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K라는 친구가 있다.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 되어 처음 알게 됐고, 고등학교에선 기숙사 방을 같이 쓰며 졸업할 때까지 친하게 지냈다. 지금도 친하냐고 묻는다면, 글쎄. 만나서 어색하진 않지만 적극적으로 연락은 하지 않는다. 친하지 않다고 해야 하나 예전만 하지 않다고 해야 하나, 잘 모르겠다.
 K가 우정을 유지하는 방식은 조금 독특했는데 이런 식이었다. 보통은 학년이나 학교가 바뀌어도 아주 친했던 친구라면 연락을 하며 관계를 유지할 텐데, K는 그렇지 않았다. 학년이 바뀌면 일 년 내내 같이 지냈던 친구는 금방 잊고 새 친구와 금방 친해져 새로운 일 년을 같이 지내는 식이었다. 아이들은 K의 이런 성향을 뒤에서 흉보곤 했다. 나는 K와 6년 동안 친하게 지냈으나 서로 다른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서서히 멀어졌으니, 나와 K가 6년을 친하게 지낸 건 그저 6년을 같이 지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K는 회장의 손자였다. K의 할아버지가 창립한 회사가 대기업은 아니고 주유소에 기름을 공급하는 xx 유업이었지만, 작은 도시라서 그 정도라도 충분히 손에 꼽을만한 부자였다. 1998년 K의 어머니가 운전하던 새빨간 티뷰론과 K가 살던 64평 아파트가 생각난다. 4인 가족이 살기엔 너무 넓어 보였다. K의 집에서 장식이 화려한 과도 같은 걸 봤는데, 암만 봐도 과일 깎는 칼은 아닌 것 같아 물어보니 편지 봉투 뜯는 칼이라고 했다. 그 즈음엔 우리 집도 괜찮게 사는 편이었지만, K의 집과 차이는 확실했다. 우리 집에선 편지 봉투를 손으로 찢었고, K의 집에선 봉투 접착면에 칼을 집어넣었다. K는 고등학교 졸업 후 서초 래미안으로 이사 갔다.
 K가 평소에 이런 부를 과시하고 지낸 건 아니었다. 그러나 민감한 아이들이 K가 부잣집 아들이란 걸 놓칠 리 없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K의 할아버지가 교회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는 괴소문이 돌았다. 아이들은 습관적으로 넌 부잣집 아들이니까, 넌 돈 많으니까,라고 말하곤 했다. 오래 친했던 나도 가끔 농담으로 그런 소리를 했다. 그렇다면 K는 살면서 그런 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을까? 오백 번? 천 번? 말이 아니라 면봉이었다면 귀에서 진물이 넘쳐 흘렀겠다. K는 공부도 잘했다. 이 사실은 아이들의 열등감을 더 크게 만들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걔는 돈만 많아, 가 아니라 돈도 많아,라는 소리를 해야 했으니. 더 나아가선 집에 돈이 많아서 공부를 잘하지,라는 근거가 모호한 평가절하까지 돌았다. 아이들이 자격지심을 가진 순간 K와 아이들과의 우정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너무 깊게 우정을 유지하지 않는 K의 방식은 자신을 보호하는 무의식적 방편일지도 몰랐다.

