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한가운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
루이제 린저 지음, 박찬일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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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뜻대로 살기란 참 어렵다. 지금도 어려운데 1940년대는 어땠을까. 그것도 전체주의의 광기에 휩싸인 전시의 독일이라면. '시대의 거대한 소음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상실'했으나 니나는 나치즘에 저항한다. 독일인인 그녀가 순응할 수 있던 체제에 저항한 이유는 단순하다. 나치즘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겐 굴종을 거부한 죽음조차도 완전한 자유가 된다.

이런 니나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 20살 연상의 슈타인. 니나가 멋진 신여성이라면 이 남자는 완전 바보다. 18년 동안 자신을 허락하지 않는 한 여자만 사랑하는 남자가 바보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는 니나와 잘 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의심과 편협함으로 기회를 놓친다.

니나는 멋진 신여성이지만 썸녀로선 최악이다. 슈타인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갔으면 그에게 연락하지 않는 게 예의일 텐데, 그녀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 그에게 연락하고 도움을 청한다. 이거 요즘 말로는 희망 고문. 나도 남자인지라 ㅂㄷㅂㄷ거리며 읽었다. 슈타인을 몇 번이나 매몰차게 내친 니나가 다시 그를 불렀을 때 슈타인은 일기를 쓴다. <어쨌건 나는 그녀를 찾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인이 휘파람을 불면 달려가야 하는 개도 아니고>... ㅋㅋㅋ. 읽으며 슈타인 너 인마, 화이팅이다!라고 외쳤다. 그런데 2주 후 일기의 첫 문장은 이렇다. <어제 마침내 니나에게 갔다>. 이런 븅신 쪼다 같으니라구 ㅜㅜ. 안타까운 사랑의 결말은 직접 읽어보시길. 웃자고 썼지만 명작입니다.

이 소설은 자유로운 신여성 니나에 대한 찬사다. 1950년 이 소설이 발표되고 독일과 세계는 니나 열풍에 빠졌다. 국내엔 1967년 전혜린에 의해 번역되어 소개됐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자유에 열광한다는 건 반대로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란 정말 어렵다는 말과 같다.

자기 주도적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모아 놓은 돈으로 훌쩍 세계 여행 떠나는 걸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직장에서 나와 자신이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하는 걸까? 이조차 내 고정관념 속 자유로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의 삶이 완전한 자유의 결과는 아니었음은 분명할 것이다. 자기 주도적 삶이란 삶을 위험 속에 던져보는 것과 같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나이 들며 가다듬은 삶의 양식이란 조금씩 변수와 리스크를 제거하며 사는 것이었다. 삶은 점점 뭉툭해져갔다. 어디로 처박힐지 모르는 위험은 없지만 그렇다고 큰 재미가 있지도 않은 삶. 남들 비위 맞추며 살다가 돌아보면 어느 순간 뱃살이 늘어나 있는 삶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삶을 처음부터 원한 건 아니었다. 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 내 삶이 진짜 내 것이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삶을 한치 앞도 모르는 곳에 던지며 "나는 몰락하지 않아요"라고 말했던 니나는 진정 아름답다.

이대로 마무리하면 너무 루저 같으니까 삶에 대한 변명을 조금만 하자. 꼭 자유로운 삶만이 칭송받을 가치를 지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설에서 니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슈타인의 고통스러운 일기를 읽으며 눈물 흘렸던 니나의 언니 마르그레트의 삶은 평범하다. 평범하게 살고, 평범하게 결혼하고, 평범하게 자녀를 키운다. 두 남녀의 고통스러운 삶의 행보를 글로 목도하기만 하는 그녀는 자신의 삶이 '연극의 한가운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삶을 쉽게 폄하할 순 없다. 작은 행복도 분명 우리가 원했던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이니까. '연극의 한가운데' 설지 '삶의 한가운데' 설지는 본인의 몫이다. 적어도 자신의 위치를 되묻고 끄덕일 줄 알면 된 거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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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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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삶을 성공과 실패로 나눌 수 있는 기준은 뭘까. 부, 명예, 가족, 사랑, 자아실현. 이것들을 빠짐없이 무난히 이뤄내야 성공한 삶일까. 그럼 성공적으로 산 사람이 대체 몇이나 있을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을 못 가진 채 삶을 마치는 사람도 있을 테니, 하나만 가져도 성공한 삶일까. 잘 모른다. 아직 젊은 (이라고 믿고 싶다 ㅎ) 내가 섣불리 대답할 수 없다. 난 삶이 뭔지 잘 모른다. 사는 것도 어렵지만, 삶을 아는 것도 새삼 어렵다고 느낀다.

