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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무늬영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우리들은 살며 숱한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자전거를 타다 종아리에 물리적으로 생긴 상처도 있을 것이고, 인간에 실망하여 가슴으로 겪는 상처도 있을 것이다. 상처는 치유되어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도 있지만 때론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을 수도 있다.
한강은 데뷔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상처투성이 줄글로 일관하는 작가다. 한강은 글로써 아파한다.
『회복하는 인간』은 동생의 발목 상처로부터 시작한다. 동생은 접질린 발목에 쑥뜸을 뜨다 생긴 화상과 이어진 감염으로 고생한다. 동생에겐 언니가 있었다. 언니는 여성적이며 아름다워서 동생이 열등감을 가질 법도 했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완벽해 보이던 언니는 동생의 결점들을 부러워했다. 언니와 동생은 사이가 좋았지만 언니가 숱한 유산을 겪으며 동생을 멀리하기 시작한다. 언니는 동생의 건강함이 부러웠다. 언니는 결국 병을 앓고 말라가다 죽는다. 발목의 접질림은 언니를 묻고 산을 내려오던 날 생긴 거였다. 오래전 언니는 동생 때문에 이마를 찍혔을 때 우는 동생을 달래며 이렇게 말했었다.
"괜찮아. 진짜 금방 낫는대. 시간만 지나면 낫는대. 누구나 다 낫는대."
언니의 죽음 이후로 모든 게 견디기 힘들어졌을 때 동생은 습관처럼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자전거와 함께 쓰러진다. 그녀는 자신이 겪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회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중얼거린다.
그녀의 발목 상처엔 새 살이 돋고 있었다. 흉터는 남을지언정 결국 회복될 것이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어떠한가? 마지막 동생의 중얼거림은 마치 자책같이 들린다. 언니가 날 멀리한다고 나도 언니를 멀리했어야 했을까?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언니와 끝내 화해하지 못 했던 후회로 그녀는 자신도 차라리 죽길 바란다. 마음의 상처로부터 회복되기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시간이 지나도 낫지 않는 상처도 있을 것이다.
『훈자』는 무신경하고 무능력한 남편과 사는 여자가 꿈꾸는 곳이다. 회식 자리에서 스치듯 들었던 아름다운 훈자라는 도시에 한 번쯤 가보리라고 생각한다. 육아와 일에 치이는 그녀가 습관처럼 하는 일은 인터넷에 훈자를 검색해보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마음속 도피처 훈자도 점점 개발되어 가고 변해간다. 아이는 다시 교통사고를 겪는다. 급하게 사고 현장으로 차를 몰며 내뱉는다. "제발, 잘못되지 말아줘"
이 외침은 아이를 향한 것이지만 변해가는 자신의 이상향 훈자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여자는 끊임없이 훈자를 생각했다. 이상향을 꿈꾸지만 벗어날 수 없는 삶에 짓눌리는 모습은 우리들 삶의 보편적 모습과 다르지 않기에 안타깝다.
『에우로파』는 여성성을 지닌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인아를 만나 자신의 숨겨진 여성성을 깨닫는다.
그동안 나는 언제나 너를 특별하게 생각했어. 지금 이 순간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그건 내가 너를 사랑해서가 아니야. 하지만 그는 간절하게 여자이고 싶으면서도 남자의 몸으로 인아를 안고 싶어 한다. 인아는 자신의 노래를 부른다.
에우로파,
얼어붙은 에우로파
너는 목성의 달
내 삶을 끝까지 살아낸다 해도
결국 만질 수 없을 차가움
목성과 에우로파는 인아와 나를 상징한다. 서로를 맴돌지만 기묘한 거리가 유지되는 관계. 그래서 결코 깊게 서로를 만질 수 없는 관계. 내가 언젠가 그녀에게 깊게 상처 입히리라는 걸 알고 있으므로, 충동을 억누르고 목성의 달처럼 남으려 한다.