 최은영의 소설집 『쇼코의 미소』는 실패한 관계에 대해서 말한다. 표제작 「쇼코의 미소」의 화자는 쇼코와 관계를 유지하는 데 실패하고, 자신을 키워준 할아버지와도 정상적인 애착 관계를 형성하지 못 한다. 화자의 눈엔 쇼코의 부족함만, 할아버지의 못남만 보인다. 그러나 화자도 철저하게 실패한 인간이다. 차이가 있다면 쇼코와 할아버지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던 사람이고, 화자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려던 사람이라는 것뿐이다.
 「한지와 영주」에선 프랑스의 수도원에서 봉사 활동을 하는 화자가 등장한다. 영주는 그곳에서 케냐 흑인 한지를 만나고 가까워진다. 한지는 자신의 불우한 가족사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패배감을 가지고 있던 영주는 한지에게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작별의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한지는 영주를 일부러 외면한다.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소설이었지만 한지의 입장에 서면 이해할 수 있다. 케냐 흑인 한지의 눈에는 한국인 영주가 어떻게 보였을까? 생각할수록 그녀와 나는 같은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는 명확한 한계만 느끼지 않았을까? 영주가 자신의 '헐벗은 마음을 정직하게 보(174)'지 못 하고, 드러내지도 못 했을 때 관계의 실패는 예정되어 있었다. 한지는 이별을 앞두고 자신이 받을 상처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다른 소설들에서도 주로 실패한 관계가 이야기의 동기가 된다. 안타깝게도 타인의 고통은 그것을 보는 사람도 불편하게 만든다. 양자의 관계에서 한 쪽만 고통받을 때, 혹은 한 쪽은 고통을 숨겨 다른 쪽의 고통만 드러날 때 관계는 틀어진다. 고통받는 자신이 자격지심으로 상대방을 밀어내든지, 그나마 나은 자신이 고통받는 사람을 외면하든지. 정해진 수순처럼 이별이 다가오면 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하는 일이라곤 에둘러 자신을 '안전하게 갈라놓(82)'는 게 고작이다.
 
 우린 살며 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러나 서로 완벽하게 같을 수 없다. 그러니 역치만 다를 뿐 사소한 상처로도 멀어지는 게 당연할지 모른다. 그러나 관계의 회복은 영원히 불가능한 게 아니다. 「쇼코의 미소」의 화자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할아버지의 마지막 두 달을 지킨다. 화자는 영원히 회복하지 못할 것 같은 관계를 지켜내고 미워하던 어머니까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관계는 '껍데기만 보고 단죄(48)'하지 않을 때, '사랑받는 것을 두려워하(206)'지 않을 때 회복될 수 있다. 다시 만난 쇼코는 서늘하게 웃었다.

 K는 거의 십 년이 지나 다시 볼 수 있었다. 결혼식 전에 청첩장을 전달하겠다고 술자리를 만든 것이었다. 어쨌거나 꽤나 가까운 친구였으므로 난 그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다시 만난 K는 여전히 먹고사는 데는 문제없어 보였지만 그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같이 나이 먹어가는 입장에서 다시 만난 게 너무 늦었다는 생각을 했다. K가 학창시절 받았던 은근한 미움에 이유야 있었지만 그게 합당한 것은 아니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나의 실패한 관계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K를 생각했다. 우리의 실패한 관계들은 그때 우리가 너무 어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이 들고도 그게 다시 회복되지 않는 것은 왜일까? 그 사이 늙어버린 마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난 어느새 성공보다 실패를 먼저 상상하는 인간이 돼버렸다. 시도하기 전에 고개를 젓는, 실패로 인한 자존감의 손상을 두려워하는, 그런 인간이.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11-21 1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쥬드 2016-11-22 11:05   좋아요 0 | URL
괜찮은 단편집이었습니다. 작가님을 직접 만나시다니 부럽습니다 ㅎㅎ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 바로 지금 여기에서, 고유명사로 산다는 것
최진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공자를 싫어한다. 천 원, 오천 원, 오만 원 권에 유가의 사상가 두 명과 그중 한 명의 어머니가 들어있는 게 싫다. 단정적으로 말해 그 위인들이 지금의 우리에게 뭘 해줬나? 잘 모르겠다 나는. 그것들은 지금의 한국 사회에도 여전히 유가의 입김이 은연중에 작동함을 보여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근대에선 비실용적이고 가부장적인 사고가 만연했겠지만, 근대 이후 지금의 한국에도 그것들이 아직 생생히 살아 숨 쉬는 데에는 분명 유교의 책임이 있다. 만동묘라고 들어보셨는지... 검색해보시길. 만동묘 아니더라도 지금 만연한 꼰대 문화, 명절에 모여서 지내는 제사,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시작되는 남의 삶에 대한 참견, 여자들만 신나게 뒤집어야 할 동그랑땡. 다음 주면 일상에서 생생히 겪을 일들이다.

