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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서평이라기보단 왠지 소설에 대한 잡담이 될 것 같군요. 잡담을 굳이 쓰고자 하는 건 정말로 지루한 주말이기 때문입니다. 주말을 함께 하는 밀란 쿤데라도 지루하구요 하하. 최근에 다시 읽은 건 아닙니다. 그럼에도 소설의 인상 깊은 장면들은 모두 머릿속에 남아 있고, 언제든지 꺼낼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여러 번 읽었기 때문이죠. 지금은 단지 새로운 걸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웬만해선 읽은 책을 다시 읽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읽기'는 아주 적은 양의 독서를 할 때 습관입니다. 독서에서 온전히 재미만을 추구할 때였죠. 이 책은 여러 번 읽어도 질리지 않고 재밌습니다. 제가 여러 번 반복해서 읽은 책은 몇 권 되지 않습니다. 잭 런던의 『야성의 절규』, 양귀자의 『모순』과 『희망』,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윤대녕의 『미란』 정도 군요. 여기에 『칼의 노래』를 더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이 소설의 무엇이 그렇게 제 마음을 흔든 건지 얘기해볼까요.
1. 문장
소설이 대개 그렇지만, 김훈의 소설은 특히 비정한 이야기뿐입니다. 이런 엄혹한 내용을 담은 문장을 미문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정반합을 이용한 김훈의 문장은 분명 아름답습니다. 책의 어느 곳을 펼쳐봐도 한눈에 김훈이 썼다는 걸 알 수 있죠. 문장만으로 그것의 주인을 알아볼 수 있게 쓰는 작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김훈 말고는 박민규 정도밖엔 떠오르지 않는군요. 맞습니다. 김훈은 단순히 문장을 잘 쓰는 걸 넘어선 스타일리스트입니다. 특히 제가 이 책에서 좋아하는 문장은 소설을 여는 첫 문장입니다. 어떤 기사를 보니 한국인이 좋아하는 첫 문장 TOP 10 안에 들었더군요. 『설국』, 『이방인』, 『7년의 밤』, 『인간 실격』 등 모두 멋진 첫 문장들을 뽐내지만 그래도 저는 김훈의 첫 문장을 제일 좋아합니다. 읽으신 분들이 많겠지만 다시 읽어볼까요.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김훈은 이 문장을 두고 오래 고민했다고 합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로 쓸지,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로 쓸지 말입니다. 조사 '은'과 '이'의 차이밖에 없지만 뉘앙스 차이는 상당합니다. 꽃'은' 피었다고 말하면 섬들이 버려진 작금의 상황이 부정적인 것이 됩니다. 반면 꽃'이' 피었다고 말하면 상황에 대한 주관적 평가는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단지 섬은 버려진 것이고, 꽃이 피어난 것이지요. 오랜 기자 생활을 했던 김훈 아재는 후자를 선택합니다. 놓인 상황을 관조합니다. 이 객관성과 단순성이야말로 김훈 문장의 아름다움입니다.
2. 인간 이순신
아주 뻔한 이야기군요. 인간으로서 이순신이 갖는 고뇌를 잘 나타냈다는 말입니다. 뭘 어떻게 써놨길래 우리의 영웅 이순신이, 인간 이순신으로 변하게 되는 걸까요. 저는 코찔찔이 시절부터 위인전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이순신 편은 특히 많이 읽었죠. 무릇 사내 아이란 전쟁 영웅에 끌리게 되어있는 법이니까요 하하하. 위인전 속 이순신은 젊었을 때부터 무용을 뽐내며 여진족을 때려잡고, 낙마했지만 상남자 답게 부러진 정강이를 동여매는가 하면, 모함에 백의종군하게 되나 무난히(?) 연전 연승합니다. 사실이 그런 거라고 말하면 어쩔 수 없지만, 별로 인간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차라리 초인이라는 말이 정확할 것입니다. 저는 캡틴 헬조선이라고 부르고 싶군요 하하하.
그럼 김훈이 쓴 이순신은 어떨까요. 여자와 섹스하고, 고문으로 망가진 몸 때문에 잠자리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과음 후 구토하고, 먹을 것이 없어 장졸들이 굶을 때 먹는 끼니를 무안해하고, 사로잡은 적 청년 무사를 살리고 싶어 속으로 안달합니다. 이전의 어떤 매체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평범한 인간의 생리들입니다. 김훈의 문장에서 이순신은 캡틴 헬조선의 경지에서 내려와 비로소 범인凡人의 자리에 안착합니다.
특히 제가 좋아하는 장면은 이순신이 예비 전장 시찰하러 잔잔한 강물을 거슬러 올라갔을 때 마을에 들러 국밥을 먹는 장면입니다. 갑자기 저도 콩나물국밥 먹고 싶어지네요... 가 아니라 소설 이야기를 해야지. 장면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아낙이 쌀을 씻어 밥을 짓는 동안 나는 장터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송여종이 멍석을 구해와 깔아주었다. 나는 멍석에 누웠다. 백성들은 다투고 웃고 욕지거리를 하며 하루의 거래를 마무리짓고 있었다. 밥이 익는 향기 속에 시장기가 솟아났다. 그리고 노곤한 졸음이 몰려왔다. 나는 장터 멍석 위에서 잠들었다. 봄볕이 이불처럼 따스했다. 송여종이 잠든 나를 흔들어 깨웠다.
간이 어떠하실는지....