『밝아지기 전에』는 소설을 쓰는 그녀의 이야기다. 그녀에겐 한때 직장 선배였던 은희 언니가 있다. 은희 언니는 복막염을 앓던 동생을 방치했다는 죄책감에 회사를 그만두고 세계를 떠돌며 여행한다. 그녀는 암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았다. 그 사이 남편과 대부분의 사람이 떠났고, 은희 언니는 남았다. 둘은 서로 결함투성이로 태어난 걸 알기에 말없이 의지할 수 있다. 은희 언니는 자신이 머물고 있는 여행지로 그녀를 초대한다. 그녀는 은희 언니를 모티프로 한 소설을 시작하지만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첫 문장에서 도저히 나아갈 수가 없다. 하지만 은희 언니는 뎅기열로 죽는다. 그녀는 소설 첫 문장을 '그녀가 회복되었다'로 바꾼다. 이렇게 가끔 우리는 이루지 못하는 것들을 글로써 열망한다.
『왼손』은 한 남자의 제멋대로 움직이는 왼손에 대한 이야기다. 이 왼손은 자기 멋대로 움직여 막말하는 상사의 입을 틀어막기도 하고, 우연히 만난 첫사랑의 얼굴을 갑자기 쓰다듬기도 한다. 이 왼손은 통제되지 않은 욕망의 발현이다. 왼손으로 인해 첫사랑과 가까워지지만, 결국 자기를 망가뜨리게 된다. 제어되지 않는 욕망은 상대를 배려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결국 자신을 죽이게 된다.
『노랑무늬 영원』은 친구 아들이 키우는 도마뱀 이름이다. 소설 속 화자는 화가였지만 교통사고로 왼손이 망가지고 이어지는 무리한 재활로 오른손의 기능까지 잃는다. 아내가 예술은커녕 일상생활도 할 수 없으므로 밥벌이에 모든 집안일까지 해야 하는 남편도 삶에 지쳐 있긴 마찬가지다. 남편의 인내심이 바닥에서 더 내려갈 곳이 없을 즈음 대학교 동창에게 연락이 온다. 자신이 사는 동네 사진관에 너의 사진이 걸려있다며. 동창이 사는 곳으로 찾아가 사진을 찾고, 그 사진을 찍어준 사람이 대학생 때 북한산을 우연히 같이 올랐던 남자였음을 기억한다. 내려올 땐 발을 심하게 접질려 그 남자에게 업히고 부축 받아 집까지 돌아왔었다. 자신에게 남은 것이 하나도 없는 이 순간 그 남자의 안부가 아주 궁금하다. 수소문 끝에 알아낸 그의 소식은 2년 전 그는 미국 이민 생활 중 총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다. 2년 전 그녀가 교통사고로 생사를 헤맬 때 그는 총에 맞았다. 영원히 비껴가고 말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소식을 듣고 나서 아이러니하게 살고 싶다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방치된 작업실에 가서 다시 작업을 시작한다. 물감을 강하게 빛나는 불순물 없는 노랑색으로 배합하고 손을 물감에 적신다. 그리고 종이에 손바닥 자국을 찍는다. 친구 아들이 키우는 도마뱀 '영원'의 잘린 앞발이 새로 돋아난 것처럼 그녀의 손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 한다. 상처는 더 이상 영원(永遠) 하지 않고 그녀의 노랑무늬는 영원하다.