노자 인문학 리뷰에 웬 공자 이야기만 잔뜩? 노자의 사상이 공자의 사상과는 상당히 반대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가령 공자는 '인仁'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간 공통의 본질이라고 말했는데, 노자는 이 기준이 결국 폭력으로 행사될 소지가 크다고 비판했다. 더 설명하면 이렇다. 공자는 '본질'을 긍정한다. '본질'을 긍정하면 그 확장으로 '이상'이 설정될 수밖에 없다. 이 이상은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기준'으로 작용하게 된다. 기준은 필연적으로 구분하고 배제하고 억압하는 작용을 하게 된다. 배제와 억압에서 갈등과 차등화가 비롯된다. 노자는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기준을 전제하는 한, 극단적인 경쟁과 폭력의 가능성을 없앨 수 없다고 봤다. 사회는 경직되고 자율성은 발휘될 길을 잃고 새로운 방향으로의 진보도 쉽지 않게 된다. 사회를 폐쇄적이고 경직된 길로 나아가지 않게 하려면, 그런 부정적 기능을 조장하는 '기준'이 건축될 길을 차단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이다.

아주 거칠게 줄이자면 하나의 본질(진리)를 인정하고 추구하는 것이 공자의 사상이고, 모든 사물과 이치에는 대립하는 양면이 있다는 게 노자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대립면의 긴장이 주는 탄성을 잃은 모든 일은 광신이기 쉬우며 자기가 진실이라 믿는 어떤 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견제하는 내공을 발휘해 긴장을 유지할 때, 오히려 폭발력이 터져 나온다고 말한다 (215). 이런 해석은 다양성을 피하려야 피할 수도 없는 현대 사회와 놀랍게도 맞닿아 있다.

자신이 믿는 종교만,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만, 그도 아니라면 자신이 살았던 삶의 방식만을 진짜라고 믿으며 남에게 섣부른 충고를 일삼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몇 달 전엔 홍대의 '일베' 조각상이 다른 학생에 의해 파괴되었다. 어찌 됐건 적법한 절차로 세워진 조형물을 파괴한 것이다. 작가는 그것으로 예술이 완성됐다고 속으로 웃었을지 모른다. 일베에 대한 가치판단을 떠나 단지 손 모양을 옮겨놓은 조각상을 파괴했을 때 파괴자가 보여준 건 거창한 정의가 아니라 치기 어린 분노일 뿐이다. 그 시점에서 파괴자는 완벽히 패배했다.

책은 중국의 고대 역사부터 시작해서 다분히 당연한 말들을 늘어놓기에 약간 지루했다. 그러나 노자의 사상만큼은 곱씹어 볼 수밖에 없었다. 노자는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라'고 말했다. 이는 단지 꿈을 위해 현실의 삶을 저버리는 것만을 안타까워하는 말이 아니다. 거창한 대의를 위해 일상을 무시하는 이들이 새겨야 할 말이다. 미래는 '지금의 이것'들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지기 마련이고, 작은 것들의 실천 없는 대의는 공허하기만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노자를 해석하며 '인간의 인격과 동력이 진정으로 나타나는 곳은 구체적인 일상이'라고 말한다.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 사상의 노자였다. 자 이제 노자를 실천합시다. 모든 선善과 가치 실현은 '지금 여기'부터 시작되어야 하니까요. 당장 우리가 시작할 일은 추석 때 오지랖 안 떨기, 남자는 부엌일 돕기입니다 (찡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 - 철학이 묻고 심리학이 답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진실
로랑 베그 지음, 이세진 옮김 / 부키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 보고 이거다 싶었다. 내가 경계하는 도덕주의, 도덕적 엄숙주의에 대한 답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책을 읽어보니 제목의 결이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스스로) 도덕적(인 줄 아는)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가 정확한 제목이다. 책의 내용은 인간의 선행과 악행의 기저에 어떤 심리가 깔려있는지, 대개 인간은 이기적이고 비합리적인데 왜 그런 건지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쨌든, 책 후반에 인간의 도덕주의와 그것의 오작동에 대한 내용을 확인했으므로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ㅎㅎ). 재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저술 방식이었다. 문장마다 심리학 실험과 관련 저서를 근거로 인용한다. 『사피엔스』의 서평에서 저자의 추측만으로 진행되는 주장이 아쉽다고 말했는데 이 책은 그와 상반되는 좋은 논지 전개 방법을 보여준다. '사회과학'도 '과학'이라면, 그것을 다루는 책은 추측을 배제하고, 근거 중심으로 저술되어야 한다. 좋다. 리뷰 시작.

