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위대한 개츠비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평점 :
<상실의 시대>엔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어야 친구할 수 있다고 말하는 선배가 나온다. 소설이 말하는 상실감에 경도된 중딩이 책을 덮은 후 <위대한 개츠비>를 읽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상실의 시대>는 몇 번을 다시 읽은 반면 <위대한 개츠비>는 별 감흥 없었다. 16년이 지난 지금은 그때의 느낌조차 남아 있지 않다. 누가 죽는 이야기였더라?
문제는 소설을 다 읽고도 개츠비가 왜 위대한지 딱 부러지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흙수저 청년이 야망에 불타올라 불법 사업으로 졸부가 되고, 잊지 못한 첫사랑 그녀(게다가 지금은 남의 부인)에게 헌신하는 이야기? 오 촌스러워라. 내가 그 돈 가지고 있었다면 그렇게 살지 않았을 텐데.
소설의 화자 닉 캐러웨이는 도입부에서 자신이 판단을 유보하는 인간이라고 말한다. 그런 닉이 소설 후반부에선 이렇게 말한다. "그 인간들은 썩어빠진 족속이오." "당신 한 사람이 그들을 모두 합쳐놓은 것만큼이나 훌륭합니다."
왜 위대한가. 이 질문에 앞서 소설의 배경인 1920년대 미국이 어떤 곳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곳에선 거대한 병원 광고판에 그려진 안과 의사의 눈이 마치 도시의 인간을 내려다보는 하나님의 눈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돈이 전부인 세상이다. 너도 나도 속물로 사는 세상에서 개츠비 혼자 '타락할 수 없는 꿈(217)'을 간직하고 사는 걸 닉은 알았다. 전부 돈을 좇으니 역설적으로 돈 따윈 아무것도 아닌 무엇이 된다. 모두가 모두를 속이는 세상에서 자신조차 속이며 살지 못한 개츠비의 죽음은 과연 "값비싼 대가"다. 나이 들어 다시 읽어도 무조건적인 사랑이 최고의 가치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젠 개츠비의 왠지 모를 불나방스러움을 이해는 한다. 적어도 개츠비가 잘못 살았다고 말하진 못 하겠다.
어쨌든 개츠비가 '위대한 개츠비'였다는 생각은 화자 닉 캐러웨이의 것인데, 그는 아무도 추모하지 않는 개츠비를 홀로 추모한다. 물론 닉은 아무도 속이지 않으며 살고, 사기 골프 치는 조던 베이커를 차버리고, 속물들의 세상 동부를 떠난다. 진정 위대한 인물이다. 개츠비처럼은 못 살아도 캐러웨이처럼은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서평 쓰고 있는데 의무병이 전화로 30분 쩔쩔매더니 핸드폰을 빌려 갔다. 페이스북에서 자신이 여사친들이랑 리플로 시시덕거리는 걸 보고 여친이 화를 냈다는 것이었다. 그걸 일일이 지우는 데 또 30분이 걸렸다. 아아 사랑이란 대저 무엇인가. 이런 식이라면 사랑은 즐거움을 포기하고 유치함을 인내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무언가가 아닌가. 그런고로 책을 덮은 세상에도 위대한 사람은 참 많다고 생각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