모든 이야기 속에 상처를 지닌 사람들이 나온다. 『회복하는 인간』의 그녀는 상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체념하지만 『밝아지기 전에』의 그녀는 소설로 상처를 딛으려 한다. 『왼손』의 그는 여러 사람에게 상처를 안기며 자신도 상처 투성이가 된다. 『노랑무늬 영원』의 그녀는 상처를 딛고 자신의 방식으로 일어선다. 상처도 제 각각이고 그에 대한 반응도 제 각각이다. 『노랑무늬 영원』의 그녀가 가지고 있던 노 화가 Q의 도록집에서 Q는 시간이 해결해주겠지요 라고 말했다. 인간에겐 시간을 감내하는 힘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도롱뇽 영원처럼 상처가 쉽게 아물고 살이 재생되지 않는다. 우리는 상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애초에 쉽게 회복할 수 없는 인간들은 시간을 빌려 상처를 지긋이 직시하고 단지 견뎌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 달이 더 지났지만 그 여자는 도움을 청할 제삼의 사람을 찾아내지 못했다. 남편을 설득해 상담사에게 보내지도 못했다. 남편을 설득해 상담사에게 보내지도 못했다. 다만 아이와 함께 있는 짧은 시간, 부족한 재능을 오직 열의로 보상하려 하는 희극배우 같은 사람이 되었다. 농담을 던지고 발을 구르고 깔깔 웃는 동안, 불쑥불쑥 살얼음처럼 얇고 날카로운 행복을 느꼈다. 이따금 자신이 은밀히 미쳐가고 있는 것인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 오히려 아이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끼쳐온 것은 아닌지 곰곰이 자문했다. 51p
잊을 수 없는 여름밤의 한순간이었다. 인아의 노래가 아름다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청춘의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 순간 인아를 사랑하게 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인아의 노래가 갑자기 끝났을 때, 지난 이십여년 동안 억눌러왔던 생생한 갈망이 단박에 빗장을 끄르고 내 심장 밖으로 걸어 나온 것을, 그 어둡고 남루한 골목 한가운데서 나를 마주 보며 서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69p
다정히 내 이름을 부른 뒤 인아는 이어 물었다. (만약 네가 원하는 대로 태어났다면 뭘 했을 것 같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다 살아낼 수 있다면 뭘 할 것 같아?) 나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 순간 미칠 듯 뜨겁게 치밀어 오른 말들을 내가 입에 담았다면, 우리는 처음으로 싸웠을지도 모른다. 그게 마지막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웃기지 마. 내가 널 사랑한다고 해서, 그런 답을 네가 나한테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닥쳐. 닥치라고. 93p
조만간 또 떠날 거야. 돌아와보니까 그래야 한다는 걸 알겠어. 106p
저물 무렵에야 돌아와 제대로 씻지 못하고 잠들었다. 윤이가 부르는 소리, 깨우지 말라고 동생이 달래는 소리를 들은 것이 생시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얼핏 잠이 엷어질 때마다 숲의 산책로가 어른거렸다. 하루에 두 번, 움직일 수 있는 한 걸었던 그 길가에 흰 질경이꽃이 핀다. 여린 잎들이 버드나무에 돋아난다. 어지러운 햇빛이 돌아온다. 희거나 목이 길거나 부리가 노란 새들이 온다. 생명이 온다. 조금 더 버티면. 후회와 고통을, 깊게 찌르는 자책을, 안 지워지는 얼굴을 등지고 조금 더. 128p
그 과정에서 어떤 부도덕도, 죄악도 없었다. 당연한 일일뿐이었다. 나도 예전의 내가 아니며, 그도 그때의 그가 아닌 것뿐이었다. 모든 것이 지나가버렸을 따름이었다. 외딴섬에 단둘이 표류된 사람들처럼, 우리는 서서히 서로를 질식시켰다. 그렇게 다시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들어갔다. 서로에 대한 배려, 이타적 관계, 우정, 동료의식 들은 강 저편에 남았다. 애초에 완전한 타인이었다는 것- 그 한 가지 명료한 사실만이 이편의 강가에 남았다. 243p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심성이 여리고 다정했었다. 그러나 닳아간다. 타이어가 닳는 것처럼. 이런저런 일들을 몸으로 겪으면서. 그와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조금씩, 닳아간다는 것을 의식 못하면서 조금씩, 바퀴가 미끄러워진다. 미끄러워지고, 미끄러워져서,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브레이크가 듣지 않는다. 25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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