최근 설현과 기타 1명(ㅋ)이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몰라본 죄로 사죄하며 눈물을 흘렸다. 대중은 아이돌의 지력을 평가하는 게 아니라 도덕성을 재단했다. 어떻게 안중근 의사의 얼굴을 모를 수 있어? 긴또깡이라고 시시덕거릴 수 있어? 참 개념 없네. 상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그만인데 대중은 기어코 돌팔매질을 한다. AOA는 졸지에 민족정신이 결여된 아이돌이 돼버렸다.

AOA가 안중근 의사를 모르고 긴또깡 아닌가? 하며 웃었을 때 누가 피해를 봤을까? 피해자는 없다. 이런 행동을 '피해자가 존재하지 않는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너선 하이트라는 사람이 이런 상황을 브라질과 미국의 실험 참가자들에게 제시하고 반응을 조사했다. (174p)

(1) 어떤 아들이 죽어가는 어머니에게 어머니의 무덤을 매주 한 번씩 찾아오겠노라 약속했다. 그러나 아들은 너무 바빠서 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2) 어떤 여자가 화장실 청소를 하면서 낡은 성조기(혹은 브라질 국기)를 걸레로 썼다.
(3) 한 가족이 자기네 집에서 기르던 개가 차에 치여 죽자 그 고기를 먹었다.
(4) 오빠와 여동생이 입술에 키스를 했다.
(5) 한 남자가 죽은 닭의 사체로 자위행위를 하고는 그 닭을 구워서 먹었다.

사회 경제적 수준이 낮을수록 엄격한 판단을 내리는 경향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필라델피아의 상류층은 정의, 인권, 타인에 대한 침해에 근거한 도덕적 사유를 하는 반면, 브라질의 하층민들은 도덕을 자율적 윤리보다 훨씬 광범위하게(이를테면 공동체나 집단의 정신과 관련된 부분까지 포함해서) 생각했다는 것이다.

한편 AOA에 대한 비난은 집단과의 동일시로도 설명할 수 있다. 집단과의 동일시가 강력할수록 그 집단의 규범은 영향력이 있고 거기서 벗어나는 자들은 용서받기 어려우며,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집단의 영향력을 덜 받지만, 권위적 성격의 소유자는 그런 영향력에 더 많이 휘둘린다는 연구 결과(98p)를 주목할 만 하다. 전 국민이 붉은 악마로 변신하고,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그렇지도 않지만) 황우석이고 박태환이고 일단 복귀시켜야 하며, 스포츠 경기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현수막을 거는 한국 대중의 심리는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인들은 자신보다 집단을 우선시하는 유교적 관습을 주입받았고, 오랜 독재 하에서 국가와 민족에 자신을 동일시하도록 교육받았다. 국민들이 안중근을 모르는 AOA를 못 마땅해하는 데엔 이유가 있다.

저자는 '가혹한 역설이지만 스스로 타의 모범이 될 만하다는 생각이 모범적일 수 없는 행동을 낳는다. (240p)'고 말한다. 도덕성이 우월하다는 생각을 유도했더니 타인에 대한 엄격한 비난을 퍼붓거나 앙심을 품었다는 연구 결과가 주장을 뒷받침한다. 대중은 자신이 안중근 사진을 안다는 걸 지식의 우위가 아니라 도덕성의 우위로 인식한다. 이로써 AOA가 안중근 사진을 모르는 건 도덕성의 부족으로 변한다. 대중은 비난으로 도덕적 우월감을 느낀다.

설현 이야기는 그만할까. 그럼 며칠 전에 있었던 터널 안 연쇄 추돌 사고를 떠올려 보자. 종종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을 목격한다. '버스 사이로 달린 마티즈 잘못도 있네'. 레미콘이 크루즈를 덮쳤을 땐 '크루즈 끝까지 브레이크 밟고 있네, 레미콘 달려오는 거 봤으면 피해야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왜 법규를 위반하지 않은 피해자가 부정적 판단의 대상이 될까?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 이유는 설명을 찾고, 가급적이면 원흉을 지목하려는 욕구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오히려 피해자가 예상치 못한 뭇매를 맞는 것이다. 사고를 '당한' 운전자는 사고의 피해가 클수록 비난받는다. 피해자는 그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증거를 사후에 찾아 들추는 사람들 때문에 또 다른 피해를 입는다. 성폭행 피해자의 상황 진술에서는 평소 아무 문제도 되지 않거나 오히려 좋게 받아들여질 법한 요소들도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206p". 사람들은 세상이 공정하다고 생각하고 그 믿음의 핵심에 타인의 어쩔 수 없는 불행을 설명하려는 욕구가 있다는 말이다 (222p). 말살당한 아메리카 인디언부터 최근 강남역 묻지마 살해당한 여자까지 이 병리적 현상은 여전하다. '당할만해서 당했다'. 명백한 2차 가해다.

