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뜻대로 살기란 참 어렵다. 지금도 어려운데 1940년대는 어땠을까. 그것도 전체주의의 광기에 휩싸인 전시의 독일이라면. '시대의 거대한 소음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상실'했으나 니나는 나치즘에 저항한다. 독일인인 그녀가 순응할 수 있던 체제에 저항한 이유는 단순하다. 나치즘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겐 굴종을 거부한 죽음조차도 완전한 자유가 된다.이런 니나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 20살 연상의 슈타인. 니나가 멋진 신여성이라면 이 남자는 완전 바보다. 18년 동안 자신을 허락하지 않는 한 여자만 사랑하는 남자가 바보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는 니나와 잘 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의심과 편협함으로 기회를 놓친다. 니나는 멋진 신여성이지만 썸녀로선 최악이다. 슈타인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갔으면 그에게 연락하지 않는 게 예의일 텐데, 그녀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 그에게 연락하고 도움을 청한다. 이거 요즘 말로는 희망 고문. 나도 남자인지라 ㅂㄷㅂㄷ거리며 읽었다. 슈타인을 몇 번이나 매몰차게 내친 니나가 다시 그를 불렀을 때 슈타인은 일기를 쓴다. <어쨌건 나는 그녀를 찾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인이 휘파람을 불면 달려가야 하는 개도 아니고>... ㅋㅋㅋ. 읽으며 슈타인 너 인마, 화이팅이다!라고 외쳤다. 그런데 2주 후 일기의 첫 문장은 이렇다. <어제 마침내 니나에게 갔다>. 이런 븅신 쪼다 같으니라구 ㅜㅜ. 안타까운 사랑의 결말은 직접 읽어보시길. 웃자고 썼지만 명작입니다.이 소설은 자유로운 신여성 니나에 대한 찬사다. 1950년 이 소설이 발표되고 독일과 세계는 니나 열풍에 빠졌다. 국내엔 1967년 전혜린에 의해 번역되어 소개됐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자유에 열광한다는 건 반대로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란 정말 어렵다는 말과 같다. 자기 주도적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모아 놓은 돈으로 훌쩍 세계 여행 떠나는 걸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직장에서 나와 자신이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하는 걸까? 이조차 내 고정관념 속 자유로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의 삶이 완전한 자유의 결과는 아니었음은 분명할 것이다. 자기 주도적 삶이란 삶을 위험 속에 던져보는 것과 같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나이 들며 가다듬은 삶의 양식이란 조금씩 변수와 리스크를 제거하며 사는 것이었다. 삶은 점점 뭉툭해져갔다. 어디로 처박힐지 모르는 위험은 없지만 그렇다고 큰 재미가 있지도 않은 삶. 남들 비위 맞추며 살다가 돌아보면 어느 순간 뱃살이 늘어나 있는 삶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삶을 처음부터 원한 건 아니었다. 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 내 삶이 진짜 내 것이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삶을 한치 앞도 모르는 곳에 던지며 "나는 몰락하지 않아요"라고 말했던 니나는 진정 아름답다. 이대로 마무리하면 너무 루저 같으니까 삶에 대한 변명을 조금만 하자. 꼭 자유로운 삶만이 칭송받을 가치를 지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설에서 니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슈타인의 고통스러운 일기를 읽으며 눈물 흘렸던 니나의 언니 마르그레트의 삶은 평범하다. 평범하게 살고, 평범하게 결혼하고, 평범하게 자녀를 키운다. 두 남녀의 고통스러운 삶의 행보를 글로 목도하기만 하는 그녀는 자신의 삶이 '연극의 한가운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삶을 쉽게 폄하할 순 없다. 작은 행복도 분명 우리가 원했던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이니까. '연극의 한가운데' 설지 '삶의 한가운데' 설지는 본인의 몫이다. 적어도 자신의 위치를 되묻고 끄덕일 줄 알면 된 거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