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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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김연수 작가에게 사과해야 할 것 같다. SNS에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사랑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라는 중2병(...) 같은 문장이 돌아다니길래 그저 그런 연애 소설인 줄 알았다. 하마터면 읽지도 않고 오해한 채 책을 펼치지 않을 뻔했다. 막상 읽어보니 한순간도 손에서 뗄 수 없는 추리 소설이었다. 탐정이 안 나오지만, 어차피 모든 소설은 인생의 '왜'와 '어떻게'를 향해 달려가므로 추리 소설의 일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억지라구요? ㅇㅈ합니다...). 그리고 이 소설은 어려서 미국으로 입양된 카밀라가 생生의 기원을 찾는 이야기인 동시에, 소설이 어떻게 쓰여야 하고 왜 읽혀야 하는지에 대한 메타 소설이기도 하다.

인간은 무엇으로 정의될까. 한 사람의 과거가 그의 현재를 규정할 수 있을까. 소설은 존재의 이유를 묻는다. 카밀라는 양아버지에게 자신의 이름이 왜 카밀라냐고 묻지만 '카밀라는 카밀라니까 카밀라'라는 동어 반복식의 대답이 돌아온다. 이처럼 개인의 존재엔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개인의 기원은 분명히 존재한다. 카밀라는 한국으로 돌아가 어머니의 일생과 진남여고의 동백꽃을 확인한다. 그 시점부터 그녀는 카밀라니까 카밀라였던 카밀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된다. 그녀는 앞으로 정희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어떤 진실을 알게 되면 한 인간은 더 이상 그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사람은 '점의 인생을 살고 난 뒤에 그걸 선의 인생으로 회상(178)'한다. 그러나 카밀라는 출생 당시의 인생이 수수께끼이기 때문에 선의 인생으로 회상을 할 수 없다. 그녀의 점(과거)이 무엇이었느냐에 따라 ― 최성식의 딸, 정재성의 딸, 이희재의 딸 ― 그녀의 존재와 앞으로의 삶의 이유도 규정될 것이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일 수도, 한 여자의 삶의 이유였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는 과거가 현재의 인간을 규정한다는 건 잔인한 일이다. 과연 인간의 운명은 지나온 과거에 달려 있는 것일까. 너무 허무하다. 대답은 조금 미뤄두고 소설에서 가장 중요하고, 신비롭고, 이해 안 되는(...) 장면을 보자. 2장의 마지막 장면과 4장의 마지막 장면의 시간은 분명 같다. 하지만 2장의 마지막에서 이희재를 만나는 건 정희재(카밀라)고, 4장의 마지막에서 이희재를 만나는 건 정지은이다. 과연 이희재가 양관에서 만난 여자는 2012년의 카밀라일까 1984년의 정지은일까. 작가가 이렇게 시공간을 비튼 이유는 무엇일까.

정희재는 진남에서 어머니의 진실을 파헤치려 하지만 진실을 감추려 하거나, 자신의 왜곡된 기억을 진실로 믿고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 정지은의 죽음은 한 사람의 기억으로만 재구성할 수 없다. 정지은 주변의 여러 이야기들을 모두 모으고, 입체적으로 재조립 했을 때 겨우 형상이 드러난다. 이처럼 한 사람의 진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심연에 묻히고 영영 꺼내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진실을 알기 위해선 그 심연으로 용감히 들어가야 한다. 그것을 누가 해야 하는가. 소설 안에선 '일어날 수도 있었던, 하지만 끝내 이뤄지지 않은 일들을 들려주는 이야기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심연을 건너오지 못하고 먼지처럼 흩어진 고통과 슬픔의 기억들(253)'을 수집하는 '바람의 말 아카이브'란 공간이 그 역할을 수행한다. 바람의 말 아카이브가 떠도는 말을 모으고 전달한 뒤에야 김미옥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잊은 죄를 깨달은 사람이 되고, 정지은은 오빠의 아이를 낳고 자살한 여자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와 살아갈 이유를 빼앗긴 여자가 된다. 이 소설적 공간은 묵묵히 진실을 알리길 원하는 기자나, 소설가, 또는 진실을 이야기하려는 어느 누군가와도 같이 느껴진다. 이야기의 윤리가 형상화된 공간이다.

과연 마지막에 이희재가 만난 여자는 누구였을까. 짓궂은 소설가의 장난(ㅎㅎ)이기 때문에 그걸 캐묻는 건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다만 의도를 추측하려 노력해야 할 뿐이다. 2장의 마지막에서 정희재는 어머니의 진실을 묻고 묻다 최종적 진실(바람의 말 아카이브) 앞에 당도한다. 4장의 마지막에서 정지은은 크레인 위에 올라간 아버지를 살리려 양관에 왔다. 1984년의 정지은이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이희재를 만났고, 2012년의 정희재는 어머니의 진실을 지키기 위해 이희재를 만나러 왔다. '한 번의 삶은 살아보지 않은 삶이나 마찬가지(251)'라고 정지은에게 죄를 지었던 '우리(소녀들)'는 체념하듯 말한다. 정지은과 정희재의 인생도 단 한 번뿐이었다. 그러나 그 한 번뿐인 삶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는 노력이 반복되는 걸 독자는 확인한다. 그 순간 정희재도 독자도 과거가 규정하는 단 한 번뿐인 삶의 허무함을 극복한다. '아름다움이란 솜씨의 문제이고, 솜씨는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138)'다. 소설의 마지막 장까지 당도한 독자는 비로소 그들의 삶이 가진 진정성을 바라볼 수 있다. 정지은의 사랑은 아름다웠고, 정희재가 살아갈 앞으로의 삶도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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