아낙이 멍석 위에 밥상을 차렸다. 나는 그 장터에서 송여종, 안위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아낙이 국밥 열 그릇을 말아서 나룻배편으로 격군들에게 보냈다. 말린 토란대와 고사리에 선지를 넣고 끓인 국이었다. 두부도 몇 점 떠 있었다. 거기에 조밥을 말았다. 백성의 국물은 깊고 따뜻했다. 그 국물은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온 진액처럼 사람의 몸 속으로 스몄다. 무짠지와 미나리 무침이 반찬으로 나왔다. 좁쌀의 알들이 잇새에서 뭉개지면서 향기가 입 안으로 퍼졌다. 조의 향기는 안쓰러웠다. 아낙이 뜨거운 국물을 새로 부어주었다. 나는 짠지를 씹었다. 봄의 짠지 속에 소금의 간은 가볍고 싱싱했다. 안위는 세 번째 밥그릇을 내밀었다. 국에 만 밥을 넘길 때 창자 속에서 먹이를 부르는 손짓을 나는 느꼈다. 나는 포식했다. 돌아갈 때 안위는 쌀 한 봉지를 아낙에게 주었다. 어디까지 가시는지, 내려갈 길에 또 들르시라고 아낙은 말했다.'
문장 어디에서도 영웅의 면모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저 시장하며 졸리고, 백성의 국물이 진액처럼 몸에 스미고, 쌀이 부족해 조를 섞어 지은 조밥의 향기가 안쓰럽고, 포식했을 뿐입니다. 뭐 하나 직접적인 말은 없지만 전쟁통에서도 백성들은 버려진 섬마다 꽃이 핀 것처럼 살아가고, 이순신은 그런 백성을 애정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저는 이 문단을 좋아합니다.
3. 비굴한 이순신
크게 보면 인간 이순신 단락과 마찬가지 이야기지만 왠지 따로 이야기하고 싶군요. 『칼의 노래』 를 원작으로 한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김명민을 스타로 만들어준 드라마지요. 김훈도 『칼의 노래』로 문단의 스타가 됐으니 이래저래 이순신은 필승 카드가 맞습니다. 앗, 그러고 보니 영화 <명량>은 최다 관객 수를 기록했군요. 물론 저도 봤습니다만, 영화의 국뽕 함량이 치사량에 가까운 수준이라 여러분께 별로 추천해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불멸의 이순신>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쩌다 보니 우연히 딱 한 장면만 스치듯 보게 됐습니다. 바로 이순신이 진린의 배 안에서 그에게 칼을 겨누고 결연히 외치는 장면이었죠. 드라마는 보지 않았지만 그게 어떤 장면이고 어떻게 왜곡된 건지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장면은 진린이 왜구의 수급을 넘겨받기로 했고, 그걸 통제공에게도 드릴 테니 굳이 추격전을 펼치지 말자고 이순신에게 말한 직후 장면입니다. 당시엔 전공을 적의 수급(머리)으로 평가했고 이는 명과 조선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조선-명 연합군의 마지막 추격을 막기 위해 명나라 사령관 진린에게 수급 수천을 넘겨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진린의 입장에선 싸우지 않으면 자신의 병력이 상하지 않아서 좋고, 더욱이 적의 수급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기에 거절할 필요가 없었던 제안이지요. 그러나 이순신의 생각은 다릅니다. 잘린 머리의 국적은 확인할 수도, 확인할 필요도 없습니다. 적이 넘기기로 한 수급은 일본인들의 것이 아니라 잡혀있는 조선인 포로의 머리가 될 것이기 때문에 이순신으로선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입니다.
드라마에선 진린의 말을 들은 이순신이 칼을 뽑습니다. 과연 대국의 장수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불의에 무릎 꿇지 않는 영웅답습니다. 하지만 씁쓸합니다. 영웅의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해 비현실적인 장면을 삽입한 것이니까요. 반면 소설에서는 이순신이 무릎을 꿇고 빕니다. 조선군만으로 추격하겠으니 수급을 받지 말아달라고 말입니다. 자꾸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 이야기만 해서 죄송하지만 넥스트 노래 이야기를 덧붙여 볼까요. 신해철이 쓴 <The hero>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죽지 않고 비굴하지 않은 나의 영웅'
'무릎을 꿇느니 죽음을 택하던'
우리는 이순신이 항상 영웅이길 바랐고, 드라마도 대중의 욕구에 부합했을 뿐입니다. 김훈은 이순신의 영웅 서사를 정면으로 거부합니다. 김훈의 이순신은 비굴하고, 무릎 꿇고, 죽습니다.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김훈이 쓴 대로 '적의 칼과 임금의 칼 사이에서 바다는 아득히 넓었고 몸 둘 곳 없었'기 때문일까요. 일부 후세의 역사가들은 자살설까지 말할 정도입니다. 전 동의하지 않지만요 (ㅎㅎ).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욕망이 투영된 비극적 영웅 서사를 현시대에서도 종종 목도합니다. 대중의 기대와 희망이 빚은 사회적 타살 말입니다. 전원책 변호사는 배우 최진실, 전 대통령 노무현의 죽음이 그랬다고 말합니다. 저는 돈키호테 같던 성재기의 죽음도 떠오르는군요. 물론 그들의 죽음을 모두 타살로 치부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대중은 분명 그들의 인간적 면모를 들여다보길 거부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을 뿐이군요.
한 사람의 인간적 면모를 모두 말소해버리는 오류는 예술 작품에서 더 확연합니다. 이순신 역시 그래왔지요. 그렇기에 김훈의 이순신은 다른 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단독성을 지닙니다. 이렇게 주절주절 떠들고 나니 또 읽고 싶어지는군요. 다음에 부모님 집에 내려가면 『칼의 노래』를 챙겨 올라와야겠습니다. 다들 즐거운 일요일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