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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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이 <한겨레>에 기고한 칼럼 '정희진의 어떤 메모'를 편집해서 엮은 책이다. 독후감이면서 시사 문제를 엮은 칼럼이기도 하다. 난 그의 칼럼을 늘 챙겨보진 않았고, 가끔 읽어도 거기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았다 (최근 그의 칼럼 '피해를 공유하는 윤리'는 무섭기도 했다). 그러나 가끔 읽었을 뿐이지만, 문학이나 영화의 분석에서 주류 시각이 쉽게 간과하는 점을 포착하는 그의 능력이 탁월하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기에 이 책을 읽게 됐다. 


그는 베스트셀러를 의도적으로 읽지 않는다고 말한다. 잘 팔리는 책에 돈을 보태고 싶지 않은 쪼잔한 정의감(ㅎㅎ)이 가장 큰 이유이고, 대개 별다른 자극이 없는 게 다음 이유라고 말한다. 그는 '주류'의 관점 밖에서 쓰인,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의 책을 주로 읽는 편이라고 한다. 그리고 늘 다르게, 기존 인식을 유보하고 읽으려고 노력한다고 말한다. 즉, 독서는 읽고 생각하는 노동이라는 것이다. 늘 이렇게 읽어도 피곤할 것이다. 그러나 요즘 나는 쉬우면서 내게 편하게 와 닿는 글만 좇는 건 아니었는지. 음, 어쨌든 지식인의 독서는 다르다. 나는 일반인이다. 하하. 


그는 이해의 영어 단어(under/standing)에 이해의 본질이 있다고 말한다. 낮은 자의 위치에서 읽고 이해하려고 하면 안 보이는 게 보이기 시작한다. 가령 이상의 <오감도>에 대한 그의 해석은 주류 평론가들의 해석과는 다르다. 주류 평론가들이 시적 화자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전능한 까마귀로 해석했다면, 정희진은 시적 화자는 분명히 피사체와 동일시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이상은 조기 경보기와 같은 전능한 까마귀에게 감시 당하는 겁에 질린 민초와 자신을 동일시 한 것이다. 시적 화자가 높이서 내려다보는 새라는 기존 해석은 식민지 시대를 살지 않은 비평가의 욕망일 뿐이다. 식민지 시대를 산 지식인 이상은 어느 누구도 전경을 바라볼 수 없다는 걸 알았으므로 시적 화자의 시선은 감시 당하고 막힌 골목에 닿는 '아이들'의 시선과 같을 수밖에 없다. 시대 상황과 예술가의 윤리에 논리적으로 부합한다. 무릎을 탁 쳤다. 


또한 <님의 침묵>에서 님이 조국을 뜻한다는 뻔한 해석을 비판하면서 초점은 '님이 누구냐'가 아니라 '님'과 '침묵'의 의미로 옮겨가야 한다고 말한다. 떠난 자는 부재하므로 당연히 침묵이고, 그건 중요하지 않다. 반면 남겨진 자의 눈물은 마를 길이 없다. 모든 예술은 남겨진 자의 고통에서 시작되고, 그러므로 예술은 고통받는 자의 특권이다. 이런 해석 역시 낮은 곳에 자신을 위치시킨 독법의 탁월한 결과다. 나는 내가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늘 주류의 시각에서 책을 읽고 영화를 본 건 아니었을까? 소수자와 피해자 중심에서 바라보는 윤리의 필요성을 한 번쯤 다시 생각하게 된다. 


책을 최근 일 년간 꽤 많이 읽었다. 독서는 읽기 전의 나보다 읽은 후의 내가 지식적으로나 인격적으로 분명 좀 더 나은 인간이 되리라는 믿음에서였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 적어도 게임보다는 낫겠지!). 정희진은 '아파서' 책을 읽는다고 말한다. 책을 읽으면 '좀 덜 아프'다는 말이다. 그에 따르면 독서는 삶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자극, 상처, 고통을 해석할 힘을 주는 '읽기 치료'다. 내가 이렇게 거창한 이유로 독서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고통이 따르는 독서에서 역설적으로 치유가 뒤따른다는 말을 읽으니 왠지 모를 안도감이 생긴다. 당분간은 더 읽고, 기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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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세계를 스칠 때 - 정바비 산문집
정바비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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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사람들 SNS에 이 책이 드문 드문 보여서 읽을까 말까 고민했다. 발췌된 글은 좋은데 정바비가 누군지 몰라서. 알아보니 가을 방학의 작사, 작곡을 담당하는 남자였다. 나 가을방학 되게 좋아하는데! 그런데 지금까지 내게 가을방학은 곧 계피나 마찬가지였다. 정바비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으니 노래만 많이 들었지 이거 순 엉터리 팬이었다. 