윌리엄스 스토너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권유로 농과대학에 입학하지만, 괴짜 교수 아처 슬론의 영문학 강의를 듣고 인생의 방향을 바꾼다. 그는 영문학 교수가 되고, 결혼해 자녀를 갖는다. 고학생으로 시작하여 교수가 되어 저서까지 남긴 그의 삶은 분명 대단하지만, 자세히 보면 이곳저곳 삐걱대고 뒤틀린 삶이다. 과연 스토너의 삶은 행복이었나 불행이었나.

삶은 투쟁의 연속이다. 거창한 것과의 투쟁이 아니다. 주변 보잘 것 없는 것들과의 구질구질한 투쟁이다. 스토너는 히스테릭한 부인 이디스, 도전적이고 무례한 학생 워커, 적대적인 동료 교수 로맥스와 싸워야 했다. 일견 무력해 보이지만 스토너는 자신의 방식대로 묵묵히 싸운다. 타협하지 않고 워커를 내친 후 돌려 받은 로맥스의 보복은 초급 교수에게나 줄만한 엉터리 강의 시간표다. 스토너는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회복시킨다. 이 장면에선 누구나 스토너의 열렬한 응원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개썅 마이웨이로 살 수는 없는 법. 불행한 결혼 생활 중에 만난 캐서린과의 사랑은 그것이 어쩔 수 없는 불륜이기에 위기에 처한다. 친구이자 학장인 핀치는 말한다. "이론적으로야 자네 인생은 자네 것일세. 이론적으로는, 누구든 자네가 원하는 사람과 잘 수 있고, 무엇이든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지. 그것이 강의에 지장을 주지만 않는다면 문제 될 것이 없네. 하지만 말이야, 젠장, 자네 인생은 자네 것이 아니야. 자네 인생은...... 아, 빌어먹을,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이 질문에 독자도 대답해야 한다. 내 인생은 정말 온전히 내 것인가?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스토너는 '결국 우리도 세상의 일부'라는 걸 인정하고 캐서린과 헤어진다. 많은 독자들이 이에 분개하고 스토너에게 실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캐서린과의 사랑을 이어 갔으면 스토너나 캐서린 둘 중 하나의 교수직은 이어갈 수 없었을 것이고, 사랑만큼이나 중요했던 학문적 성취는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가진 것만큼 반대 급부로 포기하는 것도 있는 게 인생이고, 우리 삶은 대개 이런 식이다. 난 스토너의 인생을 인정하고 싶다.

소설 도입부의 한 구절은 이렇다. '노장 교수들에게 스토너의 이름은 그들의 종말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고, 젊은 교수들에게는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일깨워주지 않고 동질감을 느낄 구석도 전혀 없는 단순한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가 젊을 때는 자신의 삶이 행복할 것이라, 적어도 큰 실패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보통의 삶은 무기력하고, 통쾌한 저항보다는 굴종의 순간이 더 많다. 이걸 젊은 교수들은 모르고 늙은 교수들은 알고 있으니, 인생의 진리는 없지만 겪은 만큼 겸손해진다는 말만큼은 정확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죽기 전 스토너는 자문한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이 질문은 소설가가 독자에게 건네는 것이기도 하다. 소설 초반으로 돌아가자. 스토너는 아처 슬론 교수의 강의 중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듣는다. 이 소네트는 수백 년이 지나서도 살아남은 글로, 스토너로 하여금 영문학자의 길을 걷게 한다. 안타깝게 셰익스피어와는 달리 그는 별로 기억되지 않는다. 삶도 글도 쉽게 잊혀버린다.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의 삶도 이럴 것이다. 그럼 우리는 뭘 기대하며 살아야 하나?