한편 의사라서 재밌게 읽은 부분도 있다. "사회복지사, 의료인, 간병인이나 상담사 등이 그 직업에 오래 종사하다 보면 감정적으로 냉혹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감정이입능력이 뛰어난 의료계 종사자들이 제일 먼저 자기 일에 염증을 느끼고 말기 환자들을 회피한다는 보고도 있다. 고통을 치료하는 데 익숙한 의사들은 괴로워하는 환자의 동영상을 보아도 임상 경험이 없는 의사들만큼 고통과 관련된 뇌 영역이 활성화되지 않았다. 게다가 의사들은 환자가 당하는 고통을 그렇게까지 힘든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222p". 감정이입이 지나치면 자신도 우울해지므로 진정한 의미의 동정심이 발휘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의사는 강철이다'라는 말과 부합하는 이야기다. 지금은 친절함을 자부하지만 (ㅋㅋ) 전공의 시절엔 그러지 못했다. 삶이 짜증 나고 피곤하니 병마와 싸워야 할 의사가 환자, 보호자, 간호사와 싸우곤 했다. 힘들면 인간이 부박해진다고 핑계를 댔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던 걸 보면 그 시절의 나는 분명 병리적이었다. 다행히 (ㅎㅎ) 책을 읽으며 핑곗거리를 조금 찾아냈다. 저자는 자기조절능력이 소진되면 이타심을 발휘하기 어려우며 충동에 굴복하기 쉽다고 말한다 (284p). 더군다나 '자기조절능력은 일반적으로 수면을 취하거나 포도당을 섭취함으로써 회복된다 (286p)'는 말은 얼마나 적확한가!.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한 전공의들은 폭력적으로 변하고 일이 어느 정도 끝난 새벽에 포도당을 과도하게 섭취하려 한다 (ㅋㅋ). 오프 때는 자기 파괴적(!) 과소비를 한다. 의사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다.

현대 사회의 대중은 몰개체화로 인한 자의식 저하를 겪으며, 익명성으로 대표되는 인터넷 환경에서 살아간다. 또한 격무에 시달려 자기조절능력이 소진된 상태다. 양심적인 사람일수록 권위에 복종하기 쉬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악을 자행하기도 한다. 이런 인간들이 나쁜 사회를 만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희망적인 연구 결과도 있다. 위급한 상황에서 목격자가 너무 많으면 방관자가 되기 쉽다는 연구 결과를 접한 사람들에게서는 책임 확산 현상이 한결 적게 나타났다고 한다. 비합리성의 극복은 그것의 자각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조심스럽게 말해도 될까?. 저자는 타자야말로 인간 도덕성의 근원이자 목적이라고 말한다. 도덕성에 만족하고 자부심을 품기보다는 명철하고 객관적인 자세로 그것을 바라볼 때 우리의 도덕성은 더욱 완전해진다는 말은 인간에 대한 염증을 쉽게 느끼는 요즘 시대에 많은 걸 시사한다. 마지막 챕터의 제목은 이렇다. <아는 만큼 도덕적으로 살 수 있다>. 아, 이제부터라도 내 병신스러움을 알고 착하게 살아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 전 로랑 베그의 책에서 인간은 불행에 대해 원인을 찾고 원흉을 지목하려는 욕구가 있다는 문장을 읽었다. 어떤 문제 상황에서 원인을 찾는다는 건 문제 해결과 재발 방지를 위해 필요한 과정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유 없는 막연한 불행에서도 원인과 원흉을 지목하려 하기에 더 큰 불행을 자초하기도 한다. 관동 대지진 때는 대상을 찾지 못한 분노가 조선인을 향해 수천 명이 학살 당했으며 1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경제 대공황에 대한 독일인의 좌절은 유태인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다. 이처럼 인간은 이유 없는 불행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필립 로스는 1940년대 중반, 당시에 정복되지 않았던 폴리오에 맞닥뜨린 인간 군상의 혼란을 그린다.

