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개정판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1. 남자가 이런 거 왜 읽어?

페미니즘을 섭렵해서 SNS 개념남 코스프레하려고 책을 샀다. 농담이다. 몇 번 스치듯 읽은 정희진 칼럼이 좋아서 이 양반이 말하는 페미니즘이 궁금해져 책을 샀다. 난 남성이므로 당연히 내 인식의 틀을 깨는 문장들이 많았고, 즐거운 독서의 순간이었다. 다만 남성의 생리와 젊은 남성이 겪는 실질적 고통에 대한 저자의 오해가 아쉽다. 내가 겪지 않은 여성의 고통을 '정말로' 절감할 수 없듯이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므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아닌가 한다.

페미니즘의 큰 틀에는 많은 부분 동의한다. 남들이 지성인 집단이라 오해하는 (ㅎㅎ) 의대와 대학병원에서도 여성이 겪는 차별은 상당한 편이다. 가령 간호사들은 '임신 순번제'를 암묵적으로 지켜야 하며, 여의사들도 자유로운 임신은 쉽게 생각할 수 없다. 아직도 많은 대학 병원 정형외과는 여성을 선발하기 꺼려하는가 하면, 남녀가 짝으로 인턴을 돌 때 남자 인턴만 수술방으로 부르곤 한다. 수술을 많이 시켜주려는 좋은 의도가 아니라 험하게 부려먹기에 남자가 편하다는 뜻이지만. 의도야 어찌 됐든 병원에서도 차별은 공공연하게 묵인된다. 하물며 실생활과 인터넷 담론은 어떻겠는가.

어처구니없는 운전을 하는 여성 운전자를 '김여사'라 비하한다. 그런 여성 운전자가 왜 없겠는가. 있다. 하지만 여성의 어설픈 운전이 사실이라고 해도 '김여사' 담론은 병리적이다. 여성만 어처구니없는 운전을 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진실을 가장한 거짓말이라 할 수 있다. 여성들이 남성들이 하지 않을 '어설픈' 운전을 한다면, 남성들은 여성들이 하지 않을 '난폭한' 운전을 한다. 얼마 전 레미콘이 정차된 승용차를 덮쳤을 때 네티즌들이 레미콘 운전자를 욕하지 레미콘 '남성' 운전자를 욕하던가? 운전자 커뮤니티는(ex 보배드림) 남성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남성의 잘못은 묵인되고 주목받지 못한다. '김여사' 담론은 인터넷에 만연한 여성 혐오의 대표 현상이다. 여성에 의한 어설픈 운전이 목격되면 "김여사가 그럼 그렇지" 하면서 남성들은 선택적 기억을 집단 강화한다. 이런 상황이니 여성들은 얼마나 복장 터지겠는가. 메갈리아 탄생, 이해한다.

2.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적 - 가부장제

썰이 너무 길었다. 이 책은 여성이 실제로 겪는 차별을 넘어서, 그 기저에 어떤 심리와 구조적 문제가 작용하는지를 고찰한다. 저자는 영화를 비롯한 예술 작품에서도 남성 중심 사고관이 중심적으로 작용함을 예리하게 밝혀낸다. 거의 모든 사회, 언어, 문화 구조에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가 작용하고, 여성들은 현재까지 교묘한 억압을 받고 있다. 여성은 공적 영역으로 진출했지만 남성은 사적 영역으로 진출하지 않아 집안 일과 어머니로서의 감정 노동은 여전히 여성의 몫이다. 여성들은 욕망도 억압당한다. 날씬해야 하지만 가슴은 풍만한 게 미덕이고, 음식은 만들어야 하지만 적게 먹어야 한다. 남성은 섹시한 여자를 바라지만 여성이 섹스를 즐기면 '걸레'다. 하나하나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유교가 지배 관념으로 오랜 기간 작용했던 한국에선 이 같은 현상이 심하다. 궁극적으로는 사회 전 분야에서 가부장제가 퇴출되어야 한다.

3. 남성이라 비판적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부분

(1) 북한은 단순한 약자인가?

저자는 힘의 불균형에서 비롯된 부당한 억압의 예시로 북한을 든다. 북한이 국제 사회에서 약자이고 강대 약의 구도에서 억압받는 게 여성 억압 구도와 비슷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북한은 실재하는 위협이므로 이는 naive한 국제 정세 인식이다. 북한이 최근에도 연평도 포격과 천안함 폭침을 자행한 점과 북한 인민이 당하는 억압을 간과하면 안 된다. 단순한 약자가 아니라 폭력을 행하는 약자다. 차라리 북한의 예는 빼는 게 책 전체 주장을 강화하는 데 좋을 것이다.