소네트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머지 않아 떠나야 하는 것을 잘 사랑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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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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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어지간히도 안 읽히는 한국에서 그래도 독자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 작가를 꼽으라면 정유정 작가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저는 정유정 작가의 책을 <7년의 밤>만 읽어봤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대중이 그의 소설에 열광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가독성 좋고 재밌거든요. 정유정이란 브랜드는 믿고 고를만합니다. 신작 <종의 기원>도 흡인력 있고 재밌습니다.


제목이 의미심장합니다. 읽다 보면 그 의미를 곧 알 수 있습니다. 소설은 인간이 마땅히 느껴야 할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이코패스. 그 '종'이 어떻게 태어나고 현재에 이르렀는지를 말합니다. 이 '종의 기원'에 대한 설명은 두 채널로 이뤄집니다. 주인공의 독백과 어머니의 일기입니다. 주인공은 어려서부터 자신을 둘러싼 억압과 비정상적인 애착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먹어야 했던 간질 발작 예방약을 '포식자를 평생토록 가둘 무형의 감옥(267)'으로 인식하고 친구인 해진에게 묘한 경쟁심과 반발심을 느낍니다. 반면 어머니는 아들(주인공)의 본성을 이전부터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에게 아들의 본성은 고칠 수 없는 것이기에 통제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됩니다. 이 통제는 '이 세상에 살아서는 안 될 놈(84)'을 어떻게든 품고 가려는 모성애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손을 들어주시렵니까. 


전작처럼 문장 호흡이 경쾌하고 이야기의 방향이 뚜렷해 잘 읽히지만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7년의 밤>에서는 등장인물 각각의 캐릭터가 생생히 살아있어 그들의 심리와 행동을 읽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영화화된다면 아버지는 조진웅, 삼촌은 조정석으로 캐스팅하는 게 좋겠다며 생각하고 말이죠 (다 어긋났습니다 흑). 반면 <종의 기원>에서 주인공 외 등장인물의 캐릭터는 모두 묻힙니다. 영화화되면 누가 연기해도 상관 없을 정도입니다. 인물의 내면에 집중하는 건 이야기의 농밀함을 끌어올릴 순 있지만 풍성함까지 살릴 순 없는 양날의 검인 듯합니다. <7년의 밤> 영화는 꼭 볼 테지만, <종의 기원> 영화는 별로 기대되지 않습니다.