가을방학 듣는 사람들에게 베스트 넘버를 꼽아보라 하면 보통은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나 <언젠가 너로 인해>를 꼽을 것이다. 나는 그것들도 좋아하지만 <이브나>를 더 좋아한다. 정확히는 그 노래의 가사에 담긴 정서를 좋아한다. 


이브나의 후렴구는 이렇다. "식은 커피 같은 나의 고백에 몇 차례 버스를 보낸 뒤 넌 내게 이렇게 말했지. 난 절대 결단코 수백 날이 지나도 너밖에 모르는 바보는 안 될 거야. 행복함에 눈물범벅일지라도 너 하나로 숨 막힐 바보는 안 될거야." 이렇게 읊조리는 사람이 쓴 글이라면 읽어야겠지. 그래서 읽었다.


읽어보니, 책에선 노래 가사에서 줄곧 보이던 서정성보다는 지적인 유머가 두드러졌다. 정바비는 '무작위로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거기에 괜찮은 농담이 있는 책'이 좋은 여행 에세이집이라고 말하는데 그의 책이야말로 괜찮은 농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남을 불쾌하게 하지 않는 지적인 유머. 이런 건 언제나 환영이다. 


재밌게 읽고 나서 한 가지 의문점이 든다. 그는 남녀 관계에 대한 솔직하고 신랄한 글을 참 잘 쓰는데, 정작 자신은 이성 때문에 외로움을 느껴본 적 없다고 말한다. 그가 느낀 유일한 외로움이란 키우던 고양이를 건강상의 이유로 원래 주인에게 돌려보냈을 때 한나절 내내 울며 느낀 감정이었다고. 이 사람이 어떻게 가을방학 가사를 쓴 건지 잠시 혼란에 빠졌다. 곰곰이 생각하고 내린 추측은 이렇다. 사랑의 애틋함을 말하는 노래들보단 사랑의 시작을 약간 경계하는 듯한 <이브나>가 그의 사랑 방식에 조금 더 가까운 것 아니었을까. 많은 사랑을 해봤기에 깊게 사랑하면 깊게 아프다는 걸 알아버린 것 아닌지. 많았던 연애 경험이 그로 하여금 깊은 연애를 경계하게 만든 것 아닌지. 그래서 너와 함께 있어도 '너의 세계를 스칠 때'라고 말하는 것 아닌지. 


그 뜻이 아닌 것 같다구요? 아님 말구요. <이브나>를 좋아하는 사람의 자의적 해석이었다. 제목은 왠지 서글프지만 읽는 내내 웃음이 앞니 사이로 비져나오는 재미진 책이었다.