(2) 남성 성(性) 생리에 대한 이해 부족

 

여성주의자들이 포르노그래피를 반대하는 것은, 성 보수주의자 혹은 '검열주의자'여서가 아니라, 현재 제작, 유통되고 있는 포르노그래피가 성폭력을 '정상적인 섹스'로 묘사하여 성폭력을 합리화하는 기제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많은 남성들은 "포르노는 이론이고, 강간은 실천"이라고 여기고 있다. 160p

 

포르노가 어떻게 여성 인권 침해로 작용하는지 이해는 하겠는데 이런 식으로 남성을 매도하면 곤란하다 (ㅎㅎ). 실제로 남성들이 포르노를 강간 준비 이론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면 대한민국은 이미 '강간의 왕국'이 됐을 것이다. 구질구질하게 더 설명해본다. 인터넷 우스갯소리로 '현자 타임'이란 게 있다. 사정 후의 불응기에는 아무런 성(性) 적 욕구가 생기지 않는다. 포르노가 강간 욕망을 부추긴다는 이야기를 하려면 포르노 도입 전과 후 강간 범죄 수의 비교, 포르노를 이용하는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의 강간 범죄율 비교에 대한 통계를 제시해야 한다. 막연한 관념에 기반을 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주장이 저런 식이니 야동만 보는 선량한 딸잡이(!)들이 여성부가 포르노그래피를 선택받지 못한 여성의 '경쟁자'로 생각하는 것 아니냐는 음모론(?)을 말하는 것이다.

(3) 전통적 성 역할을 은연중에 강제하는 미디어 : 과연 남성들 때문일까?

 

여성은 나이에 따른 외모를 기준으로 남성 질서 안에서 끊임없이 순환, 소비된다. 권력을 가진 남성은 젊고 예쁜 여성을 얼마든지 '살 수 있고', 젊은 여성들은 그런 남성에게 사랑받기를 원한다. 성별 사회에서 연애는 결국 성별 자원의 교환이다. 남성이 여성에게 원하는 것은 '몸'이거나 보살핌이며, 여성이 남성에게 원하는 것은 자원이다. 192p 

 

저자가 직접 미디어의 예시를 든 건 아니다. 이런 식이라고 분석을 했는데, 읽는 나는 자연스럽게 미디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가령 현아의 선정성이나, 아이유 앨범 재킷에 불쾌해하는 사람은 주로 여성이다. 성 상품화에 많은 여성들은 불쾌해한다. 그러나 여성이 남성에 종속되는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왜 불쾌해하지 않을까? 그것을 자극하는 드라마의 작가는 남성일까 여성일까. <파리의 연인>, <시크릿 가든>, 최근의 <결혼 계약>까지 말이다. 그럼 드라마의 주 소비층은 남자일까 여자일까. 페미니즘 관점에서 비판받아야 할 위의 드라마에 열광하는 사람은 주로 여성이고 그걸 비판하는 사람은 주로 남성이다. 이건 무엇을 뜻할까? 책 제목처럼 미디어의 편견에도 여성들 스스로 '도전'해야 하는 게 아닐까?

(4) 군 가산점 논란

 

군 가산제 논쟁에서 "가산점을 인정하라."는 주장이, 남성의 억압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대상화하는 타자(여성)에게 차이를 억지로 강요하는 것이라면, "여자도 군대 가라."는 주장은 대상화하는 타자가 차이를 가질 수 있는 권리를 부정하는 논리이다. 244p

 

즉, 여성과 장애인은 '특권층'이어서 병역의 의무가 면제된 것이 아니라, '2등 시민'이므로 군 가산제라는 권리도, 병역이라는 의무도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의무나 권리는 국민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국민 되기에 적합하지 않은, 국민의 기준에 미달하는 2등 시민에게는 의무도 권리도 없다. 여성은 병역의 의무가 면제된 것이 아니라 배제된 것이다. 

 

군 가산제를 주장하는 남성들에게 군 경력은 '희생'인 동시에 '대한민국 남자'로서 정상성과 자부심의 원천이다. 이들은 이중적, 분열적 위치일 수밖에 없다. 군 가산제 논란의 본질은, 남성들 간의 계급 차이가 남성과 여성의 관계로 치환, 전가된 것이기 때문이다. 248p 


민감한 부분이다. 인용한 단락의 말을 이해하지만 심정적으로는 억울하기도 하다. 저자의 말은 원론적으로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은 병역 면제가 '특혜'로 간주된다. 장애인이 '2등 시민' 취급받아 병역 면제받는 건 맞는 말이지만, 비장애인 남성이 병역 면제받으면 불공정한 '특혜'로 인식하는 게 대부분이다.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 사회 일반의 시선도 마찬가지다. '2등 시민'이라서 면제받았다는 느낌보단 '여자는 군대 안 가서 좋겠다'라는 느낌이 더 사실에 가깝다.