어머니와 아들의 친구가 서로 보이는 애착은 비정상적입니다. 어머니는 작은 아들 친구를 죽은 큰 아들을 닮았단 이유로 양자로 들입니다. 주인공이 친구인 해진에게 묘한 경쟁심을 느끼는 이유입니다. 이런 비정상적인 애착관계는 소설 내적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변형으로 작용하여 주인공의 성격을 강화하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너무 만화같은 설정이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끝까지 읽고 소설 도입부를 다시 읽으면 색다르게 느껴집니다. 도입부 주인공의 세례식에선 '사랑의 예수님 내 모든 삶을 참 아름답게 만드시네'라는 찬송이 퍼집니다. 아이러니하게 책의 제목은 창조론을 부정한 다윈을 연상시키는 '종의 기원'입니다. 작가는 이런 배치를 통해 신의 손길이 닿지 않는 인간 본연의 어두움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정유정 소설 특유의 재미는 여전합니다. 저는 장르 소설보단 순문학을 많이 찾아 읽습니다만 재미없는 책은 질색입니다. 따분한 순문학 읽을 땐 저염 닭 가슴살 먹는 기분이 듭니다. 몸에 좋은 건 알지만 먹다 지치죠 (ㅎㅎ). 그에 비하면 정유정 소설은 연유 더블에 팥 추가한 설빙 치즈 빙수입니다. 아주 맛있습니다. 다만 다 먹고 나면 너무 달고 차가워 뒷골이 당길지도 모릅니다. 매일 먹기는 부담스러운 디저트이지만 그 서늘함을 만끽하고 싶으시면 더운 여름이 제 철입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나는 리모컨을 다시 집어들고, 채널을 돌리기 시작했다. 약속이라도 했는지, 죄다 먹는 방송만 걸렸다. 홈쇼핑에선 양념갈비를 뜯어먹고, 예능 방송에선 어떤 남자가 소 한 마리를 부위별로 가르고, 드라마에선 군인 둘이 번개탄에 삼겹살을 굽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생존하는 법과 더불어 기다리는 법을 배운다. 먹는 법과 먹을 수 있을 때까지 굶는 법을 동시에 터득하는 것이다. 오로지 인간만 굶는 법을 배우지 못한 생물이었다. 오만 가지 것을 먹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먹으며, 매일 매 순간 먹는 이야기에 열광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먹을 것을 향한 저 광기는 포식포르노와 딱히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이 지상의 생명체 중 자기 욕망에 대해 가장 참을성이 없는 종이었다. 27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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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 오늘의 젊은 작가 9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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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편의 에피소드가 연결되는 이 연작 소설은 퇴마사 보건교사를 내세운 유쾌한 활극이다. 소설에서 나오는 불행들은 실재하는 것들이다. 학생들의 자살과 탈선, 선생님들의 고민, 사회 문제까지. 이것들의 원인은 악령이고 보건교사 안은영이 그것을 처단한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이렇다. 안은영은 귀신을 볼 수 있다. 그중에서 나쁜 귀신은 무지개 칼과 비비탄 총으로 해치운다. 그래서 학생들이 구김살 없이 학교에 다니고, 학교의 불행이 없어지고, 사람들의 고민거리나 허리 통증이 줄어든다. 햐, 오랜만에 읽은 직설적이고 명쾌한 소설이다. 그렇담 착한 귀신은 어쩌는 것이느냐. 들어준다. 놀이터에서 머리를 다쳐 죽은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중학교 때 서로 아웃사이더라 기묘한 우정을 형성했으나 젊어서 크레인 사고로 죽은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살아서 자신의 사연을 말하지 못 하는 건 얼마나 한스러운 일인가.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안은영은 샤먼의 현대적이고 유머러스한 해석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도 어두운 책만 읽어 버릇 해서 그런가 가끔 읽는 유쾌한 소설이 더 빛나는 느낌이다. 학창시절 가끔 매 맞기만 하였으나 사실은 늘 보호받고 싶었던지라 더 애틋하게 읽힌다. 또한 "햇빛과 아이들은 우리 편이에요"이라든지 "그러니까 여자를 만나도 좀!", "니가 안 만나 줬잖아!" 같은 대사는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어려운 소설 읽으며 스트레스받기 싫은 사람에게 추천. 에로에로 에너지(읽으면 안다)로 힐링 받고 싶은 사람에게도 추천. 다만 글이 밝고 재밌어서 오히려 읽고 난 후 마魔가 낀 듯한 세상이 아쉬워지는 게 흠이랄까. 어쨌든 호러와 에로 중에 고르라면 나도 에로를 고를 테다. 에로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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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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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김연수 작가에게 사과해야 할 것 같다. SNS에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사랑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라는 중2병(...) 같은 문장이 돌아다니길래 그저 그런 연애 소설인 줄 알았다. 하마터면 읽지도 않고 오해한 채 책을 펼치지 않을 뻔했다. 막상 읽어보니 한순간도 손에서 뗄 수 없는 추리 소설이었다. 탐정이 안 나오지만, 어차피 모든 소설은 인생의 '왜'와 '어떻게'를 향해 달려가므로 추리 소설의 일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억지라구요? ㅇㅈ합니다...). 그리고 이 소설은 어려서 미국으로 입양된 카밀라가 생生의 기원을 찾는 이야기인 동시에, 소설이 어떻게 쓰여야 하고 왜 읽혀야 하는지에 대한 메타 소설이기도 하다.