결국 인간의 생에 있어 최악의 사건은 뭘까 생각해보면 역시 크고 작은 시간낭비가 아닐까.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긴 시간을 들였던 사람이 실은 내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라는 현실은 우리를 미치도록 우울하게 만든다. 그건 정말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재판 선고다. 따라서 우리는 자주 불복한다. 항소하고 또 상고한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지점에 이르러서까지. `너와 나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자`는 감상적인 명목을 들어 유예하고 만다. 물론 묵묵히 결과에 승복한다고 해도 당신은 절대 그이를 처음 만났던 날로 돌아갈 수 없다. 29세에 만나 1년을 보내다 헤어지고서 여전히 29세일 수 있는 방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1년 된 연인과 헤어진 당신은 빼도 박도 못하는 30세인 것이다. 그것도 가장 소중한 20대를 마지막 한 해를 오해에 기반한 기대와 실망으로 보내버린 30세 말이다. 13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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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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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에 따르면 청춘은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에 걸치는 인생의 젊은 나이를 뜻한다. 푸를 청靑에, 봄 춘春 자를 쓴다. 그렇다면 청춘이란 보기만 해도 시원한 푸른색에다가 모든 생명이 약동하는 봄의 이미지까지 띠고 있는 것이렸다. 그런데 청춘이라고 일컬어지는 시절의 나는 눅눅한 방에서 게임을 하거나, 강의실에서 휘달려 하며 족보를 외우거나, 남자들끼리 뻔한 술 마시며 밤을 새우곤 했다. 취직하고 나니 시시한 청춘은 지나가고 고달픈 청춘이 찾아왔다. 격주로 한 주는 8시간, 한 주는 24시간 오프를 받았다. 일주일 내내 일하고 오프 땐 밀린 잠을 잤다. 오프 때 뭐라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영화관에 갔지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차 안에서 그냥 잠들어버린 적도 있었다. 아프니까 청춘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청춘이 늘 푸른 봄은 아니었다. 내 20대의 전반기는 시시했고 후반기는 졸렸는데, 청춘이라는 단어는 왠지 부당하다. 차라리 청춘은 너무나 파래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고 말하는 게 적당할 것이다. 


『청춘의 문장들』은 소설가 김연수가 인상 깊게 읽었던 시구(詩句)와 그에 얽힌 젊은 시절의 이야기들을 엮은 것이다. 지금이야 소설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20대의 그는 알 수 없는 미래에 불안해하는 흔한 청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책을 읽어보면 생각하지도 않던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시인이 되겠다고 마음먹고 숱하게 시를 쓰고 버리다가, 등단하지도 못한 채 회사에 취직하고, 가끔 자괴감에 빠진 그의 역사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때의 김연수를 지금의 김연수로 만들었을까? 20대 초반의 김연수는 부모님의 빵집에서 카운터를 보다가 한 스님을 만났다. 그 스님은 빵 두 개를 시켜놓고 보리차를 달라고 말했고, 빵을 다 먹고 나선 김연수를 보더니 10년 뒤엔 모두가 아는 유명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열심히 하십시오, 라고 말했다. 그 후 6년이 지났을 때 문인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그는 '너는 이제 끝났어'라는 무례한 말을 듣는다.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그는 스님이 말한 10년을 떠올리고, 아직 4년이 남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시를 계속 썼다 (그는 시로 등단했다). 지금은 우리가 아는 김연수가 됐다. 


사실 김연수가 유명한 소설가가 된 것이 스님의 말 때문은 아닐 것이다. 어쨌거나 계속 써 나갔으니 시인이 됐을 테다. 무언가를 사랑하고 열망할 때 청춘은 그 자체로 추동력을 갖고, 그는 시를 사랑했으니까. 스님의 말은 그 사랑에 대한 확신이 희미해져갈 때 조금 유예기간을 준 것뿐이다. 그러나 그는 분명 행복한 사람이다. 보통의 청춘에선 더 해도 된다는 스님의 말 같은 게 없고 젊은이들은 늘 불분명한 미래에 시달린다. 스스로를 믿고 삶을 끝까지 밀고 나가기란 어렵다. 


문장과 에피소드는 아름답지만, 뒤돌아봤을 때 청춘이 아름답다는 내용엔 '그건 당신이 성공한 소설가이기 때문이지'라는 삐딱한 심사가 들었다. 이건 무언가를 사랑할 틈도 없이, 떠밀려서 지금 있는 곳까지 흘러 들어온 나의 질투심이다. 어쨌거나 청춘은 돌아오지 않고, 그래서 아름답다는 말만은 확실하다. 그러니까 그 시절의 나는 남자들과 뻔한 술자리만 갖지 말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여자 후배나 병동 간호사에게 추근거려야 했던 것이다. 오늘 일 끝나고 뭐 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청춘의 문장인가. 용기가 없어서 보내지 못한 구애의 문장들이 머리에 맴돈다. 직장 동료가 그 시절의 화려한 무용담을 뽐낼 때, 지금의 나는 도저히 할 말이 없다. 고작 오프 때 차 안에서 잠들었다는 이야기 정도라니. 돌아보니 정말 보잘 것 없는 청춘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남자 다섯 명이랑 술 마셨구나. 제길. 


