 신해철이 쓴 <The hero>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죽지 않고 비굴하지 않은 나의 영웅'
'무릎을 꿇느니 죽음을 택하던'

우리는 이순신이 항상 영웅이길 바랐고, 드라마도 대중의 욕구에 부합했을 뿐입니다. 김훈은 이순신의 영웅 서사를 정면으로 거부합니다. 김훈의 이순신은 비굴하고, 무릎 꿇고, 죽습니다.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김훈이 쓴 대로 '적의 칼과 임금의 칼 사이에서 바다는 아득히 넓었고 몸 둘 곳 없었'기 때문일까요. 일부 후세의 역사가들은 자살설까지 말할 정도입니다. 전 동의하지 않지만요 (ㅎㅎ).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욕망이 투영된 비극적 영웅 서사를 현시대에서도 종종 목도합니다. 대중의 기대와 희망이 빚은 사회적 타살 말입니다. 전원책 변호사는 배우 최진실, 전 대통령 노무현의 죽음이 그랬다고 말합니다. 저는 돈키호테 같던 성재기의 죽음도 떠오르는군요. 물론 그들의 죽음을 모두 타살로 치부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대중은 분명 그들의 인간적 면모를 들여다보길 거부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을 뿐이군요.

한 사람의 인간적 면모를 모두 말소해버리는 오류는 예술 작품에서 더 확연합니다. 이순신 역시 그래왔지요. 그렇기에 김훈의 이순신은 다른 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단독성을 지닙니다. 이렇게 주절주절 떠들고 나니 또 읽고 싶어지는군요. 다음에 부모님 집에 내려가면 『칼의 노래』를 챙겨 올라와야겠습니다. 다들 즐거운 일요일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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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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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죽어서 묻히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장례식에 모인 조촐한 가족, 친지들의 감정은 다양하다. 슬픔, 사랑, 증오. 평범한 사람(everyman)이었던 그의 삶은 어땠을까. 이야기는 유년기로 거슬러 올라가 한 남자가 살며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는 살며 세 번의 결혼과 이혼을 겪는다. 첫 번째 이혼 후 만난 두 번째 부인 피비는 그와 딸에게 충실한 여자였다. 그러나 그가 쉰이 되었을 무렵 권태기가 찾아오고 자신에게 강렬한 성적 욕망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는 그것에 솔직하고도 충실했다. 그는 왜 성적 욕망에 탐닉할까. 삶이 느슨해졌을 때 찾아온 욕망을 이행함으로써 자신이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이유야 어찌 됐든 그것은 결국 그를 몰락으로 이끈다. 외도가 발각되고 쫓기듯 한 세 번째의 결혼에서도 그는 실패한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싶다. 조깅하던 젊은 여자를 유혹한다. 실패한다. 어느 순간 돌이켜보니 그는 늙어 있다. 신체는 질병에 시달리기 시작하고 홀로 남은 그의 삶은 비참해진다.

그는 탈장 수술을 받던 소년 시절부터 늘 주변의 죽음에 둘러 싸여 있었다. 자신도 많은 질병으로 내내 고통받는다. 노년에 주변인의 죽음을 하나, 둘 목도하던 그는 자신의 죽음도 머지않았음을 안다. 주위엔 아무도 없다. 그제야 늙는 것이란 단지 신체적으로만 원치 않았던 모습으로 쪼그라드는 게 아님(164p)을 깨닫는다. 이리도 비참한 노년은 마치 대학살 같다 (162p).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므로 보편적이다. 동시에 죽음은 당사자의 일이며 다른 사람이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죽음은 개별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죽음 앞에 모두 평범한 사람이지만 진정 평범한 사람으로 죽기는 두려워한다. 어떻게든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고 족적을 남기고 싶어 한다. 소설 속 그는 망각을 걱정하는 일은 일흔다섯에 가서 하면 돼! (39p)라고 외쳤다. 그러나 그 말은 어김없이 돌아와 그를 찌른다. 삶에 불행은 필연적이다. 버티고 서서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83p).

작가는 노년의 허우적거림을 치부를 까발기듯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인생의 기로마다 욕망대로 움직이며 주변인들을 고통스럽게 만든 그에게 내려진 업보 같지만, 통쾌한 느낌은 없다. 안쓰러울 뿐이다. 흔해빠진 죽음 앞에선 나 또한 평범한 에브리맨이기에. 나는 과연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초연할 수 있을까? 그때는 젊음을 갈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신할 수 없다.

사람들은 벚꽃에 환호한다. 짧은 시간 동안 피어 있다 지기 때문이다. 부재는 존재를 증명한다. 죽음이 있기에 살아있는 날들은 빛난다. 치킨을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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