인간은 무엇으로 정의될까. 한 사람의 과거가 그의 현재를 규정할 수 있을까. 소설은 존재의 이유를 묻는다. 카밀라는 양아버지에게 자신의 이름이 왜 카밀라냐고 묻지만 '카밀라는 카밀라니까 카밀라'라는 동어 반복식의 대답이 돌아온다. 이처럼 개인의 존재엔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개인의 기원은 분명히 존재한다. 카밀라는 한국으로 돌아가 어머니의 일생과 진남여고의 동백꽃을 확인한다. 그 시점부터 그녀는 카밀라니까 카밀라였던 카밀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된다. 그녀는 앞으로 정희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어떤 진실을 알게 되면 한 인간은 더 이상 그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사람은 '점의 인생을 살고 난 뒤에 그걸 선의 인생으로 회상(178)'한다. 그러나 카밀라는 출생 당시의 인생이 수수께끼이기 때문에 선의 인생으로 회상을 할 수 없다. 그녀의 점(과거)이 무엇이었느냐에 따라 ― 최성식의 딸, 정재성의 딸, 이희재의 딸 ― 그녀의 존재와 앞으로의 삶의 이유도 규정될 것이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일 수도, 한 여자의 삶의 이유였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는 과거가 현재의 인간을 규정한다는 건 잔인한 일이다. 과연 인간의 운명은 지나온 과거에 달려 있는 것일까. 너무 허무하다. 대답은 조금 미뤄두고 소설에서 가장 중요하고, 신비롭고, 이해 안 되는(...) 장면을 보자. 2장의 마지막 장면과 4장의 마지막 장면의 시간은 분명 같다. 하지만 2장의 마지막에서 이희재를 만나는 건 정희재(카밀라)고, 4장의 마지막에서 이희재를 만나는 건 정지은이다. 과연 이희재가 양관에서 만난 여자는 2012년의 카밀라일까 1984년의 정지은일까. 작가가 이렇게 시공간을 비튼 이유는 무엇일까.

정희재는 진남에서 어머니의 진실을 파헤치려 하지만 진실을 감추려 하거나, 자신의 왜곡된 기억을 진실로 믿고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 정지은의 죽음은 한 사람의 기억으로만 재구성할 수 없다. 정지은 주변의 여러 이야기들을 모두 모으고, 입체적으로 재조립 했을 때 겨우 형상이 드러난다. 이처럼 한 사람의 진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심연에 묻히고 영영 꺼내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진실을 알기 위해선 그 심연으로 용감히 들어가야 한다. 그것을 누가 해야 하는가. 소설 안에선 '일어날 수도 있었던, 하지만 끝내 이뤄지지 않은 일들을 들려주는 이야기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심연을 건너오지 못하고 먼지처럼 흩어진 고통과 슬픔의 기억들(253)'을 수집하는 '바람의 말 아카이브'란 공간이 그 역할을 수행한다. 바람의 말 아카이브가 떠도는 말을 모으고 전달한 뒤에야 김미옥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잊은 죄를 깨달은 사람이 되고, 정지은은 오빠의 아이를 낳고 자살한 여자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와 살아갈 이유를 빼앗긴 여자가 된다. 이 소설적 공간은 묵묵히 진실을 알리길 원하는 기자나, 소설가, 또는 진실을 이야기하려는 어느 누군가와도 같이 느껴진다. 이야기의 윤리가 형상화된 공간이다.

과연 마지막에 이희재가 만난 여자는 누구였을까. 짓궂은 소설가의 장난(ㅎㅎ)이기 때문에 그걸 캐묻는 건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다만 의도를 추측하려 노력해야 할 뿐이다. 2장의 마지막에서 정희재는 어머니의 진실을 묻고 묻다 최종적 진실(바람의 말 아카이브) 앞에 당도한다. 4장의 마지막에서 정지은은 크레인 위에 올라간 아버지를 살리려 양관에 왔다. 1984년의 정지은이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이희재를 만났고, 2012년의 정희재는 어머니의 진실을 지키기 위해 이희재를 만나러 왔다. '한 번의 삶은 살아보지 않은 삶이나 마찬가지(251)'라고 정지은에게 죄를 지었던 '우리(소녀들)'는 체념하듯 말한다. 정지은과 정희재의 인생도 단 한 번뿐이었다. 그러나 그 한 번뿐인 삶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는 노력이 반복되는 걸 독자는 확인한다. 그 순간 정희재도 독자도 과거가 규정하는 단 한 번뿐인 삶의 허무함을 극복한다. '아름다움이란 솜씨의 문제이고, 솜씨는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138)'다. 소설의 마지막 장까지 당도한 독자는 비로소 그들의 삶이 가진 진정성을 바라볼 수 있다. 정지은의 사랑은 아름다웠고, 정희재가 살아갈 앞으로의 삶도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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