* 김애란의 「도도한 생활」 중 '청춘은 너무 환해서 창백해져 있었다'라는 문장을 변형

그해 11월, 나는 남몰래 정이 들어 자꾸만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유목민이었다. 염력을 익히는 게 아니라, 일단 대학에 가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고 싶은 사춘기였다.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몰라 선생님을 만나고 돌아와서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머리통을 때렸지만, 이제는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G.K. 체스터튼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랑하는 것은 쉽다. 그것이 사라질 때를 상상할 수 있다면. 열여덟 살의 11월에 나는 처음으로 그렇게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단순히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 사실 때문에 사랑했던 것이며, 사랑하지 못할까봐 안달이 난 것이었다. 19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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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지음, 한은경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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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글은 다르다. 말에는 동반되는 눈빛, 호흡, 억양, 떨림이 존재하지만 글은 글 자체로 존재한다. 그래서 글은 감정을 담기 위해 길어지고 깊어진다. 안부를 묻는 편지든, 연애편지든, 반성문이든, 싸우고 나서 화해를 청하는 글이든. 거기에 진심이 담겨 있다면 글은 말과 비교되지 않게 깊어진다. 


말은 휘발되지만 글은 남는다. 글은 반복해서 읽을 수 있다. 사소한 일상을 글로 남기는 이유는 언제든 다시 돌아보기 위함이다. 사랑을 말이 아닌 글로 남기는 이유는 언제고 사랑하는 사람이 읽어줬으면 하는 바람일 테다. 


글 없는 독자도, 독자 없는 글도 없다. 비단 사랑의 글이 아니라도, 비밀 일기를 제외한 모든 글은 남에게 읽힌다는 전제하에 쓰인다. 글은 쓰인 순간 타인에게 가닿기 원하는 무언가가 된다. 도달한 글은 독자를 변화시키길 원한다. 글은 그렇게 스스로 생명력을 얻는다. 


그러나 대개 원하는 사람에게만 닿는 말과 달리 글은 의도치 않게 다른 사람에게 닿을 수도 있다. 불행하게도 끝내 바라던 사람에게 닿지 못할 때도 있다. 주인을 잃고 방황할 때도 있다. 『사랑의 역사』는 주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썼지만 잃어버린 글, <사랑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폴란드의 소년 레오와 소녀 알마는 사랑에 빠진다. 레오는 알마를 위해 글을 쓴다. 글의 제목은 <사랑의 역사>이고 등장하는 모든 여성의 이름은 알마다. 그러나 글도 사랑도 완성되기 전에 알마는 나치를 피해 이민 간다. 레오는 가족을 모두 잃고 뒤늦게 미국에 가지만 알마는 다른 사람과 결혼한 상태다. 알마가 낳은 첫아이 아이작은 레오의 아이다. 그들은 레오에게 갈 수 없다. 미국으로 떠나온 레오에겐 <사랑의 역사>의 원고도 없다. 모든 걸 잃어버린 레오는 이제 글을 쓰지 않는다. 그저 '눈에 보이지 않는 남자'처럼 살아간다.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나 알마와 알마의 새 남편까지 죽고, 레오는 자신의 죽음만을 바라보고 있다. 죽기 전 자신과 알마의 진실을 담은 <모든 것을 뜻하는 단어들>을 집필하고, 아들의 주소로 부친다. 아들에게 대답이 없고, 며칠 후 아들의 부고가 난다. 그러던 어느 날 갈색 봉투 우편물이 레오의 집에 도착한다. 발신인은 없고 수신인에 레오의 이름이 적혀있다. 봉투를 뜯어보니 그것은 오래전 자신의 글 <사랑의 역사>다. 레오는 혼란에 빠진다. 과연 아들은 죽기 전 <모든 것을 뜻하는 단어들>을 읽었을까?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사랑의 역사>는 어떻게, 그리고 왜 자신에게 돌아왔을까. 


