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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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어지간히도 안 읽히는 한국에서 그래도 독자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 작가를 꼽으라면 정유정 작가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저는 정유정 작가의 책을 <7년의 밤>만 읽어봤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대중이 그의 소설에 열광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가독성 좋고 재밌거든요. 정유정이란 브랜드는 믿고 고를만합니다. 신작 <종의 기원>도 흡인력 있고 재밌습니다.


제목이 의미심장합니다. 읽다 보면 그 의미를 곧 알 수 있습니다. 소설은 인간이 마땅히 느껴야 할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이코패스. 그 '종'이 어떻게 태어나고 현재에 이르렀는지를 말합니다. 이 '종의 기원'에 대한 설명은 두 채널로 이뤄집니다. 주인공의 독백과 어머니의 일기입니다. 주인공은 어려서부터 자신을 둘러싼 억압과 비정상적인 애착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먹어야 했던 간질 발작 예방약을 '포식자를 평생토록 가둘 무형의 감옥(267)'으로 인식하고 친구인 해진에게 묘한 경쟁심과 반발심을 느낍니다. 반면 어머니는 아들(주인공)의 본성을 이전부터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에게 아들의 본성은 고칠 수 없는 것이기에 통제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됩니다. 이 통제는 '이 세상에 살아서는 안 될 놈(84)'을 어떻게든 품고 가려는 모성애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손을 들어주시렵니까. 


전작처럼 문장 호흡이 경쾌하고 이야기의 방향이 뚜렷해 잘 읽히지만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7년의 밤>에서는 등장인물 각각의 캐릭터가 생생히 살아있어 그들의 심리와 행동을 읽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영화화된다면 아버지는 조진웅, 삼촌은 조정석으로 캐스팅하는 게 좋겠다며 생각하고 말이죠 (다 어긋났습니다 흑). 반면 <종의 기원>에서 주인공 외 등장인물의 캐릭터는 모두 묻힙니다. 영화화되면 누가 연기해도 상관 없을 정도입니다. 인물의 내면에 집중하는 건 이야기의 농밀함을 끌어올릴 순 있지만 풍성함까지 살릴 순 없는 양날의 검인 듯합니다. <7년의 밤> 영화는 꼭 볼 테지만, <종의 기원> 영화는 별로 기대되지 않습니다.


어머니와 아들의 친구가 서로 보이는 애착은 비정상적입니다. 어머니는 작은 아들 친구를 죽은 큰 아들을 닮았단 이유로 양자로 들입니다. 주인공이 친구인 해진에게 묘한 경쟁심을 느끼는 이유입니다. 이런 비정상적인 애착관계는 소설 내적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변형으로 작용하여 주인공의 성격을 강화하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너무 만화같은 설정이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끝까지 읽고 소설 도입부를 다시 읽으면 색다르게 느껴집니다. 도입부 주인공의 세례식에선 '사랑의 예수님 내 모든 삶을 참 아름답게 만드시네'라는 찬송이 퍼집니다. 아이러니하게 책의 제목은 창조론을 부정한 다윈을 연상시키는 '종의 기원'입니다. 작가는 이런 배치를 통해 신의 손길이 닿지 않는 인간 본연의 어두움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정유정 소설 특유의 재미는 여전합니다. 저는 장르 소설보단 순문학을 많이 찾아 읽습니다만 재미없는 책은 질색입니다. 따분한 순문학 읽을 땐 저염 닭 가슴살 먹는 기분이 듭니다. 몸에 좋은 건 알지만 먹다 지치죠 (ㅎㅎ). 그에 비하면 정유정 소설은 연유 더블에 팥 추가한 설빙 치즈 빙수입니다. 아주 맛있습니다. 다만 다 먹고 나면 너무 달고 차가워 뒷골이 당길지도 모릅니다. 매일 먹기는 부담스러운 디저트이지만 그 서늘함을 만끽하고 싶으시면 더운 여름이 제 철입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나는 리모컨을 다시 집어들고, 채널을 돌리기 시작했다. 약속이라도 했는지, 죄다 먹는 방송만 걸렸다. 홈쇼핑에선 양념갈비를 뜯어먹고, 예능 방송에선 어떤 남자가 소 한 마리를 부위별로 가르고, 드라마에선 군인 둘이 번개탄에 삼겹살을 굽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생존하는 법과 더불어 기다리는 법을 배운다. 먹는 법과 먹을 수 있을 때까지 굶는 법을 동시에 터득하는 것이다. 오로지 인간만 굶는 법을 배우지 못한 생물이었다. 오만 가지 것을 먹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먹으며, 매일 매 순간 먹는 이야기에 열광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먹을 것을 향한 저 광기는 포식포르노와 딱히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이 지상의 생명체 중 자기 욕망에 대해 가장 참을성이 없는 종이었다. 27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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