주인공 버키 캔터는 아이들을 관리하는 체육 교사였다. 그는 자신이 관리하던 아이들이 폴리오에 감염되어 죽자 죄책감에 휩싸인다. 애인이 있는 곳으로 일터를 옮긴 후에도 유태인 거리의 아이들은 폴리오로 죽어나간다. 그리고 버키 캔터가 옮겨간 인디언 힐에도 폴리오의 마수가 뻗친다. 그곳에서도 가장 친했던 학생이 죽고 본인도 폴리오에 걸려 건강했던 육체를 잃는다.

폴리오에 속수 무책으로 아이들이 죽어나갈 때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유태인 거리의 한 여인은 누가 책임자냐고 공격적으로 묻고 희생자의 아버지는 왜 하필 자신의 아들이 죽었는지 이게 공정한 건지 묻는다. 히스테리와 공황이다. 시간이 지나 유태인 거리 놀이터는 모두 폐쇄된다. 삶의 터전이 오염물로 간주되어 격리된 것이다. 그러나 진정 불행한 반응은 자신을 향한 분노다.

인간이 신을 믿는 건 생의 유한함과 능력의 한계를 알기 때문이다. 설명할 수 없는 재앙을 더 이상 설명하지 않으려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러나 버키 캔터는 불행한 가정 환경에서 강하게 성장했고 단단한 자아를 지니게 됐기에 인간의 한계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버키 캔터는 이유 없는 불행을 선사한 신에게 분노하고 자신을 희생양으로 만든다. 그는 아이들에게 폴리오를 퍼뜨린 게 자신이라는, 아이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휩싸인다. 결과는 가혹하다. 그의 장애에도 결혼을 결심한 애인과 헤어지고 그는 평생을 혼자 지낸다.

네메시스는 신의 노여움을 의인화한 여신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가 실제로 보이지 않는 화살이었을지도 모른다'는 화자의 말은 무엇을 뜻할까. 신 없는 세상에서 인간을 벌하는 건 네메시스가 아니라 그 자신이라는 말 아닐까. 그러나 "벌어진 일은 벌어진 거야. 내가 한 짓은 한 짓이야. 나에게 없는 것은 그냥 없이 사는 거고."라는 버키 캔터의 읊조림은 왜 이다지도 쓸쓸하게 느껴질까. 이토록 헌신적인 남자의 전락은 왜 이리도 안쓰러울까.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망가뜨리곤 했던 인간이기 때문 아닐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 김연수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13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가 만난 건 우연일까. 아니라면 우린 어떻게 연결된 걸까. 소설에선 무엇보다 '연결'이라는 단어가 많이 보인다. 라디오를 들으며 '밤하늘을 떠다니는 그 수많은 이야기들처럼 누군가에게 연결되기를' 원하는가 하면 '개인적 삶은 모두 시대와 연결돼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한다. 급기야 후반부에는 '이 우주의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돼 있다'고 말하거나 '처음부터 우리가 모두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기에 이른다. 소설은 개인과 세계의 연결을 말한다.

뭐가 어떻게 연결됐다는 이야기냐고 묻는다면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이하 화자)는 이 모든 건 할아버지가 가져온 입체 누드사진으로부터 시작됐다고 말한다. 화자의 할아버지는 태평양 전쟁과 한국 전쟁에 징집된다. 이후 간척지 사업을 하려다 간첩으로 몰려 징역까지 살고 자신의 모든 걸 태운다. 화자는 불속에서 타들어가던 사진 한 장을 꺼낸다. 이국 여성이 가랑이를 벌리고 있는 외설적 사진이다. 화자는 방북 예비 대표로 베를린에 건너가 한 남자를 만난다. 그는 행복이라는 놈이 어떻게 생겼는지 안다고 말한다. 그가 꺼낸 행복의 증거는 화자의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은 입체 누드사진이다. 그는 마약 밀매를 했던 아버지가 죽었을 때 그 사진을 챙겨 나온다. 화자와 정민과 강시우의 김제, 정민과 정민 삼촌과 안젤라의 공황장애, 정민 삼촌과 강시우 부친의 마약, 강시우 조부와 레이 조부의 불이농촌도 마찬가지이며 이는 각각의 개인이 부지불식간에 연결되어 있음을 말한다. 이 연결고리를 좇는 동안 독자는 화자의 이야기를 통해 각 개인의 일생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개인끼리의 연결, 개인과 세계의 연결은 어떤 함의를 지니나. 여기에 대한 대답은 조금 미뤄두자.