소설 속 사람들은 레오가 쓴 <사랑의 역사>를 통해 서로 얽히고 연결된다. 레오와 알마, 샬럿과 다비드, 즈비와 로사, 샬럿과 제이콥, 그리고 또 다른 알마와 레오.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야기를 쓰고, 읽어주고, 번역하고, 전달한다. 모든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이 알마였던 것처럼, 모든 사랑은 제각각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한마음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를 위해 쓰인 사랑의 언어는 잊혀선 안 된다. 마땅히 읽히고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수행한 사랑의 준칙 아래, 레오가 쓴 <사랑의 역사>는 우연처럼 여러 사람을 거쳐 레오 자신에게 돌아온다. <사랑의 역사>를 매개로 레오는 또 다른 알마를 만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했던 개인들의 역사가 맞물릴 때 다시 커다란 하나의 '사랑의 역사'가 탄생한다. 어떤 인생이 이야기로 쓰일 때의 간절함과, 그 이야기가 진실에 가닿으려 하는 몸짓은 이토록 아름답다. 


이야기와 사랑은 마땅히 제 자리를 찾아 돌아와야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법이다. 이런 귀환 서사는 논리가 없는 당위 명제다. 그러나 사랑의 구성 요소에 논리는 포함되지 않는다. 논리로 설명될 수도 없다. 소설에서 눈에 띄게 많이 나오는 접속사는 '그런데도'다. 소설에서 사람들은 '그런데도' 사랑을 했고, 레오는 '그런데도' 다시 쓰기 시작했고, 죽어버린 그의 글은 '그런데도' 생명력을 되찾아 사람들을 연결했다. 우리도 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런데도' 누군가를 사랑할 것이란걸. 

가을이 되자 엄마는 대학에 입학하려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주머니에는 가장 낮은 땅에서 온 모래로 가득했다. 엄마는 몸무게가 49킬로그램이었다. 패딩턴 역에서 옥스퍼드까지 기차로 가는 길에 두 눈이 거의 먼 사진사를 만났다고 가끔 이야기하곤 했다. 그 사진사는 짙은 선글라스를 꼈고, 10년 전에 남극으로 여행을 갔다가 망막을 다쳤다고 했다. 그의 양복은 완벽하게 다림질이 되어 있고 무릎에는 카메라를 올려놓고 있었다. 그는 이제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되었는데, 그렇게 나쁜 것만도 아니라고 했다. 그는 엄마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물었다. 그가 카메라 렌즈를 들어 올리고 그 안을 들여다보자 엄마는 뭐가 보이느냐고 물었다. "늘 같은 거죠." 그가 말했다. "뭔데요?" "흐릿한 거요." "그러면 왜 사진을 찍는 거죠?" 엄마가 물었다. "내 눈이 치료될 경우를 대비해서요. 그러면 내가 뭘 보고 있었는지 알 테니까요." 5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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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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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듯 아주 예쁜 김연수 책이다. 대중에 영합하려 하는(ㅋ) 말랑말랑한 제목과 감각적인 단색으로 몸통을 치장했다. 마무리는 도저히 버릴 수 없는 감성적인 띠지. 한마디로 소녀풍. 그러나 오해 마시라. 베컴이 잘 생겼다고 축구 못했던 게 아니었듯, 표지 좀 예쁘다고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다. 소설집을 관통하는 주제는 역시나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세계다 (아 지겹도다!). 김연수는 어느 팟캐스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이해해야 한다. 그게 소설가의 과제다. 나를 이해하는 문제는 이해하는 척하면 어느 정도 쏟을 수 있다. 나 자신에 대해선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러나 남을 이해하는 문제는 속일 수가 없다. 소설을 쓰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궁지의 상태다. 네가 타인의 삶에 대해서 쓸 수 있겠느냐. 솔직한 작가라고 한다면 못 쓴다는 걸 알게 된다. 쓸 수가 없다. 진짜 쓸 수가 없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걸 인정한 상태에서 글쓰기가 이루어진다. (...) 쓰다 보면 약간 놀라운 게 있다.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 아주 미약한 지점이 보이게 된다. 그게 나오면서부터 내가 이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 하지만, 어느 정도는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재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라고 생각한다). 간신히, 겨우, 그렇게 소설을 쓰게 된다."