남성이 여성의 고초를 전부 이해할 수 없듯이 여성도 남성의 고초를 전부 이해하지 못 하나보다. 이 책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저자는 군 가산점을 남성의 억압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여성에게 차이를 억지로 강요하는 부분이라 말한다. 하지만 군대는 '배제된 무리'를 억압하기만 하지 않는다. 실질적으로 그들을 보호하는 역할도 수행하고, 일반 병사일 경우 이에 대한 보상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사병 월급이 14~20만 원이다.

군 가산점 제도가 비 장애인에 대한 차별일 수 있다는 점은 동의한다. 여자도 군대 가야 한다는 말에도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공익처럼 대체 복무하라는 것도 동의하지 않고. 왜냐하면 군 복무나 공익 근무가 효율성이 굉장히 떨어지고, 거시적으로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떨어트리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필요악인 제도에 "우리가 억울하니 너희도 함께 해"라는 주장은 유치하다. 군 복무에 대한 보상은 '타자'를 배제시키지 않는 급여 인상, 퇴직금, 복무 중 복지 향상으로 이뤄져야 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가능할까?

젊은 남성들이 젊은 여성들에게 갖는 적개심의 뿌리 중 하나는 병역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저자는 주장 내내 젊은 남성의 실질적 고통을 쉽게 간과한다. 이는 타자들의 목소리를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53)을 돌아와서 찌른다.

여성은 병역 면제가 아니라 배제되었다는 주장과 여자도 군대 가라는 주장에 대한 비판을 동시에 하고 있다. '배제'라는 단어를 선택해서 생긴 모순이다. 남성이 군 복무하는 게 왜 손해인지 고찰하고 인정해야 한다. 저자는 여성을 하나의 동일한 집단으로 묶어서 생각할 수 없다고 했다. 남성도 마찬가지다. 생활고가 있음에도 사병으로 병역을 이행하는 남성,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 장교로 군 복무하는 남성, 미국에서 태어나 군 복무를 하지 않는 남성. 여성에 적용하는 예민한 감수성을 남성에도 적용했으면 더 좋은 담론이 됐을 것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이 읽어서 나쁠게 없는 책이다. 주류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느끼지 못했던 잠재의식을 깨닫고, 인식의 전환을 할 수 있기에 좋은 독서가 될 수 있다. 나도 읽으며 무의식에 내재된 가부장적 사고를 깨닫고 놀라기도 했다. 아직도 가정폭력이나 묻지마 폭력에 시달리는 건 대부분 여자들이고, 유리천장은 공고하다. 남성은 여성주의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녀들이 '왜' 여성주의를 주창하는지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지금은 남성인 내가 주류 집단에 속해있어도 언제 비주류로 전락할지 모른다. 한 번의 사고로 장애인이 될 수 있고, 어떤 시련으로 사회적 위치가 추락할지 모른다. 한국 사회의 주류인 한국인 남성이 유럽이나 미국에 가면 '칭챙총' 취급받는다. 우리는 언제나 주류면서 비주류다.

여성주의는 여성만을 위한 담론이 아니다. 제대로 이해했을 때 약자와 타자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다. 타자를 타자라 생각하지 말고 그들이 겪는 구조적 모순을 깨나가는 데 동참해야 한다. 그건 정의롭기도 하거니와 결국 언제 타자가 될지 모르는 나에게도 이로운 일이다.

 

기존의 (서구 백인) 남성 중심의 목소리가 전부라고 믿을 때 우리는 종속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른(대안) 세계가 가능하며 그것이 또 하나의 현실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유일(단일)한 것으로 군림해 왔던 서구 남성 기존의 목소리는 급속히 상대화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가 서구 남성 중심의 사유 방식이라면, 여성주의는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태초에 목소리가 있었다."라고 믿는다. 여성주의는 차이나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권력이 차일를 구성한다. 여성주의는 정치적 올바름, 통일성이나 단일성의 가치보다는 대화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럴 때, 여성뿐만 아니라 다른 타자들의 목소리도 들리게 된다. 다른 타자들의 목소리를 배제하지 않는 것, 이것이 '진정한 보편주의' 정치학으로서 여성주의 언어가 지닌 힘이다. 5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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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akeaftermopo3 2021-04-19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글 잘읽구갑니다!!

www719 2024-06-29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꼼꼼하게 읽으셨네요 정가 주고 살만한 책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