보잘 것 없는 입체 누드사진은 역사의 거대한 시간 속에 묻힌 개인의 시간을 재구성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한 개인의 삶을 몇 줄 문장으로 정리한들 그것이 올바른 그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할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정확하게 아는 건 우리가 아니라 그 입체 누드사진 같은 사물들일 뿐이다.'라는 종반부 화자의 고백은 타인의 삶을 재구성한 이야기의 윤리성을 되묻는다. 지젝은 '언어는 그것이 가리키는 사물을 단순화하고, 사물을 단일한 하나의 속성으로 환원해버린다'고 말했다. 사물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몇 줄 문장으로 쓸 수 없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할아버지의 삶을 두 차례 전쟁을 겪고 난 후 간첩 혐의를 뒤집어쓰고 징역형 살다 죽은 한국인이라고 쉽게 말하는 건 그 삶의 개별성을 모조리 무시하는 일이다. 화자가 할아버지의 일생을 논리적으로 요약함으로써 그것을 이해하게 되는 게 아니다. 할아버지가 입체 누드사진을 어디서 무슨 심정으로 샀는지 왜 그것을 태워버리려 했는지 상상한 순간, 그는 몇 발자국이나마 할아버지의 인생에 다가간 셈이다.

다시 소설 내 연결고리로 돌아오자. 이것들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사실 현실의 사람 사이에선 이렇게 교묘한 연결고리를 찾기 힘들다. 다만 이것들이 소설적 장치임을 인정하면 독해는 조금 쉬워진다. 헬무트 베르크, 강시우, 정민의 삼촌은 모두 시대의 폭력에 휘말렸다. 이들이 겪은 '증오는 하나일 뿐 (259)'이었으므로 공유하는 시간과 장소와 사물은 개별적 삶이 공유하는 보편적 고통을 의미한다. 이들은 다시 태어난다. 칼 하프너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헬무트 베르크가 됐고, 이길용은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텔레비전에 머리를 처박았을 때 강시우로 다시 태어났다. 정민의 삼촌은 수류탄 투척 사건을 목격했다는 이유로 불합리한 폭력을 겪고 마약 밀수와 자살에 이른다.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우연으로 폭력을 당하고 죽던 시대에서 화자는 '우연한 존재'가 되는 두려움을 극복해야 했다. 그건 정민의 삼촌에게 일어난 일이 진짜였는지 확인하는 것, 우연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노력한 사람의 삶에 혹시 그 어떤 필연의 흔적이 있는 건 아닐까 (329)'묻는 것으로 이뤄진다. 화자는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전달하려 한다. 우연히 살아남은 자의 윤리다.

종반부에서 화자는 브레히트나 벤야민도 한때 자신이 숨쉬는 이 공기를 마신 적이 있었다고 생각함으로써 위로를 얻는다. 고립된 개인들은 외로움으로도 연결되어 있다. 사랑은 제각각이지만 증오는 하나인 시대임에도 사람은 사람을 그리워한다. '이 세상은 온통 읽혀지기를, 들려지기를, 보여지기를 기다리는 것 천지였'기 때문에 화자가 기록한 이야기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다른 누군가에게 가닿을 것이다.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떠날 것이다. 강시우는 그 누구의 슬픔도 아닌 자기 자신이 되어 레이와 떠났다. 화자도 이제 자기 자신이 되었으므로 한국으로 떠날 것이다. 그럼 이쯤에서 리뷰를 마치고 소설가가 일부러 그리 지어놓은 듯한 미완의 제목을 바라보자.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ㅡ

여백은 읽은 사람의 몫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