이런 인터뷰를 듣고 나면 그가 한결같이 이해의 문제에 천착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는 끈질기게 묻는다. 다만 그의 이전 소설들이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영역을 인정하며 일종의 체념과 허무를 보여줬다면, 이 소설집은 타인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작가는 서로 소통이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인물들을 소설 속에 배치했다.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의 미국인 화자는 오래전 한국 남자 케이케이와 연애했다. 케이케이는 젊어서 죽는다. 오랜 시간이 지나 한국에 찾아온 화자는 오래전 케이케이가 살았던 '밤메'에 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한국에 '밤메'라는 곳은 없다. 한국인 통역사는 '밤메'와 비슷한 이름 '방미'로 그녀를 인도한다. 그러나 그곳엔 케이케이에게 들었던 풍경이 남아있지 않다. 이곳은 결코 '밤메'가 아니므로 화자는 분통을 터트린다.

「모두에게 복된 새해」에선 한국인 '나'와 아내의 인도 친구 '싱'이 나온다. 아내가 집을 비운 사이 아내의 인도인 남자 (사람) 친구가 집에 찾아온다. 오래된 피아노를 조율하며 서로 어색한 언어로 이야기한다. 화자는 서로 언어가 잘 통하지 않으므로 아내와 싱은 '서로의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달로 간 코미디언」에선 정상인과 시각 장애인이 대비된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각-언어와 시각-의 차이는 이들의 소통을 방해할 것인데, 과연 이들은 서로의 세계에 닿을 수 있을까?

결코 통하지 않을 것 같던 사람들이 서로에게 닿는 순간이 있다. 바로 감정을 공유하는 순간이다. 기쁜 감정을 공유하면서 월드컵 베이비도 막 낳고 그러면 좋겠지만 ㅎㅎ, 그러기엔 살아있을 동안 한국에서 월드컵이 열리는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반면, 안타깝게도, 슬픔과 고통의 순간은 넘친다. 우리는 결코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없다. 단지 내 고통과 타인의 고통을 견주고, 같이 슬퍼할 수 있을 뿐이다. 이 한계는 명확하지만 고통의 공유는 타인을 간신히나마 이해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로 돌아오자. 방미에 가서 실망한 화자는 돌아오는 길에 한국인 통역사 '해피'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는 차 안에서 담담히 자신이 아이를 잃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이가 군살처럼 느껴지던 시절 아이의 해독되지 않던 울음을. 그 아이를 잃고 나서 텅 비어버린 것처럼 느껴지던 지구를. 그제야 아이의 울음은 내 고통이 아니라 아이의 고통이란 걸 깨달았음을 이야기한다. 해피는 한국어 낙(樂)을 어떻게 통역해야 할지 몰라 nak이라고 그대로 말한다. 자신은 nak을 잃어버렸다고. 그걸 듣는 화자는 그건 케이케이의 젖은 몸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뜻이야 아무래도 좋다. 이 순간 두 사람의 말은 '단순한 음성적 신호(28)'가 아닌 내부에서 생성된 의미가 되어 서로를 연결한다.

「모두에게 복된 새해」의 남편은 인도인 '싱'에게 아내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묻는다. 언젠가 한국어 교실에서 아내는 싱에게 이렇게 말했다. Always I wanted a baby. I want to be the elephant like this. I am alone. I feel lonely. 한국어가 서툰 싱은 lonely를 통역하지 못 한다. 언어가 다른 두 사람이 외로움으로 연결될 때, 남편은 외로움을 방치했다. 남편이 실패한 순간, 싱은 성공한다. 남편은 그제야 아내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제 남편은 돌아올 아내를 기다린다.

「달로 간 코미디언」의 안 PD는 코미디언 아버지의 천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천함의 진짜 이유를 시각 장애인 이관장을 만나고서야 알게 된다. 아버지는 자신의 천함으로 남들을 웃겨야 할 때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안PD는 아버지가 실종됐던 사막으로 간다. 안 PD는 사막에서 소리를 녹음한다. 그걸 듣는 화자는 비로소 시력 없는 사람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게 된다.

때로는 고통이 화해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대부분이 끝까지 타인을 오해하고 마는 세계지만 같은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은 간신히, 겨우,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나의 이야기와 타인의 이야기가 겹쳐질 때, 아무리 공유하는 공간이 작을지라도 그곳은 세계가 된다. 그땐 나무둥치도 당당히 세계의 끝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소설 속 '세계의 끝'에 묻혀 있던 편지처럼, 내 세계의 끝엔 늘 타